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06화 (306/363)

306화 가스라이팅

“그런 오더가 내려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이번 선거 기간 동안 여당 내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유진에 대한 공세를 주장해 왔고, 유진에 불리한 법안을 몇 개나 상정시킨 당사자인 장 의원은 오더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욕보셨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요 한두 주일 동안 정말…… 태어나서 이렇게나 많은 욕을 먹어 보기는 처음이에요.”

“그래도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요. 생각해 보면 덕분에 내 인지도가 상당히 높아지긴 했지요.”

아직 젊은 정치인에 속하는 장 의원은 이제 반으로 줄어 버린 옛 여당에서도 차기 당 대표를 노릴 만한 사람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이번 사태로 분당이 되면서 당을 나가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유진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다.

그리고 한국 내에서 유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도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번 선거에서 적어도 30% 정도의 사람들은 유진에 대해 좋지 않게 여겨서든 혹은 다른 이유에서든 여당에 표를 주었고, 그들은 장 의원을 제법 쓸 만한 정치인으로 보고 있다.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강 회장님께서 정말 큰 그림을 그리시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확실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장 의원님께서 당을 장악하시는 데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이야. 이 장유철이 후배님 덕을 아주 톡톡히 보겠어요.”

그렇게 한동안 음습한 정치적 거래가 이어졌다.

이번 선거를 기점으로 한국의 정치판은 친 유진과 반 유진으로 명확하게 편이 갈려 버렸고, 김환은 반 유진계의 수장으로 자신의 선배인 장 의원을 내정해 놓았다.

장 의원이 이제 야당으로 전락한 당을 수습하고 세를 모은다면 여당과 야당을 양손으로 조종하겠다는 야욕을 감추지 않는 것이다.

유진의 꼭두각시를 자청하는 장 의원도 그에 대해서 조금의 불편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최소한 현시점에서의 대세는 유진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영악한 사람이었다.

당장 몇 년 뒤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만일 유진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사업에 실패하거나 혹은 다른 이유에서 유진에 대한 반발이 심해진다면 정치권의 헤게모니는 지금의 야당에게 넘어올 것이고, 장 의원이 그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이 시점의 장 의원은 그때가 되면 자신이 더는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날 새로운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식이 곧바로 진행됐다.

전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났기에, 당선자가 공백 없이 즉시 대통령 직위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대로 대통령은 미국행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불안감을 덜어 주기 위해선 유진과의 만남이 가장 시급한 국정과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거가 끝나고도 한동안 유진은 새로운 대통령의 방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어떤 자리에서도 한국에 관한 언급도 일절 하지 않았다.

대략 과거 고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논평은 적절치 않다는 홍보 담당자의 정해진 답변이 전부였다.

“선거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형에 관한 기사뿐이네.”

선거를 계기로 유성은 다시 조국을 향한 관심이 늘어난 모양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한국 포탈을 들여다보며 기사를 정독하고 있었다.

“당장 대통령이 유진을 찾아가 그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사설이 떴네. 나 참. 그게 대통령이 사과까지 할 일이야? 사실 대통령은 아무 상관도 없잖아? 그동안 딱히 형을 비판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기는 하지만 어쨌든 대통령은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사과는 너무 나간 거 아니야?”

“그렇지. 사과라니, 웃기는 일이지. 근데 그게 어떤 신문사야?”

“제호일보. 응? 여기 제일 열심히 형 욕하던 덴데?”

유성은 이제 어떤 언론이 유진에 어떠한 논조를 지니고 있었는지도 꿰고 있었다.

“그래? 벌써 겁이 나는 모양이네.”

“겁날 만도 하지. 근데 욕은 저들이 해놓고 왜 대통령한테 지랄인데?”

유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언론이란 게 그렇잖아. 부추기고 비난하는 것은 잘하지만 책임은 절대 지지 않는 곳이니까.”

“어이가 없네. 얘네들은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열심히 욕했던 거야?”

“제호일보면 아마 명성 그룹이랑 관련된 곳일걸?”

“아! 명성…….”

유진이 한국의 대기업들에 엄청난 투자를 이어 오고는 있지만, 그게 모든 대기업에 공평하게 나누어지지는 않았다.

4대 그룹으로 불리던 대표적인 그룹 중 선두의 제일과 다산 그룹에 투자 대부분이 돌아갔고, 대양 그룹은 공중분해 되어 버렸으며, 남은 하나인 명성에는 아주 약간의 투자가 돌아갔을 뿐이다.

그렇게 10대 대기업 집단 중 제일과 다산, 그 외 한두 곳에만 그런 투자의 혜택이 돌아갔고 나머지는 그저 명목적인 투자만이 이어져 왔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난 지금에 와서는 명성 그룹은 이제 더는 예전처럼 제일, 다산에 버금가는 대기업이라는 주장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제일과 다산 두 곳이 예전 10대 그룹의 성세를 전부 차지한 것과 비슷한 모양새고, 그 뒤를 잇는다는 명성과 성진 그룹 등은 격차가 너무 커서 비슷한 반열이라 볼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과적으로 대기업 집단 중에 유진에 대해 이를 갈고 있는 곳들이 아주 넘쳐 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사 중에는 그런 대기업과 지분 관계로 얽혀 있는 곳들이 많았기에, 때로는 유진이 내려 주는 광고비보다, 지분을 보유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너무한 거 아냐?”

