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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11화 (311/363)

311화 공주와 공주

워싱턴에서 돌아오니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 오셨어요? 삼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도 와 있어요.”

셰넌 리와 함께 옐리자베타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진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 왔다.

“늦은 시간인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삼촌이랑 함께 식사나 하려고 했는데, 마침 안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돌아가려 했더니 옐리자베타가 오지 뭐예요.”

“저도 오랜만에 유진과 식사라도 하고 싶어서요.”

전처럼 자주는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옐리자베타와 함께하는 자리를 갖곤 한다.

꽤 편한 사이가 되었기에, 그리고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배경 때문에 유진은 그녀들에게는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마침 두 여자 모두 이웃사촌이라는 좋은 핑계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셰넌과 옐리자베타가 제법 친해진 모양이다.

두 여자 모두 편하게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그럼 두 분 모두 식사는 아직인가요?”

“저녁은 먹었는데, 왜 있잖아요. 밤에 갑자기 출출해질 때 말이에요.”

“저도 그래요.”

“그러면 우리 가볍게 야식이라도 할까요?”

“워싱턴에서 돌아오시는 길이시면 쉬셔야 하지 않겠어요?”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니 나도 조금은 배가 고파졌네요. 뭐가 좋을까요?”

“코리안 치킨이요!”

옐리자베타가 바로 메뉴를 골랐다.

“조금 기름지기는 하지만, 또 그만큼 야식으로 어울리는 것도 없더라고요.”

몇 년 전부터 제법 인기를 끌기 시작한 한국식 치킨 요리는 점점 더 뉴요커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었다.

유진은 바로 한국계 식당에서 치킨을 주문하고 그녀들 옆에 앉았다.

치킨이 도착할 때까지 세 사람은 가볍게 근황을 나누다가 치킨이 도착해서도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소파에서 나눠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정말로 치킨을 즐기는지 그때부터는 아주 조용히 닭 다리를 뜯는 데 열중했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각자가 한 마리씩의 치킨을 가볍게 해치워 버린다.

이제 마흔 줄에 들어서는 유진으로서는 겨우 반 마리를 해치우는 것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그때, 치킨을 먹는 동안 켜둔 TV에서 CNN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 러시아 대선의 가장 유력한 주자로 평가받고 있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지난 중국의 러시아 시베리아 침공에 대해 반드시 정당한 대가를 돌려받을 것이라 주장하고…….]

그해 겨울, 러시아는 대선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20여 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해 오던 대통령이 마침내 물러날 것을 약속했기에 그동안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러시아의 잠룡들이 일제히 대권을 잡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런 후보자들 가운데 단연 두각을 보이는 사람이 바로 옐리자베타의 부친인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였다.

수십 년 동안 전 대통령의 전횡과 측근들의 경제 장악 등으로 이미 러시아 국민들은 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들에 대해 등을 돌렸지만, 러시아 국민이 원하는 것은 사실 지금의 대통령이 주장하고 있는 대러시아 민족주의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경제의 민주화는 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대외 정책마저 완전히 바꾸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러시아인들은 소련 시대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시절이라 여기고 있었다.

미국과 함께 전 세계를 양분해 절반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향수는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중국의 침략으로 시베리아 일부를 빼앗긴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새로운 대권 주자들은 그러한 러시아 국민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면 결코 대권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한 발언을 하는군요. 러시아가 다시 전쟁을 시작하면 전 세계가 위험에 빠질 거예요.”

뉴스를 보고 있던 셰넌이 한마디 한다.

“그렇다고 중국의 시베리아 침공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나요? 그 전쟁은 중국에게 조금의 정당성도 없던 비열한 침략이었어요.”

옐리자베타도 할 말이 있는 모양인지 곧바로 반발했다.

“글쎄요. 그건 보기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연해주 개발을 위해 파견된 중국인 노동자들을 학살한 책임이 러시아에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에요. 그리고 연해주 땅이 원래는 중국의 영토였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되고요.”

“연해주가 만주족과 시베리아 제민족에게 중요한 근거지였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영토였다고 말하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커요. 그리고 그 당시 시베리아 제민족들은 지금 러시아 국민의 일원이기도 하고요.”

두 사람은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들의 고국을 옹호했다.

“더군다나 중국인 노동자가 러시아 관리에게 학살되었다니, 그런 넌센스가 어디 있어요? 중국인 노동자 중에 중국 인민군이 포함되어 비열한 공작을 펼친 것이 벌써 여러 번 증명되었고 말이죠.”

“공작이라는 증거는 전부 러시아 측 주장 아닌가요? 그런 식이라면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들의 공작이라는 증명도 가능하지 않나요?”

