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31화 (331/363)

331화 누뱅크

“데이비드 벨레즈가 탄 헬리콥터가 도착하고 있습니다.”

오전에 다시 룰라 대통령과의 조식을 함께하고 그를 배웅한 뒤, 점심 무렵 다시 중요한 손님이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작년에 뉴욕에서 보고 벌써 1년만인가요?”

유진은 요트의 착륙장까지 나가 손님을 맞이했다.

브라질에서 제일가는 스타트업이고, 이제는 브라질뿐 아니라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금융기관의 수장을 만나는 것이니 그 정도의 예의는 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참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군요. 그런데 한 해 동안 변함이 하나도 없으시네요.”

“그렇죠. 벨레즈 씨도 변함없이 활기차 보이십니다.”

“오는 동안 헬기에서 내려보니 아주 멀리에서부터 배가 보이더군요. 그리고 가까워질수록 크기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배입니다. 몇 년 전 상파울루 항공모함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배보다 훨씬 커 보이네요.”

누뱅크의 데이비드 벨레즈 CEO는 유진의 초호화 요트를 둘러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 요트가 어지간한 초대형 크루즈보다 크고, 항공모함보다 비싸고, 미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브라질까지 항해해 온 등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지만, 배에 직접 올라 그 웅장한 모습을 보고 나니 더욱 감회가 깊은 모양이다.

“데이비드 회장도 이제 쓸만한 요트 하나 장만하셔야겠군요.”

유진은 브라질의 부자들이 여느 선진국 부호들 못지않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한 부자라면 헬리콥터나 요트는 필수적으로 구매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곳이었다.

“글쎄요. 아직은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서요. 하하.”

“이제 IPO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데이비드의 주머니에 요트 몇 척 정도 살 용돈은 언제나 넘쳐나게 될 겁니다.”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군요.”

데이비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유진에게 누뱅크의 IPO를 요청해 오고 있었다.

데이비드 자신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누뱅크에 출자한 브라질 재계 인사들의 부추김 때문이다.

사실 원래였다면 이미 몇 년 전에 누뱅크의 IPO가 이루어졌어야 한다.

유진의 지난 삶에서 누뱅크는 5년 전쯤 대략 500억 달러 정도의 평가를 받으며 뉴욕증권시장에 입성했다.

하지만 이번 삶에서 누뱅크의 상장은 최대 주주인 유진의 요구로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이미 몇 개의 금융기관을 통해 누뱅크의 지분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유진이 원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다른 주주들의 욕심을 채워 주기 위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지분은 시장의 평가 금액 이상으로 언제라도 매입해 주고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누뱅크의 평가 가치는 800억 달러 수준으로, 데이비드가 가지고 있는 5%의 지분은 대략 4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이다.

데이비드는 물론이고, 다른 세 사람의 창업자들과 여러 투자자들은 모두 누뱅크가 상장하는 것만으로 돈더미에 앉게 될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물론 당장이라도 유진에게 지분을 넘기면 원하는 만큼의 돈다발을 챙길 수 있겠지만, 다들 IPO를 하면 평가 가치 이상의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번에는 나도 늦출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예정대로 올해 말에는 뉴욕에서 상장하도록 합시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일행은 유진의 개인 객실에 딸린 응접실에 도착했다.

개인 객실이라곤 하지만 어지간한 저택의 응접실은 물론이고 대형 호텔의 로비에 버금갈 만큼 거대한 공간이 들어오는 손님들을 질리게 만든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작가들의 손길이 닿은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인테리어와 억 단위를 가볍게 호가하는 인상파 화가들의 진품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어 사람들의 기를 죽였다.

“저건 드가의 그림이로군요. 얼마 전 소더비에 나왔다는 뉴스를 본 적 있는데, 회장님께서 구매하신 거였군요?”

응접실로 들어서는 사람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어린 무용수가 바닥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림이다.

“운이 좋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드가의 진품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말이지요.”

“멋지군요. 르느와르에, 마네에…… 여기는 차라리 미술관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겠습니다.”

사실 유진은 고전파나 르네상스 미술보다는 현대 미술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다.

그 때문에 그의 맨해튼 저택을 장식하는 미술품들 상당수는 최근에 두각을 보이는 화가들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 응접실은 조금 다른 용도로 만들어졌다. 이 배에 오른 사람들, 그리고 이 응접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는 것이 목적이다.

사실 이 배조차도 그에게 있어서는 순전히 그러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수십억 달러라는 엄청난 거액을 써 가며 이 배를 건조한 것은 자신이 세상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부를 이룩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유진의 부는 달리 증명 따위가 필요 없을 정도이지만, 직접 눈으로 그걸 보며 느끼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이 배를 방문하는 손님이라면 상당수가 한 나라의 재계를 좌우할 정도의 거물들이다.

하나 이 배에는 그런 부자들도 기겁할 정도로 무서운 비용이 들어갔고, 응접실을 장식한 고가의 미술품들은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국립 박물관이 아닌 다음에야 비견되기 어려울 정도이다.

