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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13화 (313/363)

313화 쇼핑 찬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결코 고결한 사람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소비에트가 붕괴하던 혼탁한 상황에서 헐값에 국영기업을 불하받아 20년 사이 러시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의 반열에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지금 자신이 비난하고 있는 대통령의 측근 인사 중 한 명이었다.

러시아의 부패나 정경유착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둘 사이에 얼마나 큰 돈이 오갔을지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대통령의 비자금을 요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더 중요한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였다. 다름 아닌 현 대통령의 인정이 바로 그것이다.

선거에서 승리한다 해도, 대통령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국면은 복잡해질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러시아의 선거는 유권자의 수보다 더 많은 투표지가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다.

행정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현 집권당이 부정 선거를 획책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런 모든 불확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협상이 필요했다.

그쪽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넘겨주고, 이쪽에서 원하는 것을 받아 내야 한다. 그 와중에 다양한 협상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만일 과거의 모든 오점을 깨끗하게 만들겠다면, 세상은 피로 물들고야 말겠지요. 지금의 아메리카를 차지한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이고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저지른 수많은 악업을 모두 징치하려고 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피로 가득할 것이다.

때로는 알면서도 그냥 덮어 두어야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는 것이다.

지금 러시아의 상황도 비슷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정권이 빼돌린 자금을 되찾아 러시아 국민에게 돌려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게 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다른 정치인들에 비해 훨씬 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맞는 말씀입니다. 세계의 평화, 그리고 러시아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때로 눈을 감고 넘어가야 할 때도 있겠지요.”

“사실 저도 그걸 정말로 요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오랜 시간 자신의 힘으로 거대한 기업을 일구어 온 사업가로서,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거래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쪽이 훨씬 유리할 때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제고 시간이 지나면 되찾을 길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른 부분은 잘 처리되어 가고 있습니까?”

“네. 지금 당장으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그들의 권한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피를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대통령 한 사람뿐이 아니다. 대통령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권력자 또한 자신의 지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을 전부 몰아내려 한다면 드미트리의 말처럼 피가 난무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러시아 시민들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고, 그런 뒤에도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전히 구 세력은 행정부는 물론이고 러시아군과 경찰, 그리고 악명 높은 정보기관까지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다 해도 지금의 기득권을 손에서 놓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순한 권력욕 때문은 아니다. 그들의 밑에는 지금까지 러시아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해 온 재계 인사들이 있고, 또 드넓은 러시아 전역을 나누어 통치하고 있는 자치 정부들과 수많은 부패 공무원들이 있다.

권위주의 국가가 부패를 일소할 수 없는 것은 그러한 부패의 사슬망이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고 부르짖지만, 진정 부패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나라의 절반과 싸워야 할 수도 있다.

혁명가라면 피를 두려워하지 않겠지만, 드미트리는 혁명가이기보다는 기업가인 사람이다.

그 두 종류 인간의 차이점은 미래를 그려 나가는 데 있어 이상을 추구하는지, 손익을 먼저 계산하는지로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드미트리는 피를 부르는 혁명보다 구세대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쪽을 선택하려 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전부 내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야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일이지요.”

드미트리는 기업가이고, 상인이었다. 상인은 늘 협상을 한다.

“적어도 정보기관과 군은 안 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군부가 민주주의로 선출된 정당한 지도자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일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수도 없이 벌어져 왔다.

사실 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억지로라도 대만 정도를 제외한다면 군부나 독재 정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나라는 드물다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올리가르히들이 쥐고 있는 지분에 대한 협상도 계속해야겠지요.”

드미트리는 유능한 사람이고 또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 수많은 관료와 정보기관, 군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러시아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기업인들을 상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협상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에게는 지금의 권리를 인정해 주고, 또 누군가의 권리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간다.

그렇게 수많은 협상의 와중에 러시아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만일 옳고 그름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처럼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는 그의 태도를 부당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피가 흐르지 않게 하려는 드미트리의 방식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이제 겨우 1주일도 남지 않았습니다. 대통령 측은 어떻게 나오고 있습니까?”

자신의 근황을 말하던 드미트리가 물었다.

“처음 말씀드린 대로 될 것 같더군요.”

유진은 상대가 비자금 전부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당장은 비자금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쉽지 않으니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그걸 내어주고 러시아 정권을 차지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것이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측의 생각이다.