두 여인은 그렇게 공격적인 말을 내뱉으면서도 치킨과 함께 배달되어 온 치즈볼을 집어 우아한 모습으로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여자들이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한 명은 대학원생이고, 다른 한 명은 이제 막 금융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정 조절이 대단했다.

만일 주제가 한일 간의 문제가 되고, 대담의 당사자가 한일 두 나라의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면 벌써 얼굴을 붉히며 당장이라도 드잡이를 시작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두 여인의 태도는 마치 거대한 이권을 앞에 둔 두 명의 능숙한 외교관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유진은 그녀들의 태도가 결코 학습 따위로는 얻어질 수 없는 종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저 두 사람은 태생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인 것이다.

“적어도 지금의 러시아에 있어서는 중국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을 거예요.”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말할 수 없겠지요.”

“과연 그러네요. 당장에 무엇을 얻어 낼 수는 없다 해도,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미래에 얻을 이익도 잃게 된다는 거로군요?”

“그렇죠. 전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외교적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요구를 내놓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에요.”

“오늘 참 좋은 걸 배웠네요.”

예상외로 두 여자의 대결은 오래 가지 않았다.

셰넌 리와 옐리자베타는 적절한 선에서 두 나라 사이의 문제가 두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과는 상관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며, 마치 학술적인 대화였다는 듯 논쟁을 종결지었다.

“그런데 옐리자베타는 저 사람이 러시아의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나요? 굉장히 열심히 보시던데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적어도 러시아 국민들은 저분을 굉장히 사랑하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확실히 굉장히 멋진 남성분이네요.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반할 만한 분이에요.”

“그렇죠?”

좀처럼 감정을 내비치지 않던 옐리자베타였지만, 그 말을 할 때만은 제법 즐거워하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니 옐리자베타는 그 잘생긴 정치인이 자신의 부친이라는 것은 셰넌에게 말하지 않은 듯했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은 셰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그저 러시아와 중국의 어느 부잣집 자제들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삼촌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 잘생긴 남자가 러시아의 대통령이 될 수 있으려나요?”

불현듯 셰넌이 유진을 대화로 끌어들인다.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러시아 국민들은 새로운 러시아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유진의 말에 옐리자베타가 다시 기뻐했다.

“하지만 아직도 현 대통령 일파의 권력은 막대하지 않나요? 만일 러시아 국민들이 저 사람을 지지한다면, 오히려 큰일이 나지 않겠어요?”

셰넌이 꺼낸 이야기는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국민이 원하는 지도자가 반드시 정권을 잡는다는 룰은 통하지 않는다.

한번 정권을 잡은 권력층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도움이 되는 지도자가 정권을 이어 가도록 총력을 다한다.

이번 러시아의 경우도 그러하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명백하게 현 러시아 집권층과 전혀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고, 그가 정권을 잡게 되면 지금의 집권층들이 권력을 빼앗길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되면 결말은 언제나 하나뿐이다. 피를 부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피를.

그리고 그 피의 주인은 대부분 무고한 시민들의 것이리라.

“그렇겠지요.”

유진도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순 없었다. 현 대통령의 측근들은 러시아 경제의 30% 이상을 손아귀에 넣고 있다. 그걸 손 놓고 빼앗길 리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 국민들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만일 쿠데타나 내전 따위가 일어난다면, 양측에 승산은 반반이죠. 그리고 그런 행동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집권층에게 있어서도 끔찍한 재앙이 될 겁니다.”

러시아 국민들의 분노는 이미 억누를 수 없는 수준에 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 남자들의 상당수는 총기를 다룰 줄 안다.

백 년 전에 벌어졌던 끔찍한 내전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고, 다시 한번 혁명이 성공하면 구 황제파와 귀족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비극을 이번에는 올리가르히와 실로비키들이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요?”

셰넌은 꽤 집요하게 물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유진은 그녀가 뉴스를 보고 그런 대화를 시작한 이유도 파악하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와의 대화로 물꼬를 트고 난 뒤에 유진의 생각을 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해결이 필요한 거죠. 구시대의 악업을 해결하는 방법에 반드시 엄격한 처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유진은 약간은 에둘러 말했다.

“그러니까 새로운 정치인과 구세대 집권층 간의 어떤 정치적 타협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로군요?”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런 능력이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러시아는 새로운 길을 가게 될 거라는 거고요. 전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저 잘생긴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셰넌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준다.

“그렇군요.”

셰넌은 무척이나 진지하게 유진이 하는 말들을 하나하나 새겨듣고 있었다.

아직 유진은 그녀가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듣고 싶었을 뿐인지 아니면 유진의 의견을 취합해서 그녀의 부친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인지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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