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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02화 (302/363)

302화 원인 제공자

“어? 시작한다.”

유성이 리모컨을 조종해 새로운 시사 프로그램을 틀었다.

“여기 방송국은 좀 방향성이 다르더라고. 어지간하면 형을 변호하는 패널이 많이 나와.”

“그래? 한 번 볼까?”

유성의 말처럼 그 경제 전문 채널의 시사 프로그램은 좀 더 유진에게 호의적이었다.

“작금의 사태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건 금융에 대해 ABC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통 오염된 사실을 인용해서 겁만 잔뜩 주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이 모르는 일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걸 이용해서 정치적으로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처럼 끔찍한 일은 없을 겁니다.”

특히 월스트리트에서 수년간 일하고 한국에 돌아와 제법 성공적인 자산 운용사를 창업했다는 한 패널은 굉장히 열심히 유진을 변명하고 있었다.

“SEC(미국 증권 거래위원회) 규정에 따라 미국에서 1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관리하는 투자기관은 Form-13이라는 보고서 양식을 통해 매 분기 보유 주식 현황을 보고해야 합니다. 이 보고서는 13F라는 웹사이트를 통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데, 이 13F를 통해 확인해 보면, 강 회장의 소유 기업들은 현재 모두 2조 5천억 달러 상당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8조 달러는 상당히 부풀려져 있다는 말이로군요?”

“하지만 이 보고서로는 파생 상품, 예를 들어 총수익스와프(TRS)처럼 다른 금융 기관을 통해 거래가 이루어지는 주식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런 파생 상품은 13F에 공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강유진 회장이 얼마나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총수익……스와프가 뭔가요?”

사회자가 주저하며 물어봤다. 시청자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무식을 감추지 않으려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강 회장의 경우로 설명해 드리면, 다른 금융 기관이 강 회장의 의뢰를 받아 특정 금융 상품, 즉 주식이나 채권 등을 구매하고 해당 상품의 수익이나 손실은 강 회장이 책임지는 대신 일정한 수수료를 받는 겁니다.”

“말하자면 다른 금융 기관이 강 회장을 대리해서 거래한다는 거군요.”

“네. 이를 통해 강 회장은 약정한 이자와 증거금만으로 몇 배에 달하는 금융 투자를 할 수 있는 거고요. 이 경우 매수의 주체는 다른 금융 기관이 되기 때문에 강 회장은 해당 주식에 대해 공시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여하튼 결국 강 회장의 금융 투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스스로 밝히기 전에는 알 도리가 없다는 말씀이네요?”

사회자가 금세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물론 그런 파생 상품을 통한 주식 보유 같은 것은 투자 회사의 아주 중요한 비밀이니 강유진 회장이 스스로 밝힐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하하.”

“아! 그렇게 중요한 비밀이 되나요?”

“아무래도 레버리지 비율이라든지, 전략 같은 여러 문제가 노출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결론적으로 한국인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불안감을 해소할 방법 따위는 없다는 의미네요.”

“그런데 그 불안감이라는 게 참 웃기는 일이에요.”

대화가 마무리되려는 찰나에 패널이 흥미로운 화두를 꺼내자 사회자가 반응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습니까?”

“강 회장이 활동하는 주 무대인 월스트리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시장입니다. 뉴욕과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주식은 백조 달러 대, 그리고 파생 상품을 생각하면 천조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금융 상품을 다루는 곳이지요. 그런 엄청난 시장에서 겨우 10조 달러의 금융 상품에 투자하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 전체가 겁을 먹는다는 게 참 그래요.”

“천조 달러요?”

사회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파생 상품 시장은 통화, 채권, 증권, 선물, 옵션 따위의 아주 다양한 금융 상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중 주식은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지요. 일례로 통화 시장의 경우 하루 거래량만 9조 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시장입니다.”

전문가가 말하고 있는 단위의 거대함에 놀란 사회자의 표정이 얼굴에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파생 상품이 생각처럼 무조건 위험하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원래 헤지펀드에서 헤지라는 단어 자체가 위험을 회피한다는 말에서 나온 겁니다. 금융 투자에 있어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간구하는 것은 현대 금융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아, 그런가요?”

“물론 어떤 사업이건 실패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이나 금융 회사 중에 지금까지 망한 곳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요.”

“전자 제품이나 자동차 생산을 하는 기업에 왜 그렇게 많은 돈이 투자되는 반도체 산업에 수십조, 수백조를 투자하는지, 혹은 새로운 자동차 개발을 하는지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그렇다면 세계적인 투자 시장에서 남들보다 훨씬 앞서가고 있는 강 회장에게 왜 그렇게 위험한 사업을 하느냐는 비난이나 요구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굉장히 능수능란한 패널이었다. 사회자는 자신도 모르게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예처럼 그런 투자 회사가 큰 손실을 보는 일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투자 회사가 망한 일보다 반도체 기업이 망한 게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자동차 회사라고 다를까요? 잠시라도 신기술 개발에 뒤처지면 망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죠.”

“그렇네요…….”

“강 회장은 그런 대단한 금융사들이 모인 뉴욕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공을 거둔 사람입니다.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가 역사상 최고의 투자자라고 하고 있지요. 더군다나 제가 알기로는 세계 각국의 국부 펀드라든지, 세계적인 부자들이 강 회장에게 자산을 맡기기 위해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사회자는 이미 패널의 말에 완전히 빠져든 듯 보였다.

“예.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부 펀드라든지, 아랍에미리트, 네덜란드 등 세계적인 국부 펀드에서 제발 우리 돈 좀 굴려 달라고 요청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정말 대단하네요.”

