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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12화 (312/363)

312화 가교(架橋)와 재기(再起)

그러니까 셰넌은 단순하게 뉴욕의 금융에 관해 공부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유진의 곁에 머물면서 그의 식견을 훔치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서방 세계에서의 영향력은 유진만 한 사람이 없으니, 그를 통한다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양측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생각도 있으리라.

중국의 그런 모든 의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유진은 흔쾌히 셰넌을 받아들였고, 그녀와 주기적인 만남도 이어 가고 있다.

셰넌을 통해 정보를 건네는 것은 한편으로는 유진에게 있어서도 이득이 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마치 옐리자베타를 곁에 두고 있으면서, 그녀의 부친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일 몇 년 전이였다면, 미국의 양대 적대국인 러시아와 중국 지도자의 자녀를 이렇게 가까이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유진이 미국의 국익에 반한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유진은 행동으로 자신의 이익이 미국의 국익에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 왔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적지 않은 권력자들과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탄탄해진 입지를 고려하면 작은 의구심 따위로 흔들릴 수준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 버렸다.

물론 유진이 셰넌에게 건네는 말에도 거짓이나 꾸밈은 없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확인이 될 일들이다. 쓸데없는 말을 만들어 이 두 명의 중요한 손님들에게 우습게 보일 생각 따윈 조금도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새로운 정치 세력과 구 세력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이 그 자신이라는 사실은 굳이 밝힐 생각이 없었다.

“그분께서 꽤 섭섭해하고 계십니다.”

플라자 호텔을 찾은 러시아 지도자의 오랜 재산 관리인인 알렉세이 표도르프는 유례없이 직설적인 표현을 내뱉었다.

기어이 유진과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사이의 관계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유진이 둘 사이의 협상에 끼어들며 밝혀진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미 옐리자베타가 유진의 보호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이미 한참 전에 러시아에 알려졌으니 지금까지 애써 무시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지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가 해 온 일들을 돌이켜보면, 솔직히 그분께 나처럼 도움이 된 사람은 없던 것 같은데요. 이거 오히려 내 쪽에서 서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그저 말씀을 전해 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위험한 나라의 위험한 군주 아래서 심복으로 일해 온 시간이 꽤 오래인 만큼, 표도르프는 처세에 아주 능통했다.

“사실 그분도 이제 대세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하고 계십니다. 연세도 연세이니까 말이지요.”

“그렇지요. 최근 들어서는 건강도 꽤 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러시아 대통령의 건강에 대한 논란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아주 많은 권력자들은 아무리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눈을 감을 때까지는 자신이 쥐고 있는 권력을 결코 손에서 놓으려 하지 않는다.

“조국 러시아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분이니까요. 어쨌든 러시아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다가오고 있으니, 잠을 잊을 만큼 신경을 쓰신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추운 곳에서 고생하셨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추위는 삶과도 같은 거니까요.”

“차라리 잠시 따뜻한 곳에서 건강을 살피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말들도 있더군요.”

유진과 표도르프의 대화는 서로 끊기는 일 없이 바로바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쿠바 같은 곳 말이지요?”

“쿠바가 의료 기술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의료 기술이라면 러시아도 어디에 뒤지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노화에 관련된 몇 가지 훌륭한 대안을 개발했다고 하더군요. 적어도 몇 년 뒤에는 실용화의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파킨슨병, 췌장암, 조현병 등 현 러시아 지도자의 건강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풍문이 나돌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대통령은 오히려 그 나이대의 다른 러시아 남자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건강한 편이다.

그 정도의 권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남들보다 훨씬 더 건강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고, 건강의 이상 신호가 발견되면 재빠르게 치료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건강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원하는 만큼 건강하게 살지 못할지를 염려하는 편이 맞다 보아야 할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불치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노화를 막는 것이다.

“노화에 대한 대안이라니, 정말 놀랍군요.”

그리고 대통령의 사자로 방문한 표도르프는 유진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아직 실험 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70대 이상 노년의 신체를 적어도 50대 정도로 돌리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고 합니다.”

“굉장하군요. 하지만 실험 단계라면 실질적으로 사용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타당한 질문이었지만, 유진은 이미 대답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몇 가지 윤리적이고 법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그렇기는 하죠.”

