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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96화 (296/363)

296화 디지털 여론 관리국

만일 시대가 20세기 이전이었다면, 미래를 알고 있다는 엄청난 힘으로 황제가 되거나 혹은 세계를 정복하는 따위의 위업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왕이나 황제, 그리고 세계 정복 같은 것은 이미 너무나 때늦은 생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사실 왕이나 황제 따위가 되어 봤자 귀찮은 일만 잔뜩 늘어날 뿐이다.

일례로 조선 시대의 국왕들이 얼마나 혹사당하며 살았는지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야말로 자신의 자산과 건강과 능력을 갈아 넣고 후대에 가서는 욕만 먹는 어리석은 선택이 될 것이다.

왕이라든지 황제 같은 자리는 막대한 권한을 지닌 만큼 막대한 책임까지 져야 한다.

하나 생각을 바꿔 민주주의 사회에서 특정 정치인들을 후원하는 것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러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책임은 정치인이 지면 되는 것이고, 유진은 단지 그 시기에 적합한 인물을 백악관에 앉히는 것으로 원하는 권한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유진의 영향력은 단순히 미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힘이 닿는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미칠 수 있다.

거기다 러시아와 중국에도 충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국가 지도자로 앉힌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다방면으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일까? 미국의 대러시아 정책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랭리에 최근 새로운 부서가 하나 만들어졌다는군요. 이름은 디지털 여론 관리국으로 정해졌습니다.”

존 브래넌이 웃으며 소식을 전해 주었다. 사실 이미 존과는 해당 사안에 대해 적지 않게 논의를 해 온 뒤라, CIA 내부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계속 보고받고 있었다.

백악관 인사들과의 이야기가 있고 나서 생각보다도 훨씬 빠르게 일이 진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조금은 반가웠다.

“어느 정도의 규모인가요?”

“책임자는 부국장급이니, 신설 조직치고는 상당히 힘을 준 모양새입니다. 외부적으로는 해외 조직이나 단체의 국내 여론 조장을 방어하는 일을 맡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그 반대의 일도 하는 모양입니다.”

“상당히 늦은 감이 있네요.”

“그렇지요? 아무래도 몇 년 전에는 시작해야 했는데 말이지요. 어떤 면에서는 첩보보다 중요한 게 여론전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인지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정보기관에서 일해온 존 브래넌은 이런 활동이 조금 더 일찍 시작됐어야 중동에서 벌어진 자스민 혁명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에 훨씬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으리라는 평을 내렸다.

“사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세계 각국에 여론을 선도할 만한 조직을 만들고 유지하려면 매우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필요할 겁니다.”

결국은 돈의 문제였다. 지금도 CIA가 사용하는 예산은 천억 달러를 가뿐하게 넘어서서 미 연방정부의 교통부문 예산에 필적할 정도이다.

거기에 전 세계적인 새로운 조직망을 만들려면 다시 얼마나 큰 비용이 들어갈지 아직 확실치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미국의 경우는 상대해야 할 나라들이 워낙 많기에 방만한 예산 집행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아쉽군요. 꼭 필요하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는데.”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멋쩍게 웃고 있는 존 브래넌은 자신의 보스가 하는 말이 조금도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일 필요하다면 존이 이끄는 지금의 사설 정보기관에 CIA가 쓰는 만큼의 예산을 지급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사실 그 몇 배라도 쓸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찔할 정도의 배포이다. 한 개인이 정보를 모으기 위해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에 필적하는 사설 정보기관을 몇 개씩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부국장급을 책임자로 앉혔다면 제대로 하려는 모양이로군요?”

“그렇죠. 백악관에서 바로 지시가 내려왔으니 가볍게 다룰 수야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뒤를 이어 존은 좀 더 자세한 상황을 말해 주었다.

아주 다양한 통로를 통해, 다양한 주체로 이루어진 조직이 각국에서 여론전을 위해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건 이미 유진과 존이 함께 구상한 내용대로이다.

두 사람은 각국에서 여론전을 펼치는 조직이 단일 주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곳은 홍보 회사일 것이고, 또 어떤 곳은 정치 조직일 것이다.

또 다른 곳은 사회적 책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민 단체일 것이고, 또 다른 곳은 잃을 것이 없는 사회 밑바닥의 분노한 청년들일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주체들이 자신들이 누구에게 지원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주어진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게시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누군가를 비난하며, 또 누군가를 찬양할 것이다.

혹은 인터넷 신문사를 만들어 진실과 거짓이 적당히 섞여 있는 기사를 양산하기도 한다.

