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화 태권소년소녀들
“저는 단순히 정권을 잡거나 개인적인 업적을 남기기 위해 정치권에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물론이지요.”
“그저 수사적인 말이 아니라, 정말로 커다란 꿈이 있었습니다. 제 손으로 대한민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멋진 꿈을 가지고 계시군요.”
“물론 그 위대하다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민들 개개인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충분히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하겠지요.”
대통령은 그가 꿈꾸어 오던 이상향을 차근차근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가가 부유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이 충분히 부유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결국은 제대로 된 분배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그렇지요. 나라가 부자가 되는 것과 그 구성원이 부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니까요.”
“맞습니다. 전혀 다른 문제이지요.”
아시아의 대표적인 부자 나라인 싱가포르의 경우만 보아도 국가의 부와 국민의 삶에 적지 않은 괴리가 쉽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제가 원하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의 경제가 성장하고, 그 부를 국민들에게 돌아가게 만드는 두 가지 목표를 한꺼번에 달성해야 하는 거지요. 물론 쉽지만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두 목표를 둘 다 잡은 나라가 오히려 드물 겁니다.”
당장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땅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세계 최강대국이며 최고의 부자 국가이지만, 대도시에는 노숙자들이 가득하고 빈민들의 자식이 중산층까지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어쩌면 저의 치기 어린 이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겨우 한 달 만에 이상을 추구하는 것에 회의를 느낀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는 그의 눈빛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아마도 그 목표를 이루는 것은 보통의 위인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만으로도 보통 이상의 위대한 목표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유진은 솔직하게 말했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와 그 숫자만큼의 지도자들이 있지만, 그들 중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이나 야망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는 지도자가 얼마나 될지는 회의적이다.
아마도 지금 시점에서 가장 많은 각국의 지도자들을 만나 보았고, 또 그들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유진이야말로 그 대단한 지도자들의 실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상이나 목표가 있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루기 위해 존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한국에는 강 회장님이 계시더군요.”
비로소 유진은 대통령이 어떤 말을 하기 위해 그런 말들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어제 이곳 한인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상당히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년 전에 한국에서 건너온 태권도 사범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미국에는 한국에서 자신처럼 건너온 태권도 사범이 수천 명에 달한다더군요. 겨우 몇 년 사이에 말입니다.”
“최근 미국 내에서 태권도의 열풍이 상당히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 그 열풍을 일으킨 당사자가 그렇게 시치미를 떼시는군요.”
“물론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했습니다.”
유진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3년 전부터 방영 중인 만화가 엄청나게 인기를 끌면서 그리되었다고 하더군요.”
“흠. 벌써 그렇게 되었나요?”
“태권소년 알버트와 태권소녀 마리아라고 하던가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솔직히 아동용 만화 같은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거든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하지만 한국의 태권도를 주제로 한 미국 만화가 큰 인기를 끌고, 그 인기가 미국 내 태권도에 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그래서 그 사범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보니 역시나 그 만화 제작에도 강 회장님께서 아주 큰 도움을 주셨다고 하더군요.”
유진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문화에 관련해서는 사실 돈을 아끼지 않는 편입니다. 문화야말로 투자 대비 효율이 가장 큰 산업 분야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죠. 문화 산업이야말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지니고 있지요. 하지만 태권도를 만화로 만들고, 그걸 통해 어린아이들에게 태권도와 한국에 대한 호감을 끌어냈다는 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마침 좋은 기획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전 그분들의 기획이 실현될 기회를 제공한 것뿐이고요.”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했다. 처음 그가 접한 기획은 과연 제대로 성공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최고의 애니매이션 디자이너와 프로듀서를 섭외해 팀을 꾸리게 했다.
그리고 원하는 퀄리티가 나올 때까지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고, 공중파에 좋은 시간을 차지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그 어떤 TV 애니메이션보다 큰 비용이 들어간 작품일 것이다.
그리고 제작비에 비하면 푼돈이나 다름없는 가격에 방송국에 제공하고, 방영 시간의 광고도 잔뜩 사 주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성공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었다.
“그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좋은 성과를 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요.”
“만화를 본 어린 소년 소녀들이 자신들도 태권도를 배우겠다고 태권도장에 몰려들었고, 덕분에 도장 사업이 불길처럼 일어나 결국은 가르칠 인력이 부족해 한국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사범이 미국에 넘어오고 있다고 그 청년이 신이 나서 설명하더군요. 지금 미국의 태권도계에서는 강 회장님을 그야말로 둘도 없는 은인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꼭 그게 제 덕분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의 태권도장 열기는 유진이 관여하기 전에도 상당한 편이었다.
