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30화 (330/363)

330화 CBDC

“제가 생각한 것은 CBDC였습니다.”

“중앙은행 디지털 암호 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를 말하는 거로군요?”

일국의 대통령답게 룰라는 바로 알아들었다.

“네. 지금 브라질 중앙은행(Banco Central do Brasil)에서도 연구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브라질 중앙은행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국가의 금융 중심부에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중앙은행에서 현금을 발행하는 대신 전자 화폐를 사용하는 것은, 언제 도입하느냐의 문제지 반드시 다가올 미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디지털 화폐는 종이나 동전으로 된 화폐보다 아주 많은 장점이 있다.

우선 발행에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고, 결제 과정이 단순해짐에 따라 처리 속도가 향상되고 비용이 줄어들게 된다.

무엇보다도 현금을 쌓아 둘 수 없으니 모든 거래가 국가의 감시 아래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아주 커다란 이점이 있다.

모든 거래 상황을 정부가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다면, 범죄 수익이 발생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세금을 확충하는 것도 훨씬 쉬워진다.

선진국에서조차 매년 정부의 눈을 피해 오고 가는 탈세액이 어마어마하고, 개발도상국의 경우도 세금과 관련 없는 자금의 흐름이 오히려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 발행이 국가 세수에 얼마나 커다란 이익이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지금 사람들이 투기 대상으로 삼고 있는 암호 화폐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국가가 보장하는 화폐이기 때문에 가격의 변동이 크지도 않을 것이고, 거액의 상업 거래는 물론 마트의 껌 한 통을 사는 일까지 온갖 거래에 아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사실 그런 면에서 시중의 암호 화폐는 화폐로서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폐라면 그걸 통해 상품이나 서비스의 구매와 거래가 용이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암호 화폐는 아주 특정 분야에서만, 그것도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가격으로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가 통용되기 시작한다면, 현재의 암호 화폐들은 그 가치를 잃고 말 것이다.

“CBDC에 대해서는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경제 사정이 가장 큰 문제이지요.”

아르헨티나의 고질적 인플레이션과 브라질에 비해 너무 작은 경제 규모는 룰라가 구상 중인 남아메리카 공동 통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아르헨티나는 비록 경제적으로 큰 곤란을 겪고 있지만, 인플레이션만 억제할 수 있다면, 언제고 부국의 대열에 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브라질은 말 할 것도 없고요.”

“아르헨티나가 안정되는 것은 우리 브라질로서도 바라 마지않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남아메리카 공동 통화의 구축을 위해서는 우선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을 호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죠. 당장에 대단한 성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적어도 인플레이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전 아르헨티나에도 상당한 수준의 투자를 해 볼 생각입니다.”

“그건 굉장한 소식이로군요.”

“그리고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국의 경제 규모와 인구에 걸맞은 투자 계획을 세워 놓았습니다. 적어도 브라질에 투자하는 수준은 될 것 같습니다.”

남아메리카의 인구 중 절반은 브라질에 살고 있다.

브라질이 남아메리카에서 차지하는 면적도 그 정도이니, 브라질에 투자한다는 말은 남아메리카 전체에 투자한다는 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정말 굉장한 소식이로군요. 만일 그렇게 된다면 남아메리카 공동 통화도 그리 멀지만은 않겠군요.”

룰라의 말은 그저 수사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이상가로서 룰라는 자국은 물론이고 남아메리카 모든 인민의 삶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가 구상 중인 남아메리카 공동 통화는 남아메리카의 경제를 하나로 모아 4억 5천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경제 공동체를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물론 단순한 자본 투자로 끝낼 생각은 없습니다.”

유진은 선물 보따리를 아직 다 풀지 않았다.

“브라질에 생명 과학 연구·생산 단지를 유치한 것처럼, 다른 국가들에도 단순히 1차 산업이 아닌 미래를 위한 다양한 첨단 산업을 유치할 생각입니다. 농어업 산품이나, 지하자원만을 수출하는 것으로는 제대로 된 발전을 이룩할 수 없을 테니까요.”

남아메리카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물론 정부와 관료들의 부패였지만, 아직까지도 1차 산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최근 이십여 년 동안 남아메리카 각국은 이전보다 놀라울 만큼 큰 성장을 해 왔지만, 그 배경에는 중국이 빠르게 성장하며 필요로 하는 다양한 자원을 남아메리카에서 수입해 간 것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기간 동안 남아메리카 서민들은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저렴한 공산품을 부담 없이 소비할 수 있었다.

당장은 자원을 비싸게 팔고 소비재를 저렴하게 수입했으니 이득이라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기간 동안 남아메리카 각국은 자국의 공업이 성장할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즉, 20년 동안 남아메리카의 경제 규모는 성장했으나, 실상은 내실은 다지지 않고 미래를 포기한 행위였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국의 다양한 산업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심지어 세계 제일의 원유 보유국인 베네수엘라는 거의 파산하기 직전이었다.

