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연금과 소득세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일자리가 줄어들 것은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SS파트너스의 김환은 청와대의 비서관과 고용노동부 정책기획관, 그리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연구개발정책실장 등 정부의 주요 고위 실무 인사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고 있었다.
이미 몇 년 동안 김환은 정부 고위 인사들과 이런 자리를 계속 이어 왔고, 그러한 자리에서 그가 스쳐 지나가듯 내뱉는 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의 주요 정책에 반영되고는 했다.
매년 수백억 달러에서 많게는 천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를 이어 오는 큰손인 SS 파트너스의 건의를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정부 관료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맞습니다. 사실 한국의 상황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그걸 보여 주고 있지요. 최근 몇 년 사이 해외로 취업을 나가는 젊은 사람이 늘어 실업률이 그렇게 늘어나지는 않고 있지만, 줄어드는 일자리의 숫자가 점점 가속될 것이 분명하니 앞으로는 꽤 문제가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날의 주제는 주로 노동 분야, 그중에서도 일자리에 관련된 내용들이다.
SS파트너스는 한국 제일의 대기업인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의 협력사이고, 최근 들어 두 기업집단은 다른 대기업들을 완전하게 압도하고 있다.
이 두 기업집단에 관련된 수많은 기업에서 유지하는 일자리 숫자가 국내 전체 일자리의 20%에 가깝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이니, 이날의 자리는 단순한 간담회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사실 이 정도 되면 본격적인 정경 유착이라 불려도 틀리지 않을 터이지만, 유진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의 상황에서 이러한 모임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진다 해도 비난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때 즈음의 한국인들 상당수는 정치와 경제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가 되어 빠르게 현안을 처리하는 것을 반기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유진의 투자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고, 한국에 대한 투자는 유진 자신은 물론 투자를 받은 기업들, 그리고 해당 기업의 종업원들을 넘어서 국민 전체에까지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유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이 너무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 그의 영향력이 한국에 손해를 끼치고 있다는 의견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진짜 문제는 줄어드는 일자리 대부분이 숙련이 필요하지 않은 쉬운 일자리라는 점이겠지요.”
이날의 주제 때문인지 고용노동부에서 나온 관료의 발언이 가장 많았다.
당장은 순행하고 있지만, 그의 말처럼 미래를 생각하면 어떠한 대책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기는 하다.
현시점에서 가장 많이 줄어든 일자리는 식당 노동자, 편의점 아르바이트, 그리고 콜센터 상담직 등 쉽게 사람을 구할 수 있던 직종이다.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이 벌써 한국에서만 수십만 개에 달하는 일자리를 대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은 다시 비슷한 직종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데이터화할 수 있고 패턴화할 수 있는 영역을 인공지능이 빠르게 대체하면서 사무직을 포함한 전문직도 상당히 줄어들고 있지만, 인공지능과 로봇 분야에서 적지 않은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있는 만큼 전체적인 일자리 숫자는 외려 늘어났다 볼 수 있습니다.”
“관련 산업의 발달로 앞으로 10년 동안 적어도 백만 단위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로봇과 인공지능 분야에서 한국이 선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만큼, 관련 분야 일자리 또한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다른 나라들에 돌아갈 일자리는 줄어들겠지만, 어떤 시대에서도 다른 나라 사정을 보아줄 만큼 세상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전자와 반도체 분야에서 막대한 일자리를 만들어 온 것처럼, 앞으로 20년 동안은 인공지능과 로봇 분야가 일자리를 창출해 낼 겁니다. 한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빠르게 관련 분야를 선점한 만큼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거고요.”
“역시 이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해 오신 강 회장님의 선견지명 덕분 아니겠습니까?”
이야기는 잠시 유진에 대한 찬사로 흘러갔다.
“강 회장님께서 이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를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않으셨다면, 아마 지금쯤 무척 심각한 사회문제가 생겨나고 있었을 겁니다.”
“유럽 쪽은 벌써 꽤 논란이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점점 줄어드는 일자리 때문에 로봇 도입에 반대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는 모양이더군요.”
“참 다행입니다. 강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간담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차관급에서 1급에 이르는 최고위 공무원들이다.
하지만 한 번 누군가 물꼬를 트자, 서로 지지 않겠다는 듯이 빠르게 찬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결국은 줄어든 비숙련 노동자들의 자리만큼 그를 대체할 만한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사실 인공지능이나 로봇 산업이 창출하는 일자리도 적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줄어드는 일자리 분야와 새롭게 생겨나는 일자리 사이의 괴리이지요. 식당에서 서빙을 하던 분들께 로봇이나 인공지능 관련 일자리를 추천해 드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이야기는 이내 눈앞에 닥친 현안으로 돌아온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환이 다시 입을 열자 사람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집중된다.
