285화 신세대의 리더십
“요즘 청와대가 무척 혼란스럽다면서?”
광화문의 한 고급 식당에 마련된 별실에서, 청와대에 근무하고 있는 옛 동기를 만난 윤 의원이 넌지시 물어 왔다.
“응? 청와대? 청와대야 늘 혼란스럽지.”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출신에 함께 사법시험에 합격해 2년간 사법연수원도 함께 다녔으니, 어쩌면 질기다면 질긴 인연이다.
연수가 끝나고 윤 의원은 판사로,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검사로 행보는 서로 엇갈렸지만, 그래도 근 10여 년 동안 두 사람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나 아무리 좋은 사이라 해도, 청와대의 특급 비밀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만약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너도 새 길을 모색해 봐야 하지 않겠어?”
청와대에서도 실세라 할 수 있는 민정수석실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적지 않은 정치적 야망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던지는 말이었다.
“새 길이라고?”
윤 의원의 질문에 상대는 부정하는 대신 되물어 왔다. 그것만으로도 윤 의원은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 어차피 비서실에서 충분한 경력을 쌓을 생각으로 나온 거 아니야? 근데 이 상태라면 기껏 검찰을 그만둔 게 말짱 허사가 되지 않겠어?”
“대체 어디서 뭔 소리를 들은 건데?”
그렇지 않아도 민정수석 비서로 근무하기 위해 검찰을 나온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에 대해 요사이 고민이 많던 차에, 대놓고 그렇게 말해 오니 슬쩍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올해 안에 대선을 다시 치르게 될 수도 있다던데.”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아무리 민주 사회라고 해도, 그딴 말 하고 다니면 잡혀간다.”
“국회의원을?”
“나 참. 여하튼 그럴 일 없어.”
“잘 생각해 봐. 지금 대통령이 물러나면 너도 알아서 살길 찾아야 하지 않겠어?”
윤 의원은 친구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부정하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뭔가 있음이 확실하다.
“살길은 무슨. 내가 어디 가서 밥도 못 벌어먹겠어?”
“정치권으로 들어오려면 타이밍이 전부야. 너도 알지?”
“타이밍…… 그래. 네가 원래 기회 하나는 참 잘 잡지.”
“나처럼 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렇지만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모른 체할 수도 없는 거 아니겠어?”
“어려움은 무슨.”
상대가 애써 태연한 척을 해 보지만, 윤 의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여하튼 잘 생각해 봐. 어떻게 해야 너한테 최선인지.”
“최선은 무슨. 내가 그렇게 가벼운 인간이냐? 그리고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네가 알게 되면 나한테 무슨 득이 된다고? 그래 봤자 기껏 박쥐 꼴이나 되지 않겠어?”
가볍게 말을 섞고 있는 듯 보이지만, 두 사람 모두 머릿속으로는 정신없이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뭐. 어떤 정보냐, 그리고 누구에게 전해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흠. 네가 박 의원 계파였나? 박 의원이 뭐 대단한 힘이 있다고.”
“박 의원님은 훌륭한 분이셔. 비록 대단한 세는 없지만, 진심으로 나라를 위한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고.”
“관둬. 아무리 그래도 박 의원이 대권 잡을 일은 없어.”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의외의 답이었는지, 친구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뭐야? 그럼 너 파벌 옮겼냐? 어디로? 정 대표?”
“아니. 내 생각이 맞다면 이번 선거는 엄청난 혼란 속에 치러질 거야. 어쩌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사람이 대권을 잡을 수도 있고.”
“응? 무슨 말이야? 너 설마?”
“그래. 너한테만 말하는 거야. 그 설마 맞아. 도전해 볼 생각이다.”
“미친…….”
다소 격한 반응에 윤 의원도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친 거 같지?”
“어. 물론 네가 인기가 있는 건 알지만. 우리 이제 겨우 마흔이야. 솔직히 앞을 생각해 보면 더 기다리는 게 맞지 않아?”
“아니. 이번이야말로 적기일 거 같아. 지금처럼 혼란스럽지 않다면 나처럼 신인이 그런 자리에 나갈 기회가 얼마나 되겠냐?”
“그렇다고는 해도…….”
친구는 여전히 껄끄러운 반응이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터다.
“그리고 이번이 야당에게도 절호의 기회이고.”
“솔직히 부동산이나 경제가 문제이기는 하지. 그래도 너 지금 여당 뒤에 누가 있는지 몰라서 그래?”
“강 회장?”
“그래. 강 회장이 이번하고 지난번 대선에서 여당을 밀어준 거 기억하지? 이번이라고 다르겠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걸림돌이 거론되었지만, 윤 의원은 이에 대꾸하지 않고 대뜸 자신의 근황을 내뱉었다.
“나, 이번에 미국 갔다 왔다.”
“그래. 소식 들었다. 워싱턴에서 거물들 만나고 왔다며? 그리고 뉴욕에서…… 설마 너?”
“그래. 플라자 호텔에 갔었다.”
“미친! 진짜냐? 강 회장이 너 밀어준대?”
“워싱턴에서 국무장관하고 재무장관을 내가 무슨 수로 만났겠냐? 나처럼 인지도 없는 정치인이.”
“하…… 그렇지 않아도 비서실에서 네 이야기가 오르내리고는 했어. 너처럼 2선에 불과한 사람이 대체 어떻게 그런 거물들이랑 단독 회견을 했냐고 말이 많았지. 누가 혹시 강 회장이 주선한 거 아니냐고 했다가 말도 안 된다고 까였는데.”
이는 대통령실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평소라면 야당의 주요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바로바로 보고가 올라왔을 테지만, 아쉽게도 대통령의 건강 문제로 비서실은 지금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건강 문제를 외부에 숨기고, 대통령의 결재 없이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까닭에 모두가 비상 상황에서 일이 두서없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서 아주 엄청난 대접을 받았다.”
