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09화 (309/363)

309화 앉아 있는 자리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에 방문한 것은 그해 겨울이 시작되고 나서의 일이다.

마침 미국도 대선이 끝이나 축하 인사 겸 방문하는 셈이 되어 버렸다.

유진은 뉴욕에서 대통령의 방문을 기다리지 않고, 워싱턴으로 날아가 상대의 체면을 조금은 살려 주기로 했다.

만일 유진이 뉴욕에서 대통령을 맞이했다면 그렇지 않아도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이들이 꼬투리를 잡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시 뵙는군요.”

미국 정부가 백악관을 찾는 외국 정상에게 제공하는 공식 숙소인 대통령 영빈관 ‘블레어하우스’에서 만난 새 대통령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피로로 가득해 보였다.

“상당히 강행군이었던 모양이시군요.”

“덕분에 워싱턴 방문이 무척 성공적이었습니다. 첫 방문이 국빈 방문인 것은 제가 한국 대통령 중 두 번째라더군요.”

백악관을 방문하는 외국 정상의 방문 형식은 의전의 차이에 따라 국빈 방문, 공식 방문(Official Visitit), 공식 실무 방문, 실무 방문(Working Visit) 등으로 나뉜다.

당연히 국빈 방문이 가장 격조 높은 형식으로, 그간 한국 대통령들의 첫 방문은 대개 공식 방문이나 공식 실무 방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단지 이름이 다른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고 봐야 한다.

오직 국빈 방문의 경우에만 21발의 예포를 쏘는 백악관 환영식과 저명한 인사들을 초대해 열리는 백악관 환영 만찬, 미 의회의 상·하원 합동 연설까지 제공된다.

“상하원 합동 연설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연설이 끝나고 의원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 동안 박수를 쳐 주더군요. 덕분에 아주 좋은 이미지를 가져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두 번이나 연속으로 덕분이라는 인사를 건넸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백악관이 국빈 방문을 받아들인 것도, 그리고 상하 양원이 그런 환대를 보인 것도 모두 유진이라는 뒷배가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에는 한 해에도 수많은 세계 정상들이 방문하고, 당연히 모두들 백악관에서 최선의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

미국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백악관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는지가 자국에서의 정치적 영향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그건 단순히 한중일을 포함한 체면을 중시하는 아시아 국가들만의 일은 아니다. 유럽의 정상들도 미국에서 최대한의 대접을 받기 원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백악관 측에서는 방문하는 모든 정상에게 국빈 방문의 기회를 제공하고, 상하원 합동 연설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러기 어렵다는 쪽이 훨씬 더 부합할 것이다.

국빈 방문의 경비를 미국이 부담해야 하고, 또 정치적 이해가 엇갈리는 상하 양원의 허락도 받아야 하기에 정말 중요한 손님이 아니고서야 실무 방문 수준으로 갈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번 한국 대통령의 방문에서는 이례적으로 첫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국빈 방문을 승인했으며, 백악관 앞마당을 한국에 관련된 장식으로 가득 채우고 500여 명에 달하는 저명 인사들을 초대해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만찬의 자리에는 한국풍의 음식이 제공되었고, 한국에서 공수한 전통주가 손님들의 잔을 채웠다.

백악관이 이번 만남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명백하게 세상에 알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거기다 만찬이 끝나고 백악관의 집무실에서 열린 회담은 무려 두 시간 반이나 이어졌다.

국빈 방문이 아닌 공식 방문 수준이었다면 겨우 한 시간짜리 만남으로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우스운 일이지만, 한국처럼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워싱턴 방문에서 미국 대통령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 귀국 후 정치적인 공세에 시달리거나, 혹은 반대로 성과를 마음껏 자랑할 수 있다.

다행히 이번 대통령은 첫 방문에서부터 백악관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으니, 귀국한 뒤 푸대접을 받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될 것이다.

심지어는 다음날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에서도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들이 오랜 우의를 확인했다며 정성스러운 기사를 실어 주었다.

한 세기에 가깝도록 미국과 한국 양측 모두에 있어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파트너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내용의 논평은 대통령의 귀국 후에 더할 나위 없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성과가 유진의 덕분이라는 사실을 대통령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사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부터가 유진의 선택 덕분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실감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 동안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서 그가 해야 했던 일의 절반 정도는 유진과 관련된 일들이었다.

국민들에게 유진과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유진의 한국 투자가 절대 줄어들지 않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말하지 않는 날이 오히려 드물 정도였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힘들게 만나게 된 자리에서도 대통령은 유진의 앞에서 저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 후보에 나설 때만 해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만 한다면 반드시 이런 비정상적인 관계를 개선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던 그였지만, 선거 과정에서 그리고 당선되고 난 이후에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유진의 그늘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사흘 동안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너무 유익한 시간이었고, 한미 양국의 경제 협력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행이로군요.”

