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난파선에서 도망치는 방법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뭘 보니? 인터넷 뉴스?”
“어. 요즘은 한국 뉴스 보는 재미가 있어서.”
유성이 자신이 들고 있던 태블릿의 화면을 슬쩍 보여 주었다.
한국 최대의 포털 사이트이자, 실물 신문이 거의 몰락한 지금 사실상 한국 여론의 향방을 좌우하는 반쯤은 언론 기관에 가까운 곳이다.
물론 최근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매입한 덕분에 유진의 지배력이 아주 잘 미치는 곳이기도 했다.
“월가, 한국의 시장 공정성에 대해 의문 제기. 월가의 투자자들 한국에서 철수 움직임 보여…….”
유성이 포털 뉴스 페이지 상단에 올라온 기사 제목을 하나씩 읽어 주었다.
다양한 통로를 통해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하나같이 암울한 이야기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뉴욕에서 강유진 회장과 회담을 가져. 한국 철수 후 사우디아라비아에 투자 권유를 위한 것으로 보여. 소식이 빠르네. 지금 막 끝낸 거지? 겨우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뉴스에 뜨는 거잖아.”
“1층에 한국 기자들이 하루 종일 모여 있으니, 빠를 수밖에 없지.”
평소에도 플라자 호텔 로비에는 한국 기자 몇 명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사이 어지간한 언론사들은 빠짐없이 기자를 보내놓은 듯했다.
그러다 보니 호텔 로비라기보다는 차라리 대통령 기자실쯤 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여론이 무섭게 바뀌고 있네. 대체 진짜 여론이 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전히 미디어들이 여론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틀림없으니까.”
유진은 소위 국민 여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양 진영에 속한 30%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중간의 40%, 그중에서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20%가 실질적으로 여론을 움직인다.
“그런데 왕세자 전하는 뭐라고 하는데?”
“뭐, 생각했던 대로야.”
“사우디아라비아에 투자하라고?”
“정확히는 네온시티지.”
“흠……. 거긴 좀 위험하지 않아?”
“위험한 만큼 이익을 얻을 부분도 적지 않으니까.”
“그렇긴 한데……. 아, 뉴스 하나 또 떴다. 사우디 네온시티 건설에서 한국 건설 업체를 제외할 수도. 그런 이야기도 한 거야?”
“그럴 리가 없지. 엄연히 계약이 있는데.”
“나, 참. 어지간히 무책임하네. 온통 가짜 뉴스 투성이잖아.”
기사를 훑어본 유성이 툴툴거렸다.
“무슨 경제 기사를 월드컵 예측하듯 경우의 수를 따져 가며 쓰는 거야?”
“인터넷 기사들은 클릭 유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까. 어떻게든 자극적인 제목을 붙여 놓고, 내용을 거기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겠지.”
“그런가. 아, 기사 또 하나 떴다.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강 회장이 네온시티에 1,000억 달러 투자 유치 발표. 이쪽도 빠르네. 그런데 정말 1,000억 달러나 투자하기로 한 거야?”
“사실상 자기 돈이 절반이야. F0 펀드로 800억쯤 넣고, 거기에 200억 추가해서 네온시티에 투자하기로 한 거니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가장 커다란 업적이 될 네온시티의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비관적인 예상이 많았다.
그렇기에 만일 네온시티 개발에 문제가 생긴다면 왕세자의 입지 또한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왕세자는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프로젝트를 보호하기 위해 세계적인 투자자인 유진에게 도움을 요청해 온 것이다.
“역시 부자들은 다르네. 1,000억 달러를 너무 가볍게 움직이잖아?”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공식적인 재산은 수백억 달러 수준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국부 펀드가 2조 달러를 훌쩍 넘어선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인 애플의 시가 총액을 가볍게 추월하는, 명백한 세계 제2의 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건설 사업인 네온시티 사업을 통해 다시 한번 엄청난 비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건축업만큼 눈먼 돈이 횡횡하는 분야를 찾기도 어려울 것이다.
추정 사업비 1조 달러 중, 다시 왕세자와 왕실의 주머니로 들어갈 액수가 얼마나 될지는 솔직히 유진도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오! 기사가 잔뜩 뜬다. 언론사들마다 기사 하나씩 올리고 있어. 형이 한국을 포기하고 사우디로 갈아타는 게 확정이라는데?”
그리고 한국의 기자들은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몇 시간 동안 새로운 기사를 올리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도 기어이 하한가네. 사흘 내내 하한가인 모양이야.”
지난 이틀 동안 서킷 브레이커를 기록한 주가는 유진이 한국에 투자한 5,000억 달러를 빼서 사우디아라비아로 투자처를 옮길 거라는 소식이 퍼지면서 장이 시작하자마자 어느 종목이라 할 것 없이 하한가를 기록했다.
단순히 한 사람의 관심밖에 났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극명한 반응이었다.
“오늘 저녁에도 시위가 벌어질 모양인가 봐. 청와대 앞에서 백만 명이 모일 계획이래. 일이 점점 재미있게 돌아가네.”
사흘 연속으로 사람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었다. 광화문에 모인 시민들은 어째서인지 촛불을 들고 있었다.
물론 유진 한 사람을 지지한다는 의미에서 손에 든 촛불은 아닐 것이다. 그저 대한민국의 경제를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여당에 대한 항의 표시이다.
이건 중도층마저 돌아서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 선거 판세가 바뀌겠는걸. 야당도 아주 격렬하게 여당을 비난한다는데?”
