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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88화 (288/363)

288화 볼모 혹은 외교관

한국이 그렇게 급작스러운 선거의 폭풍에 휘말려 있는 동안 유진이 한국에서 온 정치인들과 만남을 허용하지 않은 것은 딱히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정말로 그가 정신없이 바빴기 때문이라고 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

유진의 일과는 생각보다 훨씬 더 타이트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지닌 영향력이 커지며 그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늘어났다.

아마 매일 그에게 접견을 요청해 오는 사람의 명단만으로 노트 한 권은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 중에는 유진이 친히 만나야 할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적어도 한 국가의 지도자나, 그에 준하는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적당한 스케줄에 꼭 끼워 넣어야 했다.

거기에 미국의 재계, 금융계 유력인사들, 할리우드에서 온 스타와 제작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정계의 유력 인사들이라면 늘 우선순위의 가장 윗자리에 올려 두었다.

여전히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고, 그런 미국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니까.

그리고 한국에서 경선이 치러지던 날은 정말로 플라자 호텔 로비에 줄을 서 있는 정치인 그 누구보다 중요한 인사와의 만남이 준비되어 있었다.

“신수가 아주 밝으시군요.”

“하하! 뭐, 정권이 바뀌어도 아무 문제 없이 자리를 부지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세상에 안위무사만큼 좋은 게 어디 있겠습니까?”

장시웨이의 말처럼, 국가의 지도자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새 지도자의 비밀 자금을 굴릴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유진은 진심에서 나오는 축하의 말을 건넬 수 있었다.

만일 새로운 자금관리인이 나왔다면, 서로 안면을 트고 마음을 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유진 역시 그런 과정이 필요 없다는 것이 반갑기도 했다.

장시웨이와는 그날 하루 동안 수백억 달러에 해당하는 자금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리에서 물러난 과거 지도자의 자금을 어떤 계좌에서 다룰 것인지에서부터 새로운 지도자의 자금을 어떻게 굴리면 좋을지,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중국의 지도부 중에서도 유진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이가 많다는 청탁까지 할 이야기가 잔뜩 있었다.

유진으로서도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지도부의 자금을 받아 주고,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것으로 중국에서의 매끄러운 사업이 진행되는 반대급부를 기대할 수 있는 좋은 거래이다.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곳 플라자 호텔의 콘도 한 채를 임대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들이 끝나고, 장시웨이가 전혀 생각지 못한 요청을 해 왔다.

“굳이 플라자 호텔이라는 말씀이시죠?”

“네. 플라자 호텔입니다.”

뉴욕의 유서 깊은 플라자 호텔은 이미 2000년대 초반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절반은 호텔로, 그리고 남은 절반은 미국식 아파트인 콘도로 바꿔 일반인들에게 분양했다.

일반인이라고는 해도 방 하나짜리 스튜디오 한 채에 수백만 달러에서 방 네 개짜리는 수천만 달러에 달하니, 맨해튼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비싼 최고급 주택에 해당한다.

유진이 매입한 것은 호텔 부분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뉴욕 부자들의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플라자 호텔을 매입한 이후로 유진은 콘도도 시중에 나오는 대로 전부 구매해서 지금은 콘도의 1/3 가량을 소유하고, 산하에 둔 회사 직원들의 숙소 등으로 사용하는 중이다.

한편 호텔도 1/3 정도는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으니, 플라자 호텔에서 객실 부분은 이제 겨우 200실을 조금 넘고 있을 뿐이다.

사실 편의를 위한다면 나머지 객실도 전부 콘도로 바꾸고 유진이 전부 사용하는 편이 낫겠지만, 객실을 유지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유진이 요안나나 윌리엄 등을 통해 운영하고 있는 자산운영사의 고객은 대개 일국의 정상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영향력을 지닌 거물들이다.

그런 VIP들이 뉴욕에 방문할 때에 플라자 호텔의 객실에 묵는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유진과 만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생긴다.

유진이든, 유진의 고객이든 늘 매스컴이 쫓기 마련이고, 유진과 어느 나라의 정상이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도 뉴스거리가 되기 마련이다.

단순히 뉴스가 되는 것도 상대방으로서는 꽤 문제가 될 소지가 있지만, 그런 영향력 있는 두 사람의 만남이 해당 국가나 지역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신호를 시장에 줄 우려도 있다.

다행히 플라자 호텔은 여전히 뉴욕에서도 손꼽히는 최고급 호텔이기에 그런 VIP가 숙소로 삼기에는 조금도 무리가 없다.

유진을 비밀스럽게 만나고자 하는 고객이라면, 플라자 호텔의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숙박하다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용히 유진의 펜트하우스를 방문하면 그만이다.

더군다나 이곳의 경비는 뉴욕의 그 어느 호텔과도 비교도 되지 않는다.

유진은 자신과 주변 사람의 안전에 대해서는 강박적일 만큼 신경을 쓰는 편이라 백악관 경호원 출신으로 이루어진 사설 경호업체를 세우고, 이 플라자 호텔을 그들로 가득 채워 버렸다.