지금도 한국이나 어느 나라에서인가는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게시글과 댓글, 가짜 기사를 통해 만들어진 일련의 흐름은 어떤 식으로든 여론을 이끌게 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해당 국가의 선거를 결정지을 수는 없을 터이지만, 때로 선거란 아주 적은 표 차이로도 희비가 엇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생각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더군다나 그런 여론의 조장을 위해 각국의 심리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 여론 전문가 같은 다방면의 전문가들을 사용한다면 조금 더 효과적인 결과를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구상이 존 브래넌을 통해 CIA로 전달되었고, 그쪽에서는 더 많은 전문가로 디테일한 계획을 세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하튼 전체적으로 유진의 입장이 꽤 많이 반영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러시아부터 진행하고 있겠군요?”

“맞습니다. 러시아 내부 상황이 너무나 복잡하고, 어수선한 탓에 지금이라면 무언가 처음부터 실적을 올릴 수 있다며 즐거워하는 모양이더군요.”

정부 기관도 결국은 실적이 중요한 모양이다. 어쨌든 유진으로서야 자신이 원하는 최선의 결과만 얻어 내면 된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어떤가요?”

“최근 들어 정권 내부의 인사들을 하나둘 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러시아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라다.

현 정권 내부 인사들의 지지가 있어야 수십 년 동안 크렘린을 차지해 온 세력을 몰아낼 수 있다.

비록 현 집권 세력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형편없지만, 그들은 여전히 군권을 꽉 쥐고 있고 경찰과 정보부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는 것에 능숙하다.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만일 그게 선행되지 않는다면 끔찍한 내전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아주 훌륭한 정치인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나 중국처럼 혼란한 시대 상황 속에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해서는 가장 위대한 전략가이거나, 가장 뛰어난 사상가일 필요는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선 살아남는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권력을 향한 의지를 지닌 수많은 이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여 힘을 모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스탈린과 마오쩌둥 같은 이들이 다른 경쟁자를 누르고 정점에 설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세가 약할 때는 조용히 웅크려 있었고, 가능성이 보이는 순간에는 맹수처럼 상대의 목을 물어뜯었다.

유진은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또한 난세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단순히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매력뿐 아니라, 자신의 정적들에게도 그들이 원하는 먹이를 내어주고, 협상의 자리에 나서게 하는 유연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러시아 문제는 잘 부탁하지요.”

“알겠습니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러시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에 대한 지원은 애국자인 존 브래넌에게도 꽤 마음에 드는 일인 듯 보였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러시아 지도자들과 달리 미국과 원활한 협상이 가능한 대상이라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유진이 신경을 써야 할 정치 문제는 러시아만은 아니었다.

“대체 언제까지 한 사람에게 나라 전체가 끌려다녀야 한다는 말입니까?”

유진이 알지 못하는 시간, 알지 못하는 곳에서 그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을 만나자고 대체 몇 명이 뉴욕까지 날아간 건지 알고 계십니까? 플라자 호텔 로비에 가면 한국 사람들이 아주 줄을 서고 있어요. 다들 여기 여의도에서 보던 사람들이라고요. 대체 남의 나라로 국적까지 바꿔 버린 놈한테 뭐가 그리 아쉽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매달려야 합니까?”

격한 말도 여기저기서 튀어 나온다.

“솔직히 지금 상황은 영 마땅치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 강 회장이 돈 좀 있고, 인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지금 한국 경제가 어디 괜찮기는 합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사람의 인기라는 것도 전부 허상입니다. 허상!”

“거, 본인도 없는데 강 회장은 무슨. 강유진이 그자가 한국에 거액을 투자했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그게 어디 자선 사업이라도 한 거랍니까? 다 자기 돈 벌 생각으로 투자한 거 아니에요? 그래 놓고 자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이만큼 튼튼하다고 하면 양심도 없는 거 아닙니까?”

여의도에서 한참 떨어진 강남의 고급 술집에 모여 소리를 높이고 있는 이들은 모두 여당의 국회의원들이었다.

그들이 지금 이렇게까지 유진을 성토하고 있는 이유는 무척 단순하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유진이 여당의 손을 들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 두 달밖에 되지 않는 선거전이기에, 유진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은 양당 모두에게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뉴욕까지 찾아온 양당 인사를 그 누구도 만나 주지 않았다.

그것만이었다면 여당의 인사들이 지금처럼 분노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을 넘어 언론사들이 야당에 유리한 기사를 주로 내놓고 있다는 것에 의혹을 느낀 여당 의원들은 언론사 사주들을 압박해 기어이 그 뒤에 유진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유진이 아니라 SS파트너스와 그 투자를 받은 기업들이 지금의 국정 운영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 속에서 정부와 여당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가가 떨어지고 있다는 불만과 함께 광고를 줄이겠다는 협박이 곁들여졌다.

명백하게 지금의 사태에 대해 정부 여당에 대한 책임론을 강조하라는 의사표시였다.

“이제 와 우리를 팽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지금까지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와서 야당 편을 들면 우리는 어쩌라는 겁니까?”

사실 유진이 이들에게 약속한 것 따위는 없다.

단순히 그들이 유진의 이름을 팔아먹는 것을 묵인해 왔을 뿐이지만, 이들로서는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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