“그런데도 강 회장은 자신의 성공을 개인적인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에 엄청난 투자를 이어 와 지금까지 한국 경제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투자이니까 이익을 바라보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패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표정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강 회장에게 도박꾼의 누명을 씌우고, 그가 당장이라도 실패할 것처럼 몰아가고, 이제는 한국에서 멀어지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 같으면 참지 않아요. 뭐 하러 한국에 계속 투자를 합니까? 세상에 투자할 나라가 한국밖에 없어요?”

이어지는 패널의 신랄한 말에 사회자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 갔다.

그리고 다른 패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개중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리는 사람까지 나온다.

카메라는 그런 공포에 질린 얼굴에 포커스를 맞추고 확대해 얼굴에 땀이 맺히는 모습을 한동안 내보냈다.

“저 패널, 굉장히 말을 조리 있게 하네.”

함께 TV를 보고 있던 유성이 한마디 한다.

“그렇지. 능력은 몰라도 말은 참 잘하네.”

“근데 틀린 말도 아니잖아. 굳이 한국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요사이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유성 또한 상당히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한국에 투자할 이유야 잔뜩 있지.”

“응? 그래?”

“어. 난 여전히 한국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어. 내가 아무리 미국에서 잘나간다 해도, 여전히 동양인 출신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거든. 결국엔 날 뒷받침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단 말이야. 그리고 그럴 만한 건 늘 고국뿐이지.”

“흠…….”

유성은 아직 완전히는 아니어도 조금은 납득이 되었다.

“그러니까 형이 지금까지 한국에 해 온 투자들은 사실 그런 목적으로 이루어졌단 거네? 형을 지지해 줄 지지자들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한국인들의 미국 진출을 돕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고?”

“물론이지. 그리고 한국에의 투자가 그만큼 수익성이 좋은 것도 있고.”

“어…… 그런가? 하기는 수익률이 안 좋진 않지.”

“더군다나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 것도 있고 말이야. 솔직히 다른 어떤 나라에서 하는 투자보다 훨씬 덜 성가시단 말이지.”

유진이 작게 웃어 보였다.

“그렇구나.”

“여하튼 나로서는 한국 시장에 투자할 이유는 잔뜩 있고, 저 사람 말처럼 한국을 버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볼 수 있어.”

“그런데 왜 가만히 있어? 솔직히 형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니까 사태가 더 커지는 거 아냐?”

유성은 과거의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동생은 아니다. 유진이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거지.”

“어떤 때?”

“나한테 반발하는 사람들이 전부 튀어나올 때 말이야.”

“와! 방금 진짜 무서웠다. 어떻게 그렇게 웃어?”

“그랬어?”

유성이 소름 끼친다는 듯 장난스레 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 꼭 무슨 영화에 나오는 악당 같았어.”

“뭐. 비슷할지도 모르지.”

“어어?”

“악당은 아니지만, 사태가 악화되기를 기다린 것은 맞아. 그래야 불필요한 인간들을 솎아 낼 수 있으니까.”

“그런 거야?”

“어. 그런 거야.”

유진은 다시 조금 전과 비슷한 웃음을 짓고 말았다.

“나 참. 역시 다 속셈이 있었구나? 그런데 여전히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네.”

“뭔데?”

“대체 여당은 무슨 생각인 거지? 형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설혹 이긴다고 한들 의미가 있어? 지금 한국에 투자한 돈을 빼면 난리가 날 텐데?”

유성의 의문은 합리적이었지만, 정치라는 건 꼭 합리적으로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처음부터 나와 싸우자고 한 건 아닐 거야. 우선은 나와 협상을 하자는 간을 보려고 했던 거지. 난 지금 외국인 투자자잖아? 보통이라면 해당국 정권에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는 게 정상이지. 그쪽은 내가 협상에 응할 것을 예상하고 가볍게 잽을 날려본 거야. 그런데 내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니 조금씩 수위를 높이다가 상황이 이렇게까지 오게 된 거지.”

“그래서 선거에 승리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건 나도 알겠어.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거야. 형과 좋지 못한 관계가 이어지면 결국 국가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오는데.”

“그건 아무 상관 없는 일이야. 조직이든, 회사든, 국가든 어떤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이 반드시 부합하는 것은 아니잖아? 집단에 해가 된다고 해도, 내가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면 그쪽에 힘이 실리기 마련이지. 그것도 평범한 이익이 아니라 정권을 장악하는 거라면 더욱 그럴 테고. 그런 경우야 너무도 흔한 일이니까.”

“아니…… 그래. 말도 안 된다고 할 수는 없겠다. 솔직히 미국이라고 다르지는 않은 듯하거든.”

유성은 잠시 지난번 미 대통령을 떠올렸다.

사실 그런 지도자가 한둘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세계사를 통틀어 본다면 그렇지 않은 지도자보다 훨씬 더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국익이라는 것은 사실 굉장히 모호한 개념인 것 같아.”

“맞아. 국익이라는 건 없어. 국가에 속해 있는 누구의 이익인지가 중요하지. 국익을 말하는 사람은 대부분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해.”

“그렇다 쳐도 그렇게까지 어리석을 수 있을까? 경제가 흔들리면 정권도 위험해지지 않나?”

유성에게는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내가 만일 어떤 행동을 취해서 경제가 흔들리게 되면 오히려 더 잘 되었다고 생각할 사람들인걸.”

“잘 됐다고 할 거라고?”

“그래. 모든 책임을 나한테 미뤄 버리면 되잖아. 한국 경제가 흔들리는 건 전부 저놈 때문이라고 말이야.”

“허. 그게 그렇게…….”

이번에도 유진의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만일 여당이 정권을 잡고 나서 유진이 한국 경제에 불리한 행위를 한다면, 유진만 나쁜 놈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유진은 그러한 악명 따윈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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