풍부한 자원에만 의지하는 경제는 세계 경제의 부침(浮沈)에 쉽게 휘말리고, 한 번 좋지 않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여건이 마련되면 아까 말씀드렸던 CBDC를 구현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우선은 무역과 금융 기관 사이의 결제 부분에 한정된 것으로 시작하고요.”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쉽게 시작할 수 없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처음부터 전면적으로 시행할 경우 생기게 될 다양한 문제점들 때문에 쉽사리 시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진의 말처럼 국제 무역과 금융 기관의 결제 용도라면 우선 큰 혼란 없이 제도를 시행할 수 있다.

그리고 남아메리카 각국의 무역과 은행 간 거래를 각국 정부가 한눈에 파악하고 감시할 수 있어, 비용면에서나 세금 면에서도 적지 않은 이익이 생길 것이다.

“제도를 시행한다면 거기 필요한 기술과 자금은 제가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확실히 통이 크신 분이군요.”

물론 룰라도 유진이 공짜로 그런 비용과 기술을 내놓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투자가 성공적으로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시장의 투명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는 온갖 부패로 얼룩진 남아메리카 각국의 상거래 관행을 조금이나마 깨끗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유진이나 각국 정부에 있어서나 서로에게 도움이 될 일이다.

“이토록 좋은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남아메리카 각국의 정상들께서 조금은 바빠지실 것 같습니다.”

유진이 약속한 거액의 투자와 첨단 산업의 유치라는 두 개의 달콤한 선물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유진은 다른 헤지 펀드나 자산 운용사들처럼 국내 기업들과 분쟁을 벌이며, 자기 이익만을 챙겨 도망가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었다.

“다만 몇 가지 요청 사항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특별히 불법적인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수용하겠소이다.”

룰라 대통령은 이상주의자치고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이상을 위해서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인 모양이다.

그 때문에 집권 시기에도 그는 브라질 정계에 만연한 부패에 대해 그다지 엄격하게 적발하고 다스리지는 않았다.

부패와의 전쟁을 시작한다면 온통 거기에 국력이 집중되어 다른 개혁을 시작하지도 못할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그는 지난 정권에서 여러 차례 법적인 위기를 겪어야 했다. 부패에 너그러운 처사를 보인 집권자의 숙명이었다.

지금도 룰라는 유진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다면, 어느 정도는 선을 넘을 각오도 하고 있었다.

“제 동생이 암호 화폐 관련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유성도 세계적인 거물이시지요.”

공식적으로 세계 부자 랭킹 2위는 암호 화폐 시장을 지배하는 유성이다.

비록 상당수 거래소를 매각했지만,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거래소 몇 개와 암호 화폐 거래에 필수적인 얼라이언스 코인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유성이 업계에서 지닌 위상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브라질에서 최근 몇몇 암호 화폐에 대해 일반 결제를 허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리스트에 몇 가지 암호 화폐를 추가하는 것을 요청하고 싶군요.”

브라질은 세계에서도 가장 암호 화폐에 친화적인 나라로 손꼽힌다.

브라질 국민의 30% 가까이가 암호 화폐를 보유하고 있고, 브라질 정부 또한 이미 몇 년 전부터 암호 화폐의 시중 결제를 합법화했다.

다양한 암호 화폐 스타트업이 브라질에서 탄생하고 있었고, 미국계 자본이 들어와 브라질 헤알화를 기반으로 하는 암호 화폐를 만들기도 했다.

브라질을 포함한 남미 여러 나라들 또한 비슷하게 암호 화폐에 포용적인 정책을 하거나, 심지어 정부 차원에서 암호 화폐에 대해 투자를 하는 일도 있을 정도이다.

이는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들의 과도한 인플레이션과 쉽게 위기를 겪는 경제 상황, 그리고 부실한 은행 접근성 등 아주 많은 이유를 바탕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암호 화폐에 대해 일반 결제를 허용한 것은 룰라 대통령의 전 정부에서 시행한 일이지만, 룰라 또한 그 방침을 바꾸지 않고 있다.

물론 허용되는 암호 화폐는 전적으로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브라질 정계 인사들과 관련이 있거나 투자 중인 암호 화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추가로 허가를 받으려면 정계의 고위 인사의 연줄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면, 브라질의 대통령 같은.

“그건……. 물론이지요. 그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룰라는 유진의 요구가 너무나도 사소하다는 생각에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우선은 그렇습니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협상할 부분이 많겠지만, 무리한 요구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전 브라질의 발전이 제게 굉장한 이익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야말로 진정한 거래가 아니겠습니까?”

“상파울루까지 날아오신 게 헛되지 않게 해드려 다행입니다.”

“그건 오히려 내가 할 소리입니다. 뉴욕에서 상파울루까지 먼 길을 오셨는데 말입니다.”

룰라 대통령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는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대통령을 위한 연회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진은 언제나처럼 한국에서 공수한 재료로 함께 배를 타고 온 요리사가 정성껏 준비한 전통 요리와 함께, 브라질 전통 요리가 곁들여진 식탁을 준비했다.

연회 내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유진은 내친김에 얼큰하게 취한 대통령을 위해 특실까지 내주었다.

그렇게 브라질에서의 첫날밤은 아주 성공적으로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유진은 다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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