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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24화 (324/363)

324화 라파마이신

“뭘 원하는 건가요?”

요구 조건이라는 말에 유진은 오히려 반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쪽에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 충족시켜 준다면 넘어올 의사가 있다는 말이다.

원치도 않는 사람을 억지 공작으로 넘어오게 해 봐야 궁극적인 목적을 이룰 수도 없을 것이다.

유진이 원하는 것은 평양의 장수연구소에서 북한의 지도자를 위해 연구 중인 내분기계 질환 치료에 관한 연구이다.

유진이 겪은 미래에서 평양의 최고 지도자는 내분기계 질환으로 건강상의 고통을 받고 있었고, 그 때문에 북한의 장수연구소는 그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알려졌다.

인권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어려운 북한의 연구 기관에서 심혈을 기울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유진도 어렴풋이 짐작 가능했다.

연구원이 자유 세계로 넘어와 북한의 실태를 고발하는 것은 북한의 인권 문제를 환기시키고, 북한 정부를 압박해서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유진은 인권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 연구 결과에 매우 관심이 많다.

원래였다면 그 연구원은 지금으로부터도 한참 뒤에 모종의 루트를 통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될 사람이다.

그리고 미국의 의학 연구소에 취직한 그 연구원은 유진의 부친이 앞으로 당면하게 될 내분기계 질환에 대한 혁신적인 방법론을 내놓는다.

인체 실험이 아니라면 찾아내기 어려울 그의 지식은 의료계에 새로운 충격을 주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연구원은 미국에서 사회적, 재정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의 방법을 사용한 약품을 생산한 기업 또한 엄청난 이익을 보게 될 예정이다.

하나 아쉽게도 유진의 부친은 그 혜택을 보지 못했다. 임상시험에라도 참여할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한국인이 미국 의료 기관에서 실시 중인 임상시험에 참여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 삶에서 그건 유진에게 무척 깊은 회한이 되었기에, 이번에는 그 연구원을 직접 빼돌려 연구 성과를 손에 넣기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의 장인이 북한 정부의 고위 공직자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년 전 숙청 당했다고 합니다.”

존 브래넌은 1년 전 북한 지도부에서 벌어진 정치적 알력에 관해 설명했다.

친중파와 친러시아파 사이의 갈등에서 유발된 다툼 중에 적지 않은 고위 요인들이 실각하거나 목숨을 잃었단다.

그리고 연구원의 장인은 다툼에 패배한 파벌에 속해 있었던 모양이다.

“원래라면 그 연구원 또한 실각해서 정치 수용소에 갇혀 있어야 하지만, 그가 맡은 임무가 워낙 중요한 일인지라 차마 그런 사람까지 연좌제로 몰아 연구소에서 쫓아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인의 장남, 그러니까 연구원의 처남 하나가 청진 교화소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설마 처남을 교화소에서 빼내 달라는 겁니까?”

유진의 질문에 존이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요구라면 무엇이라도 들어줄 의사가 충분한 유진이었으나, 북한 내부 문제라면 사정이 다르다.

더군다나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교화소에 갇힌 사람을 빼내 달라니, 그건 유진의 능력을 한참 벗어난 일이다.

아니, 유진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처남과는 친분이 상당히 돈독한 모양이로군요?”

“그렇다고 합니다. 둘도 없는 친구라고 하더군요. 부인과 결혼한 것도 그 처남 때문이라고 하니까요.”

“청진 교화소에서 사람을 빼돌리는 것 말고는 다른 조건은 없습니까?”

“그 사람의 다른 가족으론 부인과 아들이 있는데, 평양에서 압록강을 넘어 어제 중국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그 외에는 달리 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존 브래넌은 이미 연구원이 요구한 조건 중 쉬운 쪽은 해결했다고 보고했다.

감시가 삼엄한 평양에서 사람을 빼돌리는 것이 어떻게 쉬운 쪽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해결이 되었다고 하니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었다.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 정말 끔찍한 사람이로군요. 그런데 그가 우리 쪽에 필요한 자료를 지금 가지고 있다고 하던가요?”

유진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가 장수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연구 중이던 연구 자료들이다.

물론 그 연구원만 넘어와도 도움이 되겠지만, 가능하다면 연구 중이던 자료들도 있는 쪽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예. 중요한 자료들을 메모리 카드에 넣어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그가 넘긴 자료의 일부를 확인했습니다. 틀림없더군요.”

존 브래넌의 말에 유진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북한의 교화소라니, 무척이나 골치 아픈 사안이다.

“어떻게든 해 봐야겠어요.”

하지만 유진에게는 꼭 필요한 자료였고, 꼭 필요한 사람이다.

“우리 쪽에서 해결할 방법은 없겠죠?”

만일 존 브래넌이 자기 손에서 처리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유진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을 알면서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북한 문제는 아무래도 한국과는 달라서 말입니다. 여기저기 도움이 필요합니다.”

“여기저기라면?”

“물론 랭글리가 필요하고, 제7함대, 그리고 러시아 국경수비대 정도겠군요.”