이미 2008년 전미에 무려 3만여 개에 달하는 태권도 도장이 개설되어 수백만 명에 달하는 수련생을 가르칠 정도였으니.
미국 내의 다른 모든 마샬 아츠, 그러니까 가라테나 유도 혹은 우슈 같은 동양계 무술은 말할 것도 없고, 전통적인 격투 스포츠인 복싱이나 레슬링 같은 종목에 비해서도 훨씬 더 많은 도장이 있을 정도였다.
이미 70년대부터 태권도는 미국인의 삶에 스며들어 한국을 알리는 첨병의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어지간한 타운의 번화가에는 하나 정도는 꼭 들어서 있을 정도이고, LA 다운타운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라면 한 거리에도 몇 개의 태권도장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적인 진출을 했다.
3만 개에 달하는 도장 중 한국 출신 사범들이 지도하는 곳은 1만 곳, 나머지 2만 곳은 순수한 미국인이라고 하니, 단기적인 성공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서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미국내 태권도장의 인기는 이제 한국에도 제법 잘 알려져 있다.
다른 체육 활동과 달리 단순하게 싸우는 기술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예절과 정신수양을 우선시한다는 점 때문에 미국 학부모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나, 다양한 레크레이션을 통해 아이들에게 사회활동의 기회를 부여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유진은 태권도를 더욱 진흥시키는 것이 후일을 위해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태권도를 통해 한국 문화에 호의를 갖게 되면, 나이가 들어서 태권도를 하지 않더라도 한국에 대한 호감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한국에 대한 호감이 유진 개인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그런 태권도의 부흥에 유진이 어떤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미국 태권도계에서 유진에게 호의를 보낼 것이고, 당연하게도 태권도장에서 유진에 관해 조금이라도 좋은 이미지를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 대한 호감작을 해 볼 요량이었던 셈이다.
그를 위해서는 역시 아이들에게 붐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만일 청소년이 대상이었다면 아무래도 SNS를 통한 수단을 간구했을 것이지만, 미취학 아동에서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를 대상으로 한다면 역시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하는 만화였다.
30분짜리 한 편당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비가 들어가는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돈이 넘쳐나는 유진밖에는 할 수 없는 돈지랄이었다.
한번에 1년짜리를 만들면서 그래도 제작비의 절약이 꽤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비용을 들어보면 누구라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무시무시한 자본을 투자해 만든 애니메이션은 미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결과적으로 겨우 3년 사이 태권도장은 전미에 2만여 개가 더 늘어났다.
더군다나 기존의 태권도장에서도 한계에 달할 만큼 많은 수련생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모양이다.
프로젝트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은 매년 1기씩 그 기세를 이어 갔고, 그 외에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나,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태권도 기믹을 적극적으로 삽입하도록 요청하는 중이다.
다만 아직 태권도를 주제로 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개봉한 태권도 영화 중에 제대로 된 것을 세상 누구도 본 적이 없으니, 제대로 된 기획이 나올 때까지는 우선 보류하고 있다.
그렇게 유진은 차츰차츰, 막대한 자본을 아끼지 않으면서 태권도의 저변을 넓혀 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태권도는 다른 무술이나 격투기와 달리 신체에 무리가 가는 고난도의 훈련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 학부모들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 저변을 넓혀가는 데에 적절했다.
“문화와 태권도, 그리고 인적 교류 같은 강 회장님의 업적을 접하게 되면서 전 그동안 잠시나마 접어 두었던 꿈을 다시 되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지요.”
대통령은 조금 전보다 더욱 강렬한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생각한 이상을 실현하는 이가 반드시 저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물론이지요. 무엇이건 이상의 실현이 중요하지 그 주체가 정해져 있을 필요는 없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제가 가진 이상과 강 회장님께서 그려가시는 한국의 미래가 상당히 합치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이 부유하고 한국인 개개인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나라를 말씀하셨지요?”
“맞습니다.”
“저도 그런 한국을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물론 유진이 그리는 그림은 그보다 훨씬 더 너머에 있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서 밝힐 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대통령이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다.
이날의 대화는 무척이나 잘 이어졌다. 대통령은 유진의 행보를 잘(?) 이해하고 있었고, 자신은 최선을 다해 유진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의 말이 전적으로 이상의 합치에서 온다고 생각할 만큼 유진이 순진한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그렇게 꾸미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상대가 그렇게 저자세로 나오고, 그로 인해 유진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그의 정치적 야망을 만족시켜 주는 것쯤은 얼마든지 지원할 의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