“확실히, 갑자기 일자리에서 내몰린 사람들에게 각자가 삶을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지요.”
“우리나라도 이제 당당한 선진국의 반열에 들었으니, 국민들의 삶을 위해 좀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뭐. 그것도 다 강 회장님 덕분이지요.”
유진의 투자 덕분에 한국의 경제 규모는 지난 몇 년 사이에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이제 한국은 선진국의 문턱에 걸터앉은 정도가 아니라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높은 개인 소득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이다.
룩셈브르크나 벨기에, 싱가포르처럼 소규모 국가나 노르웨이, 카타르 같은 산유국을 제외한다면 인구수가 수천만을 넘어서는 나라 중에서는 발군의 소득을 자랑하는 나라이다.
더군다나 최근 로봇과 인공지능 산업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보이면서 이러한 성장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가속화될 전망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는 경쟁 선진국들에 비하면 아주 처참한 수준이었다.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의료보험을 제외한 사회보험 제도에 있어서는 선진국 중에 최악이라는 말을 듣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
서방의 선진국 중 가장 적은 사회보장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미국에 비해서도 여전히 2/3수준의 비용만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줄어드는 일자리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점점 더 큰 사회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실업자들을 재교육하고, 재사회화하며, 그럼에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역시 재원이 문제겠지요.”
언제나 그렇듯 모든 문제는 재정적인 사안이었다.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도 재정이고, 국가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것 또한 재정 문제다.
특히 실업자나 노령층 등 취약 계급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해 줄 것인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커다란 논란을 부르는 문제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제 우리나라도 소득세를 정상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은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은 다른 선진국에 못지않지만, 중저위 소득자에 대해서는 아주 적은 소득세를 부과하고 있다. 특히 저소득자가 부담하는 소득세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한국의 평균 근로 소득 세율은 20% 초반인데 반해, 미국은 30%, 서유럽 국가들은 최하 40%에서 많게는 50%에 육박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한국의 경쟁국인 일본도 미국보다 높은 32%에 달했다.
“그건 문제가 많습니다. 국민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입니다.”
다른 선진국들에서 소득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취약 계층에게 더 많은 지원하는 것이 이미 사회적 합의에 다다른 데에 비해, 한국 사회는 해당 사안이 좀처럼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았다.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지금까지보다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에 대한 저항은 당연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 사람들의 민감도는 다른 자본주의 세계보다 훨씬 더 격렬하다 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공산주의와의 처절한 내전에 의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약자에 대한 지원을 선뜻 허용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나 21세기로 들어오며 한국 사회는 과거보다 훨씬 더 약자에 대한 혐오가 강해져 왔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보다 그들에게 다양한 이름의 프레임을 씌워 혐오하고,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이 유행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그런 면에서 아직 한국 사회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었다.
그러핟보니 줄어드는 일자리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세금을 늘리겠다는 말이 어떠한 반향을 불러오게 될 것인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저항이 적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손을 보지 않는다면 앞으로 더욱 큰 문제가 생겨날 겁니다. 국민연금이나 의료보험 문제를 매번 미뤄 온 결과가 얼마나 끔찍했습니까?”
“맞습니다. 그것도 강 회장님이 아니셨다면 지금쯤은 연금 붕괴를 맞이하고 있겠지요.”
누군가의 말처럼 국민연금을 살린 것은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국민연금의 재원을 관리하는 기금운용본부는 무려 1조 달러가 넘어가는 엄청난 재원을 관리하고 있다.
운용에 있어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해도 더러 있었음에도 국민연금 지급액이 매년 늘어나고 있어 늘 고갈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기록적인 수익률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모두 유진 산하의 자산운용사에 연기금을 맡겨 놓은 덕분이다.
지난 정권에서 기금운용본부가 운용 중인 자산의 70%를 윌리엄의 자산운용사에 맡겼고, 매해 기록적인 수익률을 보며 모두가 환호성을 지를 수 있었다.
윌리엄은 유진에게서 한정적인 정보를 제공받아 안정성에 중심을 둔 자산 운용을 이어 오고 있기에 당연히 요안나를 통해 운용하고 있는 VIP 전용의 F0 펀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익이다.
그래도 매년 20%에서 30% 사이라는 자산운용사치고는 무지막지한 실적을 올리고 있었고, 그 혜택을 가장 크게 보는 것이 현재의 국민연금 기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