스케일이 너무 컸다. 한 사람을 빼돌리기 위해서 미국의 중앙정보부와 태평양 함대, 그리고 러시아 정부군까지 필요하다니. 이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란 말인가?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유진은 조금 어이가 없는 기분이다. 원래였다면, 그러니까 자신이 겪었던 미래에서는 이 정도로 거창한 조건이 필요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미국 정부에서 그를 위해 태평양 함대까지 움직이고 러시아 국경수비대를 동원했을 리는 없으니까.

아마도 지금보다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연구원의 처남이 정치 교화소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비슷한 일이 있고 난 뒤 연구원이 자발적으로 망명에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이번에는 유진이 너무 빨리 접근하는 바람에 그의 처남이 아직 살아 있는 상황이고, 연구원은 그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어진 듯했다.

“아마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물론 아까 말씀드린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지만요.”

“누구에게 무얼 부탁해야 할까요?”

대체 어떤 식의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기도 무서웠다.

하지만 협상에 필요하다면 알아 둘 것은 알아 두어야 했다.

“랭글리 쪽에는 이미 의사를 타진해 보았습니다. 위쪽에서 승인이 떨어지면 지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백악관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그리고 7함대의 이지스함이 동해 쪽으로 진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러 긴장을 유도한다는 건가요?”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존 브래넌이 잘라 말했다.

7함대의 함선이 동해든 서해든 들어서기만 하면 북한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과의 일대 긴장 관계가 시작된다.

거기에 따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또한 비슷하게 긴장하게 되니, 세계 강대국들 전부가 연관되는 대사건이 될 터였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필요하다면 들어주어야지.

다시 살고 나서는 처음으로 유진은 갑의 위치가 아니라 철저하게 상대의 요구를 수용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긴장을 유도하는 정도가 다입니까?”

북한 영해에 들어서는 일이라면 이지스함을 동원할 이유는 없다. 은밀한 행사에는 잠수함이 더 어울린다.

“예. 그쪽에서 소란스럽게 만들고, 북쪽 러시아 국경에서 다시 한번 소란을 만들 겁니다.”

일종의 성동격서의 수법이라고 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스케일이 너무 크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잡혀 있는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을 위해 미국과 러시아라고 하는 두 거대한 나라의 함대와 군을 사용한다니……. 더군다나 그가 뭔가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여하튼 그렇다면 이것도 백악관과 상의를 해야 했다. CIA를 움직이는 것과는 한참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될 것이다.

“러시아는…….”

“러시아 쪽 국경수비대는 이미 해결했습니다.”

존 브래넌이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비벼 뇌물로 해결했다는 뜻을 넌지시 비치며 웃었다.

“그거 다행이로군요.”

이때처럼 러시아의 부패에 감사해 본 적은 없다. 만일 돈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면 러시아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대통령의 당선을 돕기 위해 지금까지 해 온 노력들의 일부가 어이없게 쓰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얼마의 자금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최고였다.

그나저나 태평양 함대를 움직이는 데에 백악관과 논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려나?

* * *

“북한의 장수연구소에서는 북한의 지도자와 고위 공직자들의 건강을 위한 연구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범이나 일반 범죄자를 대상으로 하는 비 인륜적인 실험 또한 자행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다시 현재. 유진은 세 노인에게 장수연구소의 고위 연구원이 망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그 연구원이 지금까지 장수연구소에서 집행해 온 연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기록이 있다면 북한의 무도한 행위를 규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명분을 쌓아올리고.

“그런데 듣기로는 평양에서도 라파마이신에 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고 하더군요.”

“호오! 라파마이신이라고요?”

세 노인의 눈이 번뜩인다. 라파마이신은 신장 이식 환자의 장기 거부 반응을 예방하기 위해 투여하는 면역억제제의 일종이다.

그리고 엠토르(mTOR)라고 불리는 세포의 신호전달 물질에 관여하는 라파마이신이 수명 연장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미 20여 년 전에 밝혀졌다.

노화 방지에 큰 도움이 될 진전이었지만, 그 기전을 전부 파헤치지는 못해 아직 제대로 된 제품이 상용화되지는 않고 있다.

“네. 그쪽에서 꽤 광범위한 인체 실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적지 않은 결실도 보았고요.”

아주 까다로운 임상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미국과 달리 북한에서는 원한다면 수십만에 달하는 정치범들을 얼마든지 실험 대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과연 그렇군요.”

유진이 말을 꺼낼 때마다 세 노인은 지금까지 보기 어려운 총기를 드러내며 관심을 보였다.

유진은 이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백악관뿐 아니라 다른 정치인들의 도움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평양 함대가 동해안으로 들어가 북한은 물론이고 러시아와 중국까지 자극하는 데에는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했고, 북한의 인권 문제는 정치가들에게 있어 납득할 만한 명분이 될 것이다.

물론 명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미국에게, 혹은 정치인 개개인에 있어서 충분한 이익이 있어야 할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다행히도 그 연구원은 노인들이라면 누구라도 침을 흘릴 만한 아주 대단한 보물을 지니고 있었다.

이미 8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백악관의 현 주인이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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