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특이점(特異點)
중국, 러시아, 그리고 한국. 여러 나라의 정권이 교체되고, 국민들은 새로운 활기 속에 삶이 나아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의 운영 주체가 바뀌는 것만으로 그 사회가 지닌 본질적인 문제점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나 중국과 러시아 같은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단순히 부패 문제뿐 아니라 더 많은 내재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고,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는 국민적인 합의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나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기보단 반대되는 집단의 일면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꼬투리 삼아 공격하고 나서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감정적인 선동에 휩쓸리기 쉬운 대중을 목표로 삼는 이런 공격은 대개 쉽게 성공하고는 한다.
지금의 중국 내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국가 발전을 생각하면 경제 개방을 통해 얻는 이익이 훨씬 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자국의 기업들을 빼앗긴다는 선전은 상당히 효과적으로 먹히고 있었다.
“결과로 보여 주는 수밖에 없겠지요.”
셰넌과 옐리자베타의 토론을 지켜보던 유진이 말했다.
“결과라면 역시 경제 성장이겠지요?”
셰넌은 유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열정적인 모습이다.
“물론 성장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분배의 문제입니다. 경제 성공의 결실이 어느 한쪽으로 몰린다면 불만은 터져 나올 수밖에 없죠. 그리고 대중들이 가진 불만은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표출되기 마련이고요.”
“하긴 맞는 말이에요. 러시아도 결국은 아주 소수의 올리가르히들에게만 성장의 결실이 쏠리는 게 가장 큰 문제였으니까요.”
옐리자베타도 유진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오래인 만큼,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이 얼마나 정확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앞으로 다가올 세계는 서민들에게 더욱더 가혹한 시기가 될 겁니다. 러시아나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더욱 분배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겁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요안나도 동의를 표하며 끼어들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 내 부의 쏠림은 도를 지나치고 있어요. 중산층은 서민으로 전락하고, 서민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수준이지요.”
네덜란드 국왕의 장녀이지만, 미국에서 지낸 시간이 긴 만큼 그녀는 절반쯤 미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는 상위 10%의 부자가 국부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어요. 그리고 최상위 1%가 20%도 넘는 부를 가지고 있지요. 갈수록 일반인들의 불만은 커져 갈 거예요.”
2008년의 금융 위기 이후로 미국의 경제는 오히려 전보다 더욱 건실해졌다. 문제는 그 성과를 오직 소수만이 독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 위기로 서민들의 삶은 팍팍해졌지만, 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 기업 이익 증가에서 생긴 소득의 증대는 원래 부자였던 사람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었다.
금융 위기의 주범들이 바로 그 부자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어처구니없는 결과였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해요. 앞으로의 10년은 지금보다 더욱 가혹할 겁니다.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걸 유념하지 않는다면,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엔 아주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 가혹하다는 건가요?”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유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기술적 특이점이요?”
셰넌과 옐리자베타 두 사람 모두 그게 어떤 말인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낸 것이 누군가에 따라 무게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네. 90년대부터 급속하게 발전해 온 기술이 드디어 사회 구조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시기가 다가왔어요. 더군다나 세계 각국은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무한 경쟁의 시대로 들어서 있지요. 이 시기를 어떻게 넘기는지에 따라 각국은 선진국으로 들어설지, 혹은 중진국에 머무르게 될지 갈리게 될 겁니다.”
어쩌다 보니 송년회의 자리는 세계의 경제를 논의하고, 각국의 정치에 관한 비평을 하는 자리가 되었다.
하나 딱히 나쁠 것은 없다. 송년회라고는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세계적인 강대국 지도자에게 직접적으로 간언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유진이 하는 말은 결과적으로 그 지도자들에 대한 조언이나 다름없기에, 유진은 송년회의 분위기가 우울해지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 갔다.
* * *
“진짜 덥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2025년 여름, 서울에 사는 31살의 석찬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서다가 밀려드는 지독한 더위에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에어컨으로 시원해진 식당 내부와 달리 햇볕이 내리쬐는 외부는 숨이 막힐 정도의 더위가 지배하고 있었다.
“40도라잖아, 40도. 휴우…… 진짜 지독하게 덥네.”
석찬의 뒤를 따라 나온 친구 기범이 대꾸했다.
“아니, 어제까지만 해도 가을날 같더니만 갑자기 이렇게 더위가 몰려오냐.”
“요즘이 다 그렇지. 덥다가도 갑자기 날씨가 바뀌고, 춥다가 하루 사이에 더워지기도 하고. 이젠 익숙해. 어디 갈까?”
“저기 편의점 있다. 저기서 캔 커피라도 사야겠어.”
밖에 나와 있는 것이 힘들어진 석찬이 바로 길 건너편의 편의점으로 향하며 말했다.
“난 콜라.”
기범이 석찬의 뒤를 따르며 메뉴를 골랐다.
몇 걸음 만에 편의점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편의점 문 앞에 달린 단말기에 스마트폰을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매장에서 각기 원하는 음료를 고르곤 계산 같은 것도 하지 않고 다시 밖으로 나온다.
기범이 들고 있던 스마트폰에 내장된 REF 태그를 통해 계좌에서 자동으로 계산되었기 때문에 달리 카운터나 키오스크에서 계산하는 절차가 필요 없었다.
