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89화 (289/363)

289화 수라상

“여러분을 위해 제 고향에서 아침에 즐기는 몇 가지 요리를 준비해 봤습니다. 입에 맞으시면 좋겠군요.”

“아침 식사치고는 무척 화려한 차림이로군요. 한국에서는 아침에도 이렇게 다양한 요리를 한꺼번에 즐기는 겁니까?”

각자의 앞에 놓인 열댓 개가 넘어가는 접시를 바라보며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집안마다 다르겠지만, 현대화 이전에 여유 있는 집안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라도 꽤 다양한 요리들을 한꺼번에 모아놓고 식사하고는 했다더군요. 오늘 차린 요리들은 공화국이 되기 전 대한제국의 황제가 즐기던 아침 요리를 재현한 겁니다. 백 년도 더 전의 음식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무형문화재 보유자분께서 방미하셔서 최대한 솜씨를 발휘하신 겁니다.”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것은 황제만이 즐길 수 있었던 12첩 반상이다.

유진이 말한 것처럼 무형문화재 장인이 참여한 것은 맞지만, 현대 요리의 대가와 함께 미국인의 입맛에도 크게 거슬리지 않도록 적지 않은 퓨전이 가해졌다.

“색이 무척 화려하군요.”

다양한 나물들을 사용한 요리의 특징답게 제대로 차린 한국 요리는 그 다양한 색상이 상당히 눈에 띈다. 특히 한국 음식에 낯선 서구인이 보기에는 더욱 인상적인 모양이다.

“다양한 채소를 사용해서 건강에도 좋을 것 같아요.”

“소금이 그리 많이 사용되지 않은 걸 보니 확실히 건강식이라 할 수 있겠군요.”

“맛도 독특하면서 인상적이에요.”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모두가 한마디씩 꺼내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사실 유진이 어떤 요리를 내놓았다 해도 다들 비슷한 칭찬을 내뱉고 있을 터이다.

“이렇게 건강하고 맛있는 요리를 즐기니 한국인들이 늘 젊어 보이는 거겠죠?”

“그런가 봐요. 아직도 유진을 보면 내 아들보다 어려 보인다니까요.”

“동양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인들이 그렇게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아요.”

“음. 우리 관저에도 한국 요리사가 있으면 좋겠군요. 이런 요리를 매일 즐기면 나도 유진처럼 늘 젊게 살 수 있지 않겠어요?”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유일한 여자인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의 전통 요리를 선보이는 식당이 워싱턴에 곧 열릴 예정입니다. 말씀만 하시면 언제라도 오늘 같은 요리를 바로 부통령실로 배달해 드리도록 하지요.”

유진이 무형문화재 장인을 초청한 것은 단순히 이날의 접대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시장에 한국 문화를 진출시키려는 계획은 지금도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그리고 영화와 만화까지 다방면에서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문화의 미국 시장 잠식은 점점 속도를 붙이고 있다.

물론 그런 성장이 전부 유진 때문이라 할 수는 없다. 유진이 한 것이라고는 그저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돈을 아끼지 않고 쓴 정도이다.

하지만 모두가 주지하다시피, 문화 사업은 결국 자본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미국 문화가 지난 50여 년 동안 파죽지세로 세계 문화시장을 선도하고 압도할 수 있던 배경에는 거대한 미국 시장을 배경으로 쌓인 막대한 자본이 있다.

영화 한 편을 찍기 위해 사용되는 비용이 수천만 달러 수준이면 독립영화 평가를 받는 곳이 할리우드이다.

그 돈은 다른 나라에서는 1년에 한 편도 나오지 않을 만큼 엄청난 액수이고.

자본이라는 면에서는 그 어느 국가의 문화도 미국에 비견될 수 없고, 오히려 갈수록 자국 문화가 미국에 잠식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유독 놀라운 성장을 거듭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한때 미국인들을 유혹하던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조차 이제는 황혼기로 접어드는 가운데,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 그리고 음악이 유일하게 미국 문화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할리우드에 못지않을 자본이 유진 한 사람을 통해 한국 문화계에 무차별적으로 투입되고 있었다.

영화 한 편에 수백억 원을 투입하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고, 천억을 넘어서는 한국 영화가 전 세계 극장에서 개봉한 것도 유진의 힘이다.

드라마도 마찬가지이다. 한 시즌에 수백억 원짜리 드라마가 쉴 새 없이 제작되어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 HBO 같은 글로벌 OTT 서비스를 통해 지속적으로 미국과 세계 시장에 공급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인지도를 얻는 스타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미 미국의 십대 청소년들은 자국 음악보다 한국 출신 보이그룹이 부르는 음악에 더 빠져 있고, 젊은 층 남성들은 한국 걸그룹 멤버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 출연하는 한국 출신도 점점 늘어나, 이제는 조금씩 웃기는 역할 이상의 비중 있는 조역은 물론이고 점차 주역의 자리까지 차지하는 일이 늘어났다.

물론 유진이 지닌 할리우드에서의 영향력 덕분이다.

여전히 유진은 어떤 영화가 그해에 가장 화제가 되고 흥행에 성공할지 알고 있었다.

그와 손을 잡으려는 제작자는 한국의 정치인들 이상으로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 상황이다.