배와 미술품의 가치를 합치면 얼추 작은 나라의 한 해 국민 총생산을 가볍게 넘어설 것이다.

그런 돈을 1년에 몇 번 사용하지도 않을 행사에 쓰기 위해 아낌없이 지불할 사람은 세상에 유진 한 명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누뱅크의 성장은 대단히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이제는 브라질뿐 아니라 남아메리카 모든 나라를 석권할 준비가 된 것 같군요.”

응접실 한가운데, 걸작품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유진은 용건을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브라질의 금융계에는 누뱅크와 비견될 은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와 화려한 미술품에 압도되었던 데이비드는 일 이야기가 나오자 곧바로 진지한 비즈니스맨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누뱅크는 2014년에 설립된 핀테크 기업, 그러니까 온라인 금융 기업이다.

한국으로 치면 토스나 카카오뱅크처럼 오프라인 지점이 없이 오직 온라인으로만 서비스되는 은행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이러한 온라인 은행들이 커다란 성공을 거둔 이상으로 브라질의 누뱅크는 잭팟을 터트렸다.

이미 시장에서는 누뱅크의 기업 가치를 브라질의 정유업체이며 브라질 최대 기업인 페트로브라스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비싼 회사로 인정받고 있다.

브라질 유수의 은행들을 전부 제치고 얻어 낸 엄청난 성과이다.

기업 가치만으로는 브라질 금융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최대 은행 다섯 곳의 시가총액을 더한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핀테크 기업들이 속속 등장해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브라질의 누뱅크처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곳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뱅크가 다른 어떤 대단한 기술을 지니고 있거나, 혹은 대단한 발상을 한 것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온라인 은행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누뱅크가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데에는 브라질만의 특별한 상황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아메리카의 현실 때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 그리고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성인들 대부분이 몇 개나 되는 금융기관에 복수의 계좌를 개설해 이용하는 것은 상식이나 다름없다.

특히 한국 같은 경우 수십 개의 통장을 만들어 용도별로 계좌를 관리하는 사람도 종종 보일 정도이다.

하지만 남아메리카에서는 인구의 40% 가까이가 은행 계좌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단순하게 은행에 저축할 돈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은행 자체를 접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은행들은 대도시에 몰려 있고, 작은 도시라면 중심부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남아메리카 인구의 상당수는 은행에 한 번 방문하기 위해서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에 놓여 있어 저축을 위해 한 달에 한 번 은행을 찾는 일 따위는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크기와 인구를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누뱅크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이런 특성에 집중했다.

아직 계좌를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게 온라인만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굉장한 장점이 된다.

더군다나 오프라인 지점을 운영하지 않으니 기존 은행들보다 훨씬 적은 비용이 소모되고, 고용해야 하는 직원 또한 적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절감한 비용으로 은행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요금과 대출 수수료 등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었다.

더군다나 스마트폰 사용자의 확대가 누뱅크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컴퓨터의 보급은 여전히 형편없이 낮지만, 오지의 농민들조차 스마트폰을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시대에 기존 은행들은 누뱅크 같은 온라인 금융 기업들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 브라질을 방문한 목적은 당연히 데이비드 회장님과 만나는 게 가장 컸습니다.”

“저야 그저 반가울 따름이지요.”

“어제는 룰라 대통령을 만나 봤습니다. 앞으로 브라질에 투자할 것에 대해 논의를 했고요. 물론 누뱅크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룰라 대통령도 누뱅크가 브라질 국민들에게 질 좋은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무척 기꺼워하셨습니다.”

“저희도 브라질의 서민들이 손쉽게 다양한 금융 상품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그가 그렇게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만큼, 온라인 은행들은 브라질 사회에 굉장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금융 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당연히 삶의 모든 면에서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온다.

여윳돈을 편하게 저축해 놓고, 어려운 시기에는 적은 돈이나마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안정시키고, 더 나아가 발전시킬 기회를 제공했다.

더군다나 누뱅크는 기존의 금융기관들에 비해 월등히 저렴한 이자만을 요구한다. 엄청난 이자를 떼 가는 고리대금 같은 게 아니다.

“그리고 몇 가지 금융 정책에 대한 논의도 있었습니다. 특히 지난번에 말했던 암호화폐 도입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은행에서도 암호화폐를 취급하게 되는 겁니까?”

데이비드가 상당히 반색하며 물었다.

기존 은행들이 암호화폐를 대하는 자세는 화폐로서가 아니라 투자의 가치가 있는 상품으로서였다. 그러니 암호화폐를 취급하는 데에는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선은 얼라이언스 코인이나, 페이스 코인 같은 종류에 대해서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유진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투기성 상품으로서의 암호화폐가 아니라, 달러에 패깅되어 일정한 가치를 가지는 암호화폐에 대한 것이다.

금융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우려보다는 기대가 앞서는 것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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