“계산 기다릴 필요 없어서 편하기는 한데, 좀 삭막하네.”
편의점을 나와 캔커피의 뚜껑을 따며 석찬이 말했다.
“무인 편의점이 그렇지 뭐.”
“이렇게 일자리가 하나씩 사라지는구나.”
“전부터 예고되어 오던 일인데 어쩔 수 있나.”
“편의점이고 식당이고 요즘은 일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워. 이렇게 일자리가 사라져 버려서야 일자리 구하는 게 너무 힘들잖아.”
“대신 그 덕분에 새로운 일자리도 생겨나고 있잖아. 우리 회사도 자동화 기술 사업부가 요즘 제일 잘나간다고.”
“그래. 잘나가시는 기범이한테 얻어먹으니 부담이 없어서 좋네.”
석찬은 친구인 기범이 그가 말하고 있는 자동화 기술 사업부의 대리로 올라선 것을 잘 알고 있다.
“근데 새로 생기는 일자리보다 없어지는 일자리가 훨씬 더 많은 게 사실이잖아.”
석찬이 매사에 불만이 많은 성격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화를 이끌어가기 위한 기술일 뿐이다.
굳이 이날 기범의 직장까지 찾아와 함께 식사한 것도, 그리고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며 말을 꺼낸 것도 전부 목적이 있는 행위였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자동화 관련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일자리 수가 올해만 수만 단위라고 하더라.”
“전국의 편의점과 식당에서 사라진 일자리가 몇인데? 요 몇 년 동안 백만은 안 되도 수십만 개는 넘을 거다.”
“응? 하긴 그러네. 그런 것 치고는 실업률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 거 같던데?”
“그거야 나라를 빠져나가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그러지. 우석이도 미국 간다더라.”
석찬이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꺼낸다.
“나도 들었어. 요새 교육원에 다니고 있다면서?”
“어. 금융 공학 수업 듣고 뉴욕 가서 투자 회사에 취직할 생각이래더라.”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은 정도냐? 뉴욕 투자 회사면 그 강 회장님 회사인데. 못해도 연봉이 수억은 될걸?”
그의 말대로 뉴욕 투자 회사는 청년들의 꿈의 직장 중 하나였다.
“거긴 들어가기 어렵지 않아?”
“성적순이니까.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성적이 전부지. 아무리 세상이 발전해도 결국은 성적순이더라. 결국엔 경쟁에서 승리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야 먹고살 만한 건 어쩔 수 없나 봐.”
“어디는 안 그러겠어?”
석찬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기범도 한국에서 제일가는 사학을 나와 역시 한국에서 최고라고 말하는 제일 그룹 계열사에 근무하고 있다.
물론 석찬 자신도 같은 학교를 나와 잘나가는 언론사에서 기자를 하고 있으니, 두 사람 모두 성적에 있어서는 나름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다.
“다행이네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충분해서.”
“그러니까 말이야. 작년에 해외 취업으로 나간 사람만 수만 명이라더라.”
“정확히는 8만 명이 조금 넘어.”
처음 말을 꺼낸 석찬은 기자인 덕분에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8만 명이면 정말 많은 거잖아?”
“그렇지. 강 회장님이 투자하기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해외 취업으로 나가는 사람이 겨우 5,000명 수준도 안 되었으니까. 한 해 취업 시장에 새롭게 유입되는 사람이 50만 명 수준이니까 거의 20%에 가깝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다행인 거 같네.”
“어. 지난 10년 동안 대략 70만 명 가까이 해외로 나갔다고 하니까 건국 이래 최대의 인력 유출이라잖아. 흐흐. 몇 년만 있으면 백만 명이야. 백만.”
구체적인 숫자로 들으니 새삼 놀라운지 기범이 혀를 내둘렀다.
“백만이라니. 그렇게 들으니 또 무섭네. 그렇지 않아도 인구수도 주는데 백만 명이 빠지면 좀 그렇지 않나?”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 백만 명이 한국에 남아 있었다고 생각해 봐. 일자리는 점점 주는데 구직자로 남아 있어야 하는 젊은 사람이 백만이라고.”
“그건 또 끔찍하다.”
기술의 발전이 과거의 일자리를 없애는 것은 하루 이틀 사이의 일이 아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새로운 기술의 발명과 기존 기술의 발전은 해당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백수로 만들었다.
물론 그런 새로운 기술은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고, 덕분에 더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져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져 왔다.
그러나 지금의 기술 발전은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금까지의 기술 발전은 한 사람이 생산할 수 있는 양을 늘리는 수준이었다면, 현재의 기술 발전은 생산 현장에서 아예 사람을 몰아내고 있는 수준이다.
전국의 식당 노동자와 편의점 등 소매상에 종사하는 이들만 수백만에 달한다. 로봇 쉐프와 로봇 서버가 그런 수백만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기술적 특이점이 다가오고 있다. 아니, 이미 이 시점에서 그 특이점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아직 실감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세상은 벌써 몇 년 전과 다른 시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직 백만에 달하는 실업자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이런 추세는 점점 더 가파르게 바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해외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오히려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