“대신 선거 이틀 전까지는 확실하게 선거 결과에 대한 인정을 발표해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최소한도의 조건도 지켜지지 않는다면 협상의 의미가 없겠지요.”

선거 직전 발표될 현 대통령의 무조건적인 선거 결과에 대한 인정은 마지막 민심을 뒤흔들어놓을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열심히 집결 중인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의 지지자들이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날의 선거를 위해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이 평생 모아 온 재산 대부분을 투입하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 내의 자산은 이미 정권에 빼앗겼지만 해외에 은닉한 재산이 적지 않았고, 그걸 남김없이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유진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를 보면 그도 결코 깨끗한 인간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 덕분에 지금처럼 선전할 수 있었다.

드넓은 러시아에서 선거전을 이어 가려면 미국만큼은 아니어도 엄청난 자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 도전장을 낸 수많은 잠룡 중에서도 드미트리의 자금 동원력을 따라올 사람은 현 집권층의 후보 외에는 달리 없었다.

그리고 지금 드미트리의 인기는 그가 투자한 비용과 전혀 별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깨끗하고 고결한 사람이 모든 고난을 이겨 내고 마침내 정권을 잡는 이야기는 현실 세계에서는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금력의 힘으로 선거에 승리한 사람이 반드시 최악의 지도자인 것도 아니다.

케네디도 클린턴도 그리고 오바마와 바이든도 사실은 엄청난 자금을 바탕으로 선거에 승리했다.

그러니까 현대 민주주의에서 선거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동원하는 것은 필수적이고, 거기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후보의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드미트리는 건조하게 가벼운 인사로 전화를 마쳤다. 그러나 둘 사이에 오간 거래는 선거가 끝난 뒤 아주 많은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음을 말해 준다.

유진은 결코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 드미트리를 발 벗고 돕고 있는 것은 아니다.

드미트리가 정권을 잡는 순간부터 유진의 투자 기업들과 월스트리트의 투자자들은 러시아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할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은 수십 년에 걸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설 것이고, 부당하게 강탈당한 러시아의 국부를 되찾겠다며 숙청을 시작할 것이다.

수많은 기업가가 법정에 서게 될 것이고, 또 그만큼 수많은 기업이 매물로 나오게 될 것이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드넓은 러시아 전역의 풍부한 자원에 대한 개발권을 가진 기업들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매할 수 있는 새로운 골드러시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소비에트가 붕괴될 당시 국유 재산을 헐값에 불하했던 시기의 일들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번엔 적어도 몇몇 권력에 유착한 인사들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개된 시장에서 공정한 절차를 통해 팔려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기업의 미래 가치에 비해 훨씬 더 저렴한 가격으로 거두어들일 기회이다.

아마도 최근 중국의 금융 시장이 열리며 생긴 경제적 기회 다음으로 거대한 이권 사업이 될 것이다.

세계 제일의 자원부국인 러시아의 경제계를 손아귀에 넣을 기회이다.

물론 러시아인들의 국민감정을 고려해 인수 경쟁에 참여하는 기업은 철저하게 러시아 국민 소유의 기업이 될 테지만, 거기에 투자되는 돈은 대개 유진의 주머니에서 나오게 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주 여러 통로를 거쳐 러시아 경제 전반을 잠식할 기회였다.

“비자금 문제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승인이 떨어질 겁니다.”

현 러시아 대통령의 비자금 관리인인 알렉세이 표도르프는 바로 다음 날 찾아왔다.

선거일이 다가오며 급박해진 것은 후보자들만이 아니다. 권력이 손에서 멀어질 날이 며칠밖에 남지 않은 대통령이 오히려 더 마음이 급해져 있었다.

선거가 어떤 식으로 끝나든 지금의 대통령이 자리를 유지할 방법은 전무하다.

만일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아 내전이 발생한다 해도, 고령인 대통령이 감당할 상황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챙기고 유진이 권유한 대로 몇 년 정도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건강을 추스르며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판단일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F0 펀드의 규모를 늘려 주셨으면 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러시아 대통령은 지금도 유진의 고객 중에 가장 큰 액수를 F0 펀드에 넣어 두고 있다.

매년 적어도 수십%에서 많을 때는 두 배의 수익률이 나오는 F0 펀드의 규모를 늘려달라는 것은 그만큼 자기에게 매년 더 많은 가욋돈을 달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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