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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05화 (305/363)

305화 꼭두각시

언제나 그랬듯이 아주 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또 더 많은 이슈가 터져 나오고, 수많은 뉴스를 만들어 낸 선거가 드디어 끝이 났다.

대통령 선거로서는 이례적으로 다음날 자정이 조금 지난 이른 시간에 당선자가 결정되었다.

국민들은 압도적인 표 차로 야당의 후보를 차기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물론 후보 자신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미국의 대표적인 자산가가 한국에서 5,000억 달러를 빼가지 않기를 바라는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여러분의 덕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선거 방송을 지켜보던 새로운 당선자는 선거 본부의 사람들과 함께 방송에 내보낼 쓸 만한 장면을 찍고 나서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결국엔 이렇게 됐군.”

깊게 담배를 빨아들이곤 다시 천천히 내뱉은 그가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대통령 당선인 얼굴이 왜 그래요?”

대학병원의 임상 교수에서 이제는 영부인이 된 세련된 여자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어쩐지 진짜 대통령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진짜 대통령이 아니긴요. 누가 당신한테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거예요?”

“그건 아니지만…… 그저 기분이 그렇다는 거지.”

“어찌 되었건 국민들은 당신을 선택했어요. 그러니까 약속한 대로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야죠. 축하해요.”

사실 그녀도 남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십수 년 동안 함께해 온 아내만큼 남편의 속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대통령 당선인이 복잡한 심경이라는 것은 이미 한참 전부터 파악하고 있던 참이다.

“솔직히 무서워.”

“무섭다고요?”

그녀는 남편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어. 예전에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권력 알고 있지?”

“검찰이나 언론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래. 사실 지금도 그리 다르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10년 전만 해도 이 나라를 제일 공화국이라고 불렀잖아? 그전에는 다산이 비슷한 위치에 있었고.”

“군사 정권이 물러선 이후에는 재계가 그런 위치에 있었지요.”

“지금 강유진 그 사람이 가진 힘은 한창 잘 나갈 때의 제일이나 다산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 같아. 단순히 검찰, 국회, 언론 같은 권력기관뿐 아니라 국민들까지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잖아?”

권력은 철저하게 두려움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이번 사태가 입증했다.

얼마 전까지 한국인들은 유진을 사랑했었지만, 이번 일로 그들은 사랑보단 두려움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걸 부정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는 게 정말 무서운 일이지.”

“사실 나도 무섭기는 하네요. 한 사람이 나라에 끼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면 언젠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겠지요. 더군다나 한국은 수출이라든지, 여러모로 국제 관계가 중요한 나라인데 경제 전반을 그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데다가, 이제 정치권도 사실상 그 사람 비위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부인의 말에 묵묵히 긍정하던 당선인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흘 전에 그 일 말이야.”

“사흘 전이면…… 한미경제신문에서 나온 거 말이지요?”

선거를 사흘 앞두고 한미경제신문의 기자가 극비 입수했다는 여당 후보의 비리에 관한 기사는 그렇지 않아도 바닥까지 내려간 여당 후보의 지지율을 더욱 깎아 버렸다.

이미 10년 전의 일이라지만, 여당 중진일 무렵 당시 대기업이던 대양 그룹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증거가 보도되면서 지지율은 하룻밤 사이 5%나 떨어졌다.

더군다나 한눈에 보기에도 5만 원권 지폐가 가득 들어 있을 것 같은 상자를 받으며 웃고 있는 후보의 얼굴이 나온 사진과 함께였으니, 어지간하면 부정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미 그 시점에서 여당 후보의 승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보아도 틀리지 않았겠지만, 한미경제신문의 폭로 기사가 어떤 방점을 찍은 것은 확실했다.

“왜 하필 그 시점에 그런 폭로 기사가 터졌던 걸까?”

“그거야 당연히 선거 막바지에 터지는 게 가장 크게 이슈가 되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아니. 그렇지 않아. 보통이라면 적어도 몇 달은 시간을 두고서야 터트리지. 그래야 선거 기간 내내 그걸로 시끄러워지니까. 단순히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시점을 선택했을 리 없어.”

“그럼 그걸 그때 입수했나 보죠.”

당선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기자야 그걸 그때 입수했겠지. 나는 그걸 준 사람을 말하는 거야. 왜 그 시점에 그걸 넘긴 거지?”

“음, 그러네요. 당신 말대로라면 그쪽 후보가 결정되고 나서 터트리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요. 대체 이유가 뭘까요?”

남편의 말에 새로운 영부인이 수긍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전부 알고 있었다면 어떨까.”

“전부를요?”

“어. 선거가 어떻게 흘러갈지 충분히 예상했다면, 굳이 그걸 손에 쥐고 터트릴 필요도 없었겠지.”

“하지만 터트렸잖아요?”

“그게 문제야. 굳이 그게 없었어도, 이미 그 시점에서 선거는 끝난 거였으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진 당선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확실하게 하고 싶었나 보죠? 아니지. 그랬다면 훨씬 더 일찍 터트렸어야겠네요.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요.”

“그 자료, 알아보니 대양 그룹 회장이 숨겨 두었던 파일들이 있는 모양이야. 검찰에서 압수하려 했는데 사라져 버렸다더군.”

“혹시?”

“누가 그 자료들을 가져갔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정치권 인물 중에 대양과 관련된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말이야.”