유성이 웃으며 물었다. 명성 그룹은 예전 유진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몸을 담고 있던 기업 집단이다.

원래였다면 서로 좋은 관계로 남을 수 있었겠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은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정이랄 게 있어? 사업이라는 게 둘도 없던 친분이 있다가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원수가 되기도 하는 건데.”

제일 그룹, 다산 그룹, 명성 그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그랬다.

서로가 사돈 관계로 얽혀 있으면서도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서로를 물고 뜯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성이 그동안 형한테 이를 갈아 오다가, 이 기회에 한번 물을 먹이고자 한 거야?”

“그런 셈이지. 이대로라면 어디까지 추락할지 알 수 없으니까.”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이 유진과 좋은 관계를 이어 가며 국내외 산업에서 적지 않은 이득을 보고 있는 반면, 명성은 내수 시장에서도 형편없는 성과를 보이며 점점 추락하는 실정이다.

명성뿐 아니라 유진의 투자에 덕을 보지 못한, 아니 오히려 피해를 본 기업들은 적지 않았다.

그러니 여당이 시작한 유진에 대한 공격이 명성을 비롯한 몇몇 그룹에게 있어서는 기회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기업이 유진을 공격하고 나설 수는 없었으니, 휘하의 언론을 이용해 공세에 나선 것이다.

말하자면 그동안의 분을 한꺼번에 풀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반란은 처절한 실패로 끝나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모양이 빠지지 않게 항복하는 일뿐이었다.

“언론사로서는 이제 어떤 방식으로든 수습해야 할 필요가 있지. 만일 이번 대선 결과가 달랐다면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어떻게든 나와의 관계를 재고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자기들이 잘못했다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정치권을 독촉하는 거지. 국민 화합 차원에서 빨리 뉴욕으로 건너가 수습 좀 하라고 말이야.”

“진짜 뻔뻔스럽네.”

결국은 일을 키운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없이 정치권을 향해 오히려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형은 모른 척 넘어가 줄 생각이야?”

“글쎄?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유진은 자신이 벌여 놓은 한바탕 소동극의 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어떤 결말이 날지 정해 두었다. 적어도 몇 곳은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사람들 분위기가 너무 안 좋네. 다들 형 눈치를 보고 있는 거 같아.”

기사와는 별개로 각 게시판이나 SNS에는 유진의 기분을 살펴야 한다는 사람들의 의견으로 가득했다. 모두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두 달 사이의 선거 과정에서 경제 지표가 아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나마 대선이 끝나며 주식 시장이 회복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한국 사람들이 눈치를 보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하긴 그랬지. 예전부터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대기업에 불리한 정책은 절대 꺼내지도 못하게 했잖아.”

“어떤 의미로 보면 한국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해 왔다 볼 수도 있어.”

“가스라이팅이라……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언론에서 어지간히 겁을 줬었나.”

“그래. 그랬었지. 대기업에 불리한 법안이나 판결은 나라에 무조건 해롭다는 식으로.”

“하기는 그러네.”

유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대기업뿐이야? 미국에 대해서도 그렇고, 주변 국가들에 대해서도 그랬었지. 사실 미국에서는 딱히 한국 내부의 상황에 그리 관심도 없는데, 한국인들은 혹시라도 자기들이 미국 심기를 거스를까 전전긍긍하고는 했었잖아?”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워낙 지정학적 상황이 한국에 불리하니까. 더군다나 내전의 트라우마도 남아 있고.”

“한국 전쟁이 끝난 지 벌써 70년도 넘었는데 트라우마라니…… 전쟁을 겪은 사람 중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당시 어린아이였던 노인들뿐이잖아.”

“그렇다고 해도 군부정권이 그걸 계속 이용해 온 시간이 다시 수십 년이잖아. 그리고 그 상대가 아직 서울에서 겨우 수십 킬로미터 밖에 있으니까.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되려면 그 상황부터 해결해야 할 거야.”

유성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젔는다.

“어렵네.”

“세상에 어렵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어.”

“하긴. 그럼 형의 의도는 다시 한번 한국 사람들을 가스라이팅 하려는 거였던 거야?”

“가스라이팅과는 다르지. 아주 많이.”

유진은 그저 현실을 좀 더 명확하게 보여 주었을 뿐이다.

지금 시점에선 유진이야말로 한국 경제에 있어, 그리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있어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을.

“사실 내가 한국에서 철수한다고 해서 당장 한국 경제가 무너지거나, 엄청난 고난을 겪지는 않을 거야. IMF도 이겨 낸 나라인데.”

“어? 그런가?”

“한 나라의 경제가 어느 정도 규모를 형성하고 난 뒤에 무너져내리는 건 사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거든.”

“그런 경우도 꽤 있지 않은가? 그 베네수엘라라든지.”

“그런 나라들은 산업 구조가 충분히 고도화되어 있지 않았어.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지. 서구의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할 정도는 아니니까.”

인터넷 기사를 보고 가볍게 시작했던 형제의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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