“그렇죠. 그런데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워싱턴에 점점 한국인이 늘어나는 것 같더군요.”

“워싱턴에 거주하는 한인의 숫자가 괄목할 정도인 것은 맞습니다. 미국 내 한인 인구 수로 따지면 LA와 뉴욕에 이어 3위인데, 또 도시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보면 무려 16%나 되니까요. 이젠 워싱턴DC 내에서 한국인의 영향력이 결코 무시 못 할 정도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대답하는 유진 그 자신의 의도가 어느 정도 반영된 일이었지만, 유진은 그저 덤덤하게 대답했다.

“상당하군요. 그런데 그보다 놀라운 건 단순히 숫자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영향력이 늘었다고 해야 하나요? 첫날 백악관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이 다들 유력 인사들이라고 하던데, 그중에 한국인이 꽤 보이더군요. 그리고 어제 워싱턴 한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적어도 동양인 중에서는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가장 힘을 쓴다더군요.”

“그럴 겁니다. 사실 워싱턴뿐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그런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강 회장님 덕분이죠.”

대통령이 말을 꺼낸 것은 다시 한번 치하의 말을 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굳이 제 덕이라고 할 것까지야.”

“아니죠. 사실 예전 80년대 이전까지야 한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한국도 살 만해진 90년대 이후로는 많이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강 회장님이 바람을 일으킨 뒤로 한국에서 인력 유출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까지 참 많이들 넘어오고 있어요. 하하.”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하다. 유진에 대해 반감을 지닌 한국인들은 이점을 주요한 비난 요소로 삼기도 한다.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 활용할 만한 건 결국 인재들밖에 없는데, 유진 때문에 그 귀한 인재들이 미국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웃기는 것은 그런 사람치고, 지금껏 한국에서 과연 그 인재들을 제대로 대접해 주고 있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재들을 귀하게 대우해 주었다면, 어째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과학 기술 분야가 아니라 오로지 의대로만 몰리고 있었을까?

미국뿐 아니라 일반적인 선진국의 인재들이 좀 더 창조적인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데 비해, 한국의 최고 두뇌들이 의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더 많은 돈을 원하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순히 기업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의사나 변호사 같은 특정 직업 외에는 제대로 된 대접을 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제 생각에는 이게 올바른 방향 같습니다.”

이어지는 대통령의 말을 들어 보니, 막상 그는 한국의 인재들이 미국으로 넘어오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 모양이다.

“한국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미국과의 활발한 인력 교환이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으로 진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꼭 영구적인 인재 유출만 가져오는 것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한때는 미국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한국에 들어가 일을 해 보고, 다시 미국이든 다른 나라든 편하게 이동하며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유럽과 미국의 관계가 그렇듯이 말이지요?”

대통령이 웃으며 말했다.

“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그런 부분이 참 부럽더군요. 미국인들과 유럽인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하더군요.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 일본 등지의 인재들에 비해 유럽 출신이 갖는 어떤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점 때문에 유럽 출신의 기업가들이 자국에서만 의미 있는 지역 한정적인 기업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지요.”

한국의 신생 기업 중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은 보기 드물다.

하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창업한 기업은 자국뿐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카를 어우르는 거대한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글로벌한 기업으로 성장하기 쉬웠다.

거기에는 유럽이라는 통합된 거대한 시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미국과의 인재 교류가 활발한 것도 큰 몫을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한국 사람들도 그런 이점을 갖게 된 셈이로군요. 대단하십니다. 솔직히 강 회장님께서 한 사람으로 하실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대통령이 되면서 과거보다 훨씬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 걸까? 유진은 그가 전보다 한 걸음 나아갔음을 인정했다.

“한국의 인재들이 단지 미국뿐 아니라 유럽, 아시아 등지를 편하게 옮겨 다니며 국제적인 시야를 갖고, 더 큰 꿈을 꿀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에 국가적인 지원도 함께라면 더욱 좋겠지요.”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깊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민간인이신 강 회장님께서 그렇게 노력하고 계시는데, 정부 차원에서도 합당한 노력이 있어야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한국 대통령의 표정은 첫 만남 때 보다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확실히 앉은 자리가 달라지면 보는 시야도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어쩌다가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앉게 되어 무거운 짐을 떠맡고 보니 생각이 많이 바뀌더군요.”

“아무래도 그런 면이 있겠지요.”

“예. 그전에는 그저 뚜렷하지 않은 이상만 좇고 있었지만, 대통령의 자리라는 것은 이상을 실현하는 자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먼 미래를 그리기에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더군요.”

물꼬가 트이고 이야기가 이어지며 화제가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