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정가의 괴물
윤 의원의 정치적 돌풍과 대통령의 건강 문제가 한국 사회에 충격을 던지고 있는 순간에도,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일전자 목표 도달했습니다.”
“제일생명 목표 도달입니다.”
“다산자동차 목표 도달입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걸쳐 꾸준하게 한국 기업들의 주식을 매수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얼마 전 느닷없이 불거져 나온 대한민국 대통령 하야설에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던 경제 상황 속 바닥까지 추락한 한국 기업들 주가는 다시 하락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들은 유진의 과감한 투자와 성공적인 미국 시장 공략을 통해 경쟁국들보다 월등한 성장을 보여 오고 있었지만, 금리 인상으로 유발된 국제적인 불황과 두 차례의 전쟁에서 기인한 원자재 수급 불안의 여파를 비켜 갈 수는 없었다.
미국 증시가 1/3 떨어지는 동안 한국의 증시도 비슷한 수준의 하락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최근에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이 봉합되며 중국이 다시 한국 기업들과 경쟁에 나설 거라는 전망이 나오며 한국 기업들은 오히려 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터져 나온 정치권의 불안은 증시의 폭락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의 여권이 유진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시장은 판단하고 있었는데, 만일 다음 대권이 야당에게 넘어가면 유진과 정부 사이에 커다란 분쟁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까지 주가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한국 언론들은 현재 정치 상황에 대해 유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 위해 여러 번 접촉을 해 오고 있었지만, 유진은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무난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유진의 태도는 오히려 시장의 불안감을 가중시켰고, 이러한 정치적인 불안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주가가 반등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그런 와중에 세계 각지에 있는 유진의 투자기관들은 은밀하게 한국 기업들의 지분을 매수하고 있었다.
적어도 여섯 달에 걸쳐 차근차근 한국 대기업들의 지분을 최대한 매수하는 것이 목표였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다시 정치권의 혼란도 가라앉고 기업들의 실적도 호전되며 주가는 다시 반등할 것이다.
대형 투자자들이 가장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시장이 폭락한 직후라는 사실은 이미 20세기 경제 위기에서 몇 번이나 입증되었다.
물론 미국 시장과 달리 아직 신흥 시장에 불과한 한국의 경우는 누구도 지금이 과연 밑바닥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쉽게 뛰어들기 어려운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을 알고 있는 유진은 다르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탈이 지금의 위기를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이 시기가 지나면 한국 기업들 상당수를 완전히 손에 넣은 후 기업들의 미래에 어떠한 선택이 유리한지 알고 있는 유진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금 더 명확하게 관여를 할 생각이니, 지금의 주가가 정말로 가장 낮다는 사실도 분명했다.
물론 유진의 행위는 일말의 불법적 요소도 없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자의 본질에 부합하는 당연한 행동일 뿐이다.
유진의 투자는 너무 크게 하락하는 주가를 방어하고, 반대로 너무 상승하는 주가를 정상적 가격으로 되돌린다는 의미에서는 시장 질서를 바로잡고 있다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유진이 시장의 질서도 바로잡으면서 한국 대기업들의 지분도 사냥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고 있는 사이, 한국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청와대 성명이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하야한다는군요.”
“그럴 줄 알았다니까. 지금부터 바빠지겠구먼.”
그해 상반기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한국의 대통령이 질병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외부에 알려진 바로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전혀 정무를 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적어도 석 달 이상, 한국은 최고 책임자 없이 굴러가고 있던 것이다.
국민들은 청와대와 여당의 무책임한 태도에 분노했고, 중요한 정보를 숨겨온 책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한편에서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이제 새로운 리더를 뽑기 위한 60일짜리 경기장이 준비되었고, 여당도 야당도 서로가 자신이 적합한 사람임을 알리기 위해 쟁쟁한 인물들이 앞다투어 나서고 있었다.
“장 대표가 출마할 계획이라고 했지?”
“이 의원과 전 의원도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 우리 쪽은 어떤가?”
“지금 40명 정도 지지를 확보했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해당 의원들이 지지 성명을 낼 수 있습니다.”
그동안 가장 공격적으로 움직인 윤 의원은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당내 의원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더불어 그가 속해 있던 파벌의 수장인 박 의원이 윤 의원의 대권 도전에 찬성하며 박 의원 계파는 이제 윤 의원 계파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야당 내에서 윤 의원이 너무 젊어서 위태롭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윤 의원이 불러일으킨 돌풍이 태풍으로 발전해 정말로 대권에 승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 아직은 승기를 잡았다는 말을 할 정도는 아니다. 야당에는 벌써 몇 번 대선에 도전해 온 거물급 정치인이 몇 명이나 있다.
정치는 세몰이이고, 당내 정치에서 세몰이를 하기 위해선 경륜이 필요했다.
몇몇 중진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어느 정도 만회를 했다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기만 했다.