그날의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은 하지 못했지만, 한 접시에 수억 원이 넘어간다는 알비노 캐비어를 대접받은 사실에 대해서는 솔직히 뿌듯한 심정이다.
흙수저 출신으로 소박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유명한 윤 의원은 사실 미식가였다.
잠은 허름한 곳에서 자도, 음식은 가리는 편이다. 가능하다면 세상의 이름난 음식은 전부 먹어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을 정도이다.
어쩌면 흙수저로 자라온 탓에 어린 시절 남처럼 이런저런 식도락을 즐기지 못한 탓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가능하다면 다양하고 특이한 음식을 즐기고 싶은 욕구는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정치적인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서 윤 의원은 그 욕구를 꾹꾹 눌러야만 했었다.
그리고 이번 뉴욕의 만찬에서 윤 의원의 그런 소박한 소망은 조금은 이루어진 것 같았다.
“나 원, 진짜란 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대체 왜 널?”
“이 자식! 내가 뭐가 어디가 어때서?”
“아니. 네가 젊은 정치인 중에서 제일 이미지가 좋기는 하지만, 하필 왜 너냐고? 강 의원이 밀어주기만 한다면 절이라도 할 사람이 널려 있는데?”
“그거야…… 내가 제일 만만해서가 아니겠니? 젊고, 경력도 짧고. 날 대통령에 올려놓으면 자기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인 게지.”
“흠. 그럴 수도 있겠네. 네가 당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되면 이모저모 강 회장 도움을 받아야 할 것도 있고.”
“뭐.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를 수도 있지.”
대통령만 되고 나면 유진의 압력이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감추지 않겠다는 듯 윤 의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거야. 그 사람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야. 행정부고 언론이고 그 사람한테 뭐라도 받지 않은 사람 없을걸?”
“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 아직도 이 사회에는 상식 있는 사람들이 충분히 있다고. 그리고 강 회장이 앞으로도 실패 한 번 안 할 거라는 생각도 우습지 않아?”
“뭐. 어찌 되었든 그거야 나중 일이고. 너 정말로 결심한 게로구나?”
“결심을 내리기 위해 딱 한 가지 모자란 게 있지.”
윤 의원이 자신의 오랜 벗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집무를 보기 힘든 상황인 것은 맞는 모양이야.”
마침내 친구는 청와대 비서로서의 책무를 내려놓고, 비밀을 누설했다.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대화의 맥락으로 어느 정도의 상태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정말이었구나.”
“음…….”
“고마워.”
“무슨 소리야? 내가 뭘 해 줬다고?”
지금 한 말이 나중에 어떤 비수가 되어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니, 친구는 슬쩍 말을 돌렸다.
“여하튼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게 되면 민정수석 자리는 네 거다.”
“겨우 민정수석?”
친구가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솔직히 말해 정치권에서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그렇겠지.”
계파에, 지역구에, 사회단체에 이리저리 얽혀 있는 난맥 안으로 들어서고 겨우 몇 년이다.
“벌써 김칫국부터 마시기는 싫지만, 어쨌든 꿈을 꾸기 시작했으니 큰 그림은 그려야겠지. 여하튼 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두 번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할 생각이고.”
“으음…….”
“8년이야. 8년 동안 청와대 민정수석을 계속하지는 않겠지?”
“그러려나?”
“몇 년 정도 자리를 잡고, 지역구 하나 맡아 당으로 들어가.”
“흐음…….”
“너한테 주어지는 시간이 적어도 5년은 될 거야. 거기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하고.”
윤 의원이 말하는 동안 친구는 연신 신음성을 흘렸다.
상당히 달콤한 제안이다. 비록 당을 바꾸는 것에서 오는 박쥐 이미지의 위험성은 있지만, 다행스럽게 그는 아직 당에 소속된 것은 아니다. 그저 현 대통령 비서실에 근무하고 있을 뿐.
그저 능력을 인정받아 두 정부에서 연속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미지 메이킹이라면 딱히 나쁠 것도 없다.
더군다나 대통령의 전격적인 후원과 후일 강 회장의 지원까지 받아 낼 수 있다면 어쩌면 친구에 이어 대권을 물려받는 것도 꿈은 아니다.
“네 말대로 인생은 타이밍이겠지?”
생각보다 결정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두 친구는 그렇게 손을 잡았다.
그날의 비밀스러운 회합 이후로 윤 의원의 행보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아직 대통령의 건강 문제가 그 정도까지 위급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야당의 주요 인사들이 미적거리는 사이, 윤 의원은 재빠르게 세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에 SS파트너스가 은연중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2선의 윤 의원으로서는 아직 쉽게 만나기 어려운 재계 인사들과 모임을 주선한다거나, 언론사 사주들과 개인적인 만남을 주선하기도 하고, 심지어 미국 대사도 몇 번이나 만나 한미 현안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를 한 사실이 여러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윤 의원은 유진이 자신을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유진이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또한 실감해야 했다.
그 외에도 윤 의원의 행보는 계속 이어졌다. 부동산을 비롯해 경제 전반에 현 정권의 책임을 강하게 주장했고, 언론들은 그의 발언을 중요하게 인용했다.
“무서울 정도로군. 포털 사이트고 언론사고 어디에고 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스마트폰에서 자신에 관련된 기사를 확인한 윤 의원이 말했다.
“신세대의 리더십. 제목이 참 잘 뽑혔네요. 흐흐. 전부 다 메인에 올라가거나,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언론사들이 의원님의 발언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모양입니다.”
윤 의원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덩달아 어깨에 힘이 들어간 보좌관이 싱글거리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