“잘됐네.”
유진의 속마음은 딱 그랬다. 야당의 후보가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따로 신호를 주기는 했지만, 윤 후보는 당내의 유진에 대한 비판 기류를 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단 며칠이라도 유진을 비난하는 대열에 합류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선거판의 막바지까지 유진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이어졌다면 야당은 선거에 실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유진을 비난하는 데 가담하고, 여당을 유진과 한패로 몰아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여당과 유진의 유착을 강조하고, 여당이 유진에게 정치적 시해를 입어온 것을 강조한다면 비등하기만 한 여론이 돌아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윤 후보는 당내 여러 세력의 망종을 막는 것으로 조금은 불안했던 당내의 권위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꽤나 위험한 도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위험한 도박에 성공하면 테이블 위에 그득한 판돈은 자기 것이 된다.
“윤 후보에게 축전이라도 보내 줘야겠어.”
벌써부터 야당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은 유진만이 아니었다.
유성이 보고 있는 기사를 언뜻 훑어봐도 이제 닷새밖에 남지 않은 선거에서 여당이 승리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간신히 회복세에 오를 것 같던 경제가 하루아침에 박살이 나버린 셈이 되었다. 세상 그 어떤 정치인도 경제를 악화시키고 선거에 승리할 수는 없다.
“그럴 필요 있어? 축하를 받으러 찾아올 텐데.”
“찾아온다니?”
“기사에 났어. 선거가 끝나면 뉴욕까지 날아가서 강 회장을 설득하겠다고 말이야.”
“호오. 괜찮은 전략이네.”
유진의 마음을 돌릴 사람은 지금 시점에서 야당뿐이라는 사실을 최대의 무기로 삼고 있는 발언이다.
지난 열흘 동안 쉬지 않고 유진을 비난해 온 여당 후보가 이제 와서 유진을 설득하겠다는 말을 유권자들이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해 윤 후보의 입장을 훨씬 가벼웠다. 자기를 뽑아 주면 유진을 설득하겠다는 것이 선거 막바지의 최대의 공약이다.
“여당 내에서도 분열이 심한 모양이야.”
유성은 계속해서 올라오는 기사를 넘겨보기에 바빴다.
“선거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기에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던 여당 내 소장파 의원들이 작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현 후보와 여당 주류 인사들의 망발에 대해 비난하기 시작했다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어?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탈출할 사람들 아냐?”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사람들이 바로 정치인 아닌가?
이대로라면 정치권에 남아 있기 어렵다는 사실을 눈치챈 몇몇 의원들은 선거에서 끝까지 힘을 모으기보다는 자기라도 살아날 길을 찾기로 한 모양이다.
겨우 하룻밤 사이에 여당 의원 중 절반 가까이가 이런 대열에 합류하고 나섰다.
선거 대책 위원회에 포함되어 있던 의원 중에도 그렇게 난파선을 탈출하려는 인사들이 잔뜩 있었다.
모든 책임을 현 후보에게 떠넘기고 재빠르게 유진에 대한 찬양 기조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여당을 나오겠다는 선언까지 이어졌다.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선거가 이제 겨우 5일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여당 의원들 절반이 탈당 행렬에 가담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야당에 합류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는지, 이들은 새롭게 당을 꾸리려는 모양이었다.
소위 말하는 분당 사태가 선거의 막바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합니까?”
“이거 완전히 물 건너갔어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러다가는 선거 포기 선언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요.”
“하. 선거 포기 선언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러다가 당 자체가 소멸하게 생겼는데.”
“그래도 의원 선거는 앞으로 4년이나 남아 있지 않아요?”
연초에 국회 의원 선거가 있었기에, 현 국회 의원들은 임기가 충분히 남아 있었다. 4년이면 아주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긴 시간이다.
그런 면에서 조금은 안심하고 있는 의원들도 있었다.
대선과 의원 선거는 조금 다른 분야이다. 적어도 아직까지 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역구에서 탄탄한 지지를 받아 오던 이들이다.
분당 사태를 일으키며 당을 빠져나간 의원들은 대부분 경합이 치열한 지역구에서 선출된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이들은 대개 전통적으로 여당을 지지해 오는 지역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었기에, 조금은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완전히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4년 뒤에 강 회장이 우리한테 어떻게 나올 줄 알고요?”
“그렇기는 한데…….”
하지만 여전히 불안감은 남아 있었다.
도시보다는 농촌이 지역구인 덕분에 그나마 안정적이라고는 하지만, 4년 동안 한국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100명에 가까운 의원들이 앞다투어 탈당하며 나간 뒤에도 여당의 내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못했다.
“자, 승리가 이제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동안 모두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마지막까지 힘을 내 봅시다.”
야당의 분위기는 여당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다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여론 조사의 결과를 즐겁게 확인하고, 야당에 유리한 기사로 도배된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니까 경거망동하지 않기를 잘했어요.”
“맞습니다. 이제 선거 끝나고 방미단을 꾸려야겠어요.”
야당 내의 분위기는 벌써 선거가 끝났다는 느낌이 강했다.
선거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대통령 당선자의 미국행에 합류할 사람들을 정하는 것에 더욱 큰 관심이 모이는 것이 그 증거였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대통령 당선자가 미국으로 건너간다는 것부터가 상식을 초월한 일이었지만,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서로 눈치를 보고 어떻게 한자리라도 얻어 낼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