“여당 쪽도 만만치 않겠어.”
“그쪽에 더 인물이 많은 건 사실이니까요.”
지난 10여 년 동안 언론에서 무게 중심을 두어 온 것이 여당이다. 당연히 여당 인사들이 좀 더 널리 알려져 있고, 정치판에서는 이름값이 전부나 마찬가지다.
“아직은 백중세야.”
사실 여론조사를 해 보면 여당이 조금 더 우위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정말 여당을 지지해서라기 보다는 미국의 유진이 여당과 좋은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여당이 가진 가장 큰 프리미엄은 바로 유진이었다.
“한국 여당에서 계속 연락이 오고 있습니다. 사실 야당도 마찬가지이지만요.”
그리고 그 와중에 누구보다 바빠진 사람들은 모니카를 비롯한 비서진이었다.
한국 정치권과 통하는 직통 전화를 담당하는 직원은 온종일 쉬지 않고 울려 대는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유진과 직접 통화가 연결되는 일은 없었다. 아직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통화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유진과 통화를 하겠다는 전화가 계속 이어졌고, 심지어 뉴욕까지 날아와 무작정 만나겠다고 플라자 호텔에서 숙박하며 기다리는 정치인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물론 그들에게 그러한 열정이 있기에 정치인의 길을 걸을 수 있었겠지만, 상당한 민폐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유진에게 낙점을 받는 것이 대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확했다.
혹여 유진이 방송에 나와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선언을 한다면 그날로 선거는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이다.
사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유진이 한국에 투자해 놓은 엄청난 거액과 지금도 꾸준히 다양한 통로로 지원하는 비용들, 그리고 한국과 미국 정치계를 다이렉트로 이어 줄 수 있는 실력자라는 사실은 한국인들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니 유진이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것은 그가 대권을 잡았을 때 유진의 한국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한편으로는 유진이 반대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유진의 행보에 반대한다는 신호이며, 유진으로서는 한국 시장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히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 정도가 아니다.
종편 채널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다양한 시사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소위 경제 전문가들과 정치 평론가들이 주장하며 정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방송이나 언론에 자신의 의견을 기고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두려움이나 욕망을 자극하는 것으로 인지도를 높이려 했고, 그러다 보니 경쟁하듯 더 자극적인 말을 쏟아 내는 것이 그런 인지도의 상승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그렇게 유진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진의 명성은 한국 경제의 부진 속에 오히려 커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한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상황은 더욱 심화되어 각 당의 경선 며칠 전까지 유진을 만나기 원하는 한국 사람들로 플라자 호텔 로비가 가득 찼다는 소식이 미국의 뉴스에 보도될 정도였다.
선거 열기의 과잉은 한국이 아닌 미국 땅에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경선이 바로 코앞에 닥쳐서야 유진은 야당의 몇몇 지도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번 선거에서 윤 의원이 상당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모양이로군요. 젊은 사람이 그렇게 나라를 바꿔 보겠다고 열심인 모습이 보기 좋더군요. 여기 미국은 어째서인지 정치인들의 나이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데 말이에요. 예, 그렇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언제 한 번 들러 주십시오.”
물론 직접적으로 윤 의원을 지지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미국인인 그가 다른 나라 정치에 개입할 수야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유진이 굳이 이 시점에서 윤 의원을 언급한 것으로 충분했다. 눈치 빠른 정치인들은 유진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전화를 돌린 바로 다음 날, 야당 중진들의 윤 의원에 대한 지지 선언이 이어졌다.
야당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경선 선거인단의 지지가 그런 흐름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윤 의원. 어떻게 강심을 얻은 모양이구려. 허허! 이번 선거는 아주 기대가 큽니다.”
윤 의원에 대한 지지를 선언한 의원들뿐 아니라 경선에 참여하지 않던 의원들도 슬그머니 윤 의원의 주변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허 참! 겨우 전화 한 통화 받은 걸로 싹 돌아섰다는 말이지.”
다른 의원실에 근무하는 보좌관으로부터 몇몇 의원들이 자신에게 돌아선 이유가 유진에게서 받은 전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윤 의원은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아무리 영향력이 있다 해도, 보통은 조금이나마 밀고 당기는 게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말을 들어 보니 밀고 당기긴커녕 그저 감사하다는 말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단다.
대체 이 사람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야당의 지도자로 행세해 왔나 싶다가도, 상대가 가진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겠구나 싶기도 하다.
“이대로는 안 돼!”
생각보다도 훨씬 더 어렵지 않게 경선 승리를 거머쥔 윤 의원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나라의 정치가 한 사람의 괴물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
이 그릇된 상황을 자신의 힘으로 꼭 바꾸고야 말겠다는 것이 윤 의원의 결심이었다.
물론 그런 그의 내심을 유진이 알았다면 오히려 반문했을지도 모른다. ‘대체 정상적인 국가가 뭔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