여타의 다른 질병에 대한 문제보다, 노화를 치유할 방법을 기다리고 있는 권력자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노화 방지나 역행을 가능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굳이 미국이 아닌 다른 제삼세계에서의 임상 실험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투자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의학 연구실에서 쿠바와 남미 몇 곳에 브런치를 만들 예정인 모양입니다.”

“그곳도 존스홉킨스의 그 연구 성과와 관련이 있겠군요.”

“물론이지요.”

“확실히 유진의 말씀대로 그동안 우리의 조국 러시아를 위해 고생해 오셨으니, 잠시 간은 차라리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간을 보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습니다.”

현 러시아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은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었다.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너무나도 큰 실책이다.

그렇지만 그가 권력의 중심에서 내려오는 것은 정치적인 보복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물러날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를 위해 가장 안전한 곳을 마련해야 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영향력이 너무 크지 않은 곳이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안락한 노후를 보내기 위한 인프라가 갖추어진 나라일 필요가 있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바로 건너편에 보일 만큼 가까우면서도, 미국의 영향력이 눈곱만큼도 먹히지 않는 나라, 쿠바가 적격인 것은 서로가 더 말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거기에 유진은 미국의 최고의 의료진들을 편법으로 제공해 줄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지금 꺼낸 말처럼 정말 노화를 막는 일 따위야 공수표에 지나지 않지만, 적어도 존스홉킨스의 의료진이라면 러시아의 지도자도 어느 정도는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국민들은 여전히 그분을 사랑하고 있고, 지금은 잠시 토라져 있는 것뿐이라고요. 때로는 사랑하는 이의 부재야말로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떠올리게 하지요.”

유진은 알렉세이를 통해 현 대통령에게 지금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기다리면 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지난 몇 달 동안 한국 국민들이 유진에 대해 느낀 감정 같은 것 말이지요?”

알렉세이도 유진의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반드시 비슷하다고는 못해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겠지요.”

“사실 그 시간은 그분께서도 무척 흥미롭게 지켜보셨다고 합니다.”

알렉세이는 대통령이 유진의 행보에서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대개의 독재자는 국민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과대망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알렉세이의 말을 들어 보니 그는 진심으로 재기를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라도 사랑하는 조국 러시아를 잠시나마 떠날 생각은 하고 계십니다만, 드미트리가 너무 과한 요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물론 쿠바와 의료진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협의해야 할 내용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다.

“그런가요?”

“해외에 있는 자금을 모두 공개하라는 것은 솔직히 너무 나간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역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이다.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지난 20여 년 동안 러시아 경제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쥐고서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조성해 러시아는 물론이고 해외 곳곳에 감추어 놓았다.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로 한동안 러시아는 아주 혹독한 경제난에 시달렸지만, 21세기로 넘어오며 석유를 비롯한 천연자원 가격의 상승으로 러시아는 다시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었다.

전 정권에서 디폴트를 선언하고, 국민들이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어렵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20년 동안 러시아는 GDP 순위 10위권을 지켜올 수 있었다.

그렇게 커진 경제 규모만큼이나 20여 년 동안 조성된 비자금 또한 막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알렉세이를 통해 엄청난 자금을 관리하고 있는 유진으로서도 대통령의 전체 비자금 규모를 유추하기 어려울 정도이니 가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러시아 대통령이 천문학적인 규모의 비자금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은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

또 그런 만큼이나 새로운 러시아의 지도자를 노리는 대권 주자들은 그 비자금을 회수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비자금의 공개 여부가 러시아의 미래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대통령의 비자금은 사실 그 한 사람의 자금이라고 할 수만도 없다. 그와 관련된 적지 않은 권력자들의 재산도 이리저리 얽혀 있다.

그런 비자금을 전부 공개하고 내놓으라는 것은 한 번 죽을 때까지 싸워 보자는 말이나 다름없다.

물론 뛰어난 정치인인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진심으로 그런 요구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다.

“때론 덮어 둘 것은 덮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렉세이가 유진을 방문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는 유진이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대권을 원한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모아온 비자금은 건들지 말라는 요구이다.

“알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드미트리는 절대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지요.”

유성은 러시아의 신구 세력 사이의 가교 역할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 * *

“때론 덮어 둘 것은 덮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날, 유진은 알렉세이에게 들었던 말을 전혀 다른 사람에게서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

바로 새롭게 러시아의 대권을 노리는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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