의미심장한 당선인의 말에 부인이 깨달은 듯 대답했다.

“그 사람들을 협박하려는 건가요?”

“아마도. 그리고 나까지도.”

“당신을요? 당신도 뭐 받은 거 있어요?”

“아니. 내가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 미쳤다고 독약을 마셔?”

“하긴 그렇지요. 그런데 무슨 협박이요?”

당선인이 표정을 굳히며 낮은 음성을 뱉는다.

“정치권 전부에 대한 경고인 거지. 누구라도 끝장낼 수 있다는.”

“그 대양 그룹 회장의 자료를 갖고 있다는 누군가가 말이지요?”

“어.”

“그게 누구인데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치권에서는 강 회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아!”

아내의 얼굴에 아까와는 다른 두려움이 서렸다.

“당신, 혹시라도 그 사람한테 뭔가 약점 잡힌 것은 없지요?”

“나야 없지.”

당선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아내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안심이 되었다.

남편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녀가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는 조금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부부라 해도 때론 남들보다 훨씬 상대를 모를 때도 있는 법이다.

“이번 일로 확실해졌어. 정치권에 몸담은 누구도 감히 그 사람에게 반항할 수 없다는 걸 말이야.”

“마치…… 꼭두각시 같네요.”

새 영부인은 이제 새 대통령의 근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앞으로 8년은 당신이 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하니까. 그동안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억지로라도 그렇게 기운을 북돋아 주려 노력해 본다.

“그래. 아주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당선인은 그 아주 많은 일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누군가에 예속된 일일 것이라는 예감을 하고 있었다.

“당선인님! 이제 연설하실 시간입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상기된 얼굴의 보좌관이 들어서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바로 나가지.”

대통령 당선인은 어느새인가 얼굴에 서린 근심을 털어 내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성큼 발을 옮겼다.

* * *

“그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선거가 끝난 다음 날, SS파트너스를 책임지고 있는 김환은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정치계 인사를 만나 최근 한 달 동안의 활약에 대해 치하하고 있었다.

“수고랄 게 뭐 있습니까. 그냥 할 일을 한 거지요. 그런데 여기 음식이 참 괜찮네요.”

“한국에서 둘뿐인 미슐랭 3성 식당이라더군요. 우리 비서가 식당 하나는 정말 잘 고르지요.”

“센스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도 다 복이에요.”

“그렇지요. 의원님도 보좌관들이 제법 좋은 사람들인 모양이더군요.”

김환은 친밀감을 강조하기 위해 선배라는 호칭을, 그리고 상대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의원이라는 호칭을 적절하게 번갈아 쓰고 있었다.

의원도 자기보다 몇 년 후배인 김환에게 결코 말을 놓는 일 없이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 대한민국 땅에서 김환에게 편하게 말을 놓을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고, 장 의원은 그런 사람 중 하나가 아니다.

“그렇죠. 무척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이번 법안도 그 친구들이 만들었지요. 그런데 제일 마지막 것만 통과시키면 된다는 거지요?”

사실 조금 어렵기는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편하게 후배로 대하던 사람을, 지금은 거의 상사나 다름없이 대해야 했다.

“예. 야당에서…… 아니지. 이젠 여당이네요. 그쪽에서도 그 법안은 찬성할 겁니다.”

“흐음. 솔직히 다른 법안은 몰라도, 언론에 대한 법안만큼은 나도 만족스럽기는 해요. 사실 이 나라의 언론들이 얼마나 엉망이에요? 기사인지 광고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걸 마치 정론인 양 올리고 말입니다.”

“그렇죠? 언론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적어도 광고와 기사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법안은 몰라도 이 법안만은 꼭 통과시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이 가만 있지 않을 텐데요? 자기 목에 그런 줄을 매고,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데 가만히 있을 놈들입니까?”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 언론사들도 한창 정신이 없을 거니까요.”

“그래요. 우리 후배님께서 잘 알아서 하시겠지요. 하하!”

가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렇게 후배라는 말을 섞어 주는 게 선을 넘지 않으면서 친밀감을 표시하는 최대한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째서 언론에 그런 재갈을 물리려는 건가요? 어차피 지금 이 나라 언론들은 전부 강 회장님 수족들 아닌가요?”

지시를 받아 법안을 상정한 장 의원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꼭 우리 회장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아니었나요?”

“물론 말씀은 안 하셨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행보가 전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은 아닐 거라고요.”

“개인적이지 않다. 으음…….”

예상외의 말을 들은 장 의원이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크게 보면 그게 언론의 자정 작용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고요.”

“그렇지요. 모든 기사에, 언론사가 받은 광고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한다면 지금처럼 엉망으로 쓸 수야 없겠지요.”

“그리고 작게 보면 장 의원님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절 위해서라고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선거의 패배로 여당은 두 개로 갈라졌고, 남아 있는 절반마저도 휘청이고 있다. 난파선 정도가 아니라 의원들이 각자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지금 여당 내에서 국민들의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 누가 달리 있겠습니까?”

“그게 저란 말씀인가요?”

“예. 물론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요. 우리 회장님을 누구보다 열심히 비난하고 나선 분이 의원님 아니신가요? 하하!”

“……솔직히 놀랍긴 하군요.”

장 의원이 속내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사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놀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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