“이런 멋진 식사를 제공하는 레스토랑이라면 워싱턴에서도 굉장한 인기를 얻을 거예요. 내가 장담하지요.”

“탤러해시에도 하나 생기면 좋겠군요. 요즈음은 플로리다 주립대학교로 유학 온 한국인도 적지 않으니 하나쯤 있어도 나쁘지 않겠어요.”

엘리자베스와 찰리 프로스트가 앞을 다투어 한국 식당 오픈에 관심을 드러낸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가운데 조찬 모임은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

“사실 여러분을 모신 것에는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한국에서 공수해 온 차를 대접하며 유진이 말을 이었다.

“말씀하십시오. 경청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지만, 정치적 위치는 낮고 한편으로 실질적인 파워는 또 가장 큰 조셉 굿맨 비서실장이 말했다.

“혹시 한국의 정치 문제 때문인가요?”

데이비드 첼로니 캘리포니아 하원의원이 넘겨짚었다.

현재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한국의 정치 상황은 널리 알려진 일이고, 유진이 한국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도 비밀이 아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몇몇은 유진이 한국 정치계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미국 정계의 중요한 인물들을 모았고, 또 굳이 한국식의 아침상을 준비했다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과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정치 문제는 맞습니다.”

유진이 웃으며 대답했고, 찰리 프로스트 플로리다주 주지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유진이 부탁을 해 오고, 그걸 들어준다면 적지 않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득을 얻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일 유진이 플로리다에 100억 달러쯤 투자하겠다고 나선다면 주지사인 자신이 그 영광을 누릴 각오가 되어 있던 차였다.

“정치라…… 하긴 요사이 세계 곳곳이 정치 문제로 어지럽지 않은 곳이 없지요.”

“요즈음 러시아 정치계가 무척 혼란스럽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죠. 그곳이야말로 끔찍할 정도로 혼란하지요. 전쟁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습니다. 차라리 지도부가 물러서며 정치적 안정을 선택한 중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맞습니다. 러시아의 앞날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부통령이 대뜸 말을 받았다.

그들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온갖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입장인 만큼, 러시아 이야기가 나오니 바로 반응이 올 수밖에 없다.

“흠. 러시아라니. 조금은 뜬금없군요.”

“러시아 정치를 논의하자고 우릴 부른 건가요?”

하지만 미국 내 정치인인 캘리포니아 하원의원과 플로리다주 주지사의 경우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다.

두 사람 모두 러시아 국내 정치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는 내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물론 그런 표정 모두가 의도적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인들은 대개가 그렇다. 자신이 이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신이 얻게 될 대가를 높이려는 의도이다.

“사실 저는 전 세계에 걸쳐 아주 많은 투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유진은 시작부터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 투자자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 경제에 문제를 몰고 오는 몇몇 나라들의 정치적 혼란은 제게는 결코 반길 수 없는 현안이기도 하지요. 사실 러시아와 중국의 전쟁 때문에 제가 얼마나 큰 손실을 보았는지 모두들 아실 겁니다.”

유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에서 유진이 발견한 1,000억 배럴짜리 유전이 두 강대국의 전쟁으로 붕 떠 버렸다.

유진은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주장할 수 있는 처지였다.

“그런 이유로 러시아나 중국같이 지역에서 중요한 나라들, 혹은 범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나라들의 정치 문제는 늘 저 같은 투자자들에게는 상당한 불안 요소일 수밖에 없지요. 그 때문에 다음 러시아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가 상당한 고민거리랍니다.”

“흐음…….”

유진의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조셉 굿맨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사실 유진이 아니라 백악관이 더 관심을 기울일 만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통령의 표정도 밝지는 않다. 러시아의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따라 미국의 대외 기조 또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지난번 지도자처럼 반미 러시아 제국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승계한다면 유럽과 아시아에 골칫덩어리가 그대로 남는 셈이다.

“그래서 하시려는 말씀이 뭔가요?”

캘리포니아 하원의원이 물었다.

“생각을 해 보니 이런 문제는 저뿐 아니라 정치권에 계신 분들도 무척 깊은 우려를 하고 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진이 부통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이자 부통령이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 맞는 말씀이에요. 러시아의 차기 지도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미국은 굉장한 관심을 두고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중국의 지도자만큼이나 중요한 자리이죠.”

백악관 비서실장이 덧붙였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더 이상 러시아를 외부로 확장하겠다는 야심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합니다.”

유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단지 희망 사항인가요?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으신 건가요?”

찰리 프로스트 플로리다주 주지사가 물었다. 어떻게 보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가 가장 놀란 듯했다.

“모든 희망에는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던가요?”

의외로 대답은 유진 대신 데이비드 첼로니 캘리포니아 하원의원에게서 나왔다.

“지금 유진은 설마 우리가 러시아의 정치에 개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건가요?”

여전히 사태 파악이 느린 플로리다주 주지사였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미국이 그런 행위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는 말은 할 수 없겠군요.”

캘리포니아주 주지사가 말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적어도 열 개 이상의 나라에서 정치적 공작을 획책했다. 밝혀진 것만 그렇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나라들은 대부분 남미나 아시아 등의 개발도상국이었어요. 러시아는 체급이 너무 다르지 않아요?”

“유진은 우리가 러시아의 정치계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엘리자베스 부통령이 물었다. 명백한 의도를 밝혀 달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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