상시 경비 인력만 무려 100명에 달하는 정예 요원들이 요소요소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으니 굳이 유진을 만나려는 목적이 없더라도 신변 안전에 신경을 쓰는 VIP들에게는 플라자 호텔이 뉴욕에서 가장 매력적인 호텔일 수밖에 없었다.

“굳이 그런 말을 꺼내는 걸 보면, 아주 특별한 사람이 사용하려는 모양이군요?”

“예, 맞습니다. 사실은 셰넌 리 양이 뉴욕대에서 MBA 과정을 밟을 예정에 있습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하지만 장시웨이가 특별히 부탁이란 표현까지 한 것으로 본다면 아주 중요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대학에서 MBA를 공부할 예정이란 이야기는 그리 나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중국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것까지는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씨는 중국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성씨의 하나이다.

왕씨와 함께 각기 1억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리’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고, 당연히 정권 내에서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리’씨가 있다.

그런데 장시웨이를 심부름꾼으로 사용할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사 중 ‘리’씨 성을 가진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셰넌 리가 본명은 아닌가 보군요.”

잠깐의 추리를 끝낸 유진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본명은 예샤오밍입니다. 셰넌 리는 미국에서 사용할 이름이고요.”

“예샤오밍 양이라면, 예 주석의 둘째 따님이었던가요?”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네. 얼마 전 청화대학에서 경제학과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스턴 대에서 MBA 과정을 수료하기로 했습니다.”

중국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만 들어가는 최고의 대학인 청화대에 예샤오밍이 능력으로 들어갔는지, 혹은 부친의 후광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몇 개의 뉴욕 대학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스턴 대에 들어간 것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예 주석의 따님이라면 얼마든지 편의를 봐 드려야지요.”

중국 최고 권력자의 딸을 의탁하겠다는데, 거부할 수는 없다.

예 주석은 자식이 뉴욕 생활을 보내는 데 가장 안전한 방법을 생각해 낸 모양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플라자 호텔의 콘도라면 그 어디보다 안전할 것은 틀림없다.

얼핏 뉴욕 중국 영사관 근처가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가명을 사용한다는 것으로부터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었기에 수긍이 되었다.

권위주의 국가 지도자의 자녀들이 선진국에 유학을 나오는 것은 꽤 흔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안전상의 이유에서, 그리고 정치적 이유에서 가명을 사용한다.

북한의 로열패밀리가 그랬고, 중국도 최고 지도자의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혹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피하기 위해 철저하게 익명으로 남겨지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말하자면 예 주석은 전례를 따르는 셈이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장시웨이를 통해 유진에게 개인적 부탁을 한 것을 보면, 단순히 안전 때문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중국의 지도자는 유진과 더욱 강한 유대를 원하는 모양이다. 자신의 자식을 다른 나라에 볼모로 보내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 경우 볼모는 단순한 인질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외교관에 가까울 것이다.

서양에서와 달리 동아시아에서는 군주의 자식을 다른 나라의 볼모로 보내면서 해당 국가 정상과의 우호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의 해석으로는 무언가 목숨을 내맡기는 인질처럼 이해되고는 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외교관에 훨씬 가까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더욱 거절할 이유가 없다.

중국은 앞으로도 유진에게 미국 다음으로 중요한 시장이 될 것이고, 그곳에서 아주 많은 이익을 얻어 낼 생각이다.

궁극적으로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유진이 지닌 영향력 수준으로 발전하려는 의향이 있다.

그러니 다음 10년 동안 중국을 책임질 지도자의 자식에게 약간의 편의를 봐 주는 것은 유진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다.

“적어도 뉴욕에 있는 동안 셰넌 리의 안위와 편안한 생활은 보장하지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장시웨이는 이날도 자신이 부여받은 모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영화와 안위도 길어졌을 것이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주말 오,전 유진의 팬트하우스로 상당히 중요한 몇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장시웨이 정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VIP들이다.

백악관 대통령 비서실장 조셉 굿맨, 민주당의 유력 정치인인 데이비드 첼로니 캘리포니아 하원의원, 플로리다주 주지사로 매번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찰리 프로스트, 그리고 현 부통령인 엘리자베스 슐츠까지.

당파를 막론하고 미국에서는 대통령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파워피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오늘 조찬회에 참석해 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손님들을 테이블로 안내하고, 유진이 그들 모두에게 인사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유진과는 몇 번씩 만나 본 경험이 있었기에 다들 편안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거 과정에서 유진의 막대한 후원금 세례를 받아본 적 있기에 유진의 초대에 다른 약속을 취소하고 날아온 훌륭한 손님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군요. 찰리.”

엘리자베스 부통령이 조금 어색하게 공화당 주지사에게 인사를 한다. 이 자리에서 유독 찰리만 정파가 다른 까닭에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어쩐지 저 혼자 적진에 뛰어든 기분이로군요. 하하!”

“위험한 분이 참석하셨군요. 이거 모두들 조심해야겠어요.”

민주당 의원인 데이비드도 한마디 한다. 다들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유능한 정치인이다 보니 말 한마디 한마디도 결코 지는 일이 없다.

아무래도 이 자리가 쉽지는 않겠다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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