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상파울루의 귀족들
“그럼 열심히들 논의해 보세요.”
데이비드와 저커버그가 협상을 거듭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유진은 이내 지루해져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두 사람은 어찌나 협상에 몰두했는지, 유진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각자 치열한 논리를 펼치며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말다툼을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머리가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욕심이 많은 것도 똑같다.
사실 대개의 성공한 창업자들은 비슷하다. 어떤 일이건 절대 양보하지 않고, 자기에게 최대한 유리한 조건을 상대에게 강제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런 욕심 없이는 세계적인 기업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전쟁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증거일 터이다.
특히나 이번처럼 거대한 먹거리가 눈앞에 보인다면 더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다.
작게는 브라질을 포함한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현금 대신 사용할 수 있는 암호화폐라는 니치 시장의 공략이지만, 시야를 넓히면 언제고 각국의 통화를 대처할 수도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계획의 첫걸음이다.
이 협상에서 아주 작은 양보라도 얻어 낸다면 실질적으로 얻는 이익이 얼마나 클지는 누구도 섣불리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상파울루 항구는 무척 아름답군요.”
유진이 응접실을 나와 갑판으로 가니, 유성이 처음 보는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갑판 위에서는 유진과 함께 브라질까지의 항해에 동참한 사람들과 그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상파울루 현지의 저명한 사람들을 위한 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연회를 위한 초대장을 만들기 위해 모니카와 그녀의 팀원들은 상당히 곤욕을 치렀다.
유진을 비롯해 적지 않은 미국과 한국의 저명인사들이 방문한 것을 안 아주 많은 브라질 인들이 어떻게든 이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다양한 루트로 로비를 해 왔기 때문이다.
하기야 유진은 말할 것도 없고, 마크 저커버그나, 월가의 저명한 투자자들, 그리고 한 무리의 할리우드 스타와 뮤직 아티스트들, 그리고 스포츠 스타들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연회라면 누구나 참여하길 원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 아무나 참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한 브라질의 치안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자칫 위험한 일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배에 오른다면, 아무리 백악관 경호실 출신의 경호원들이 엄중하게 지키고 있다 해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야 없을 터이다.
그렇기에 모니카는 매우 신중하게 초대할 사람들을 선택해야 했다. 적어도 신분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 배에 오르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온통 부자들이나 축구 선수와 모델들만 초대할 수도 없었다.
유진이 가능하면 다양한 분야의 브라질인들과 접할 기회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모니카는 유진의 요구를 만족시키면서도 경호팀의 안전 수칙에 부합하는 사람들을 선별해 초대장을 보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와중에 존 브래넌을 통해 해당 인원들의 신변에 대한 정보는 모두 확인을 마친 후였다.
유진이 갑판으로 나오자, 연회장의 모든 사람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 연회의 주인이며, 세계 경제계에 있어 황제와도 같은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니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할 뿐, 우르르 몰려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니만큼, 촌스러운 행동으로 눈살을 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대신 모니카가 유진을 이끌고 가장 먼저 만나야 할 중요한 사람들에게 안내했다.
“이쪽은 로베르토 마르케스 회장님입니다.”
“반갑습니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여기까지 불러 주셔서 고마울 뿐이지요.”
“이쪽은 장 제레이사티 암베브 최고 경영자이십니다.”
“드디어 대주주님을 뵙는군요.”
“장과는 몇 번 통화를 나누어 보았지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군요.”
연회에는 상파울루에 본사를 두고 있는 세계적인 기업들의 수장도 함께하고 있었다.
영국의 더바디샵, 에이본, 호주의 이솝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들을 소유하고 있는 국제적인 화장품 그룹인 나투라의 회장과 코로나, 버드와이저, 스텔라, 엔하이져부쉬 등 유명한 맥주 브랜드를 소유한 암베브 그룹의 회장을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두 기업 모두 유진이 적지 않은 지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암베브는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대 양조업체의 위치에 있는 글로벌 기업이고, 나투라 또한 화장품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대기업이다.
유진은 두 글로벌 기업의 회장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으로도 두 기업의 행보에 변함없는 지지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
유진이 알기로 두 기업 모두 한동안 큰 부침 없이 각자의 분야에서 적당한 성과를 이어갈 것이다.
특히 코로나가 끝난 지금에는 화장품 업계나 양조 업계 모두 한동안의 침체를 넘어 매년 새롭게 수익을 경신하고 있었다.
당분간은 두 기업의 지분을 정리할 일도, 두 기업의 행보에 관여할 생각도 없었다.
그 두 사람 이후로는 주로 브라질 현지에서 영향력을 지닌 부자들과의 만남이 이어졌다.
주로 은행이나 광산, 혹은 거대한 농장을 운영하는 이들로, 이들이야말로 브라질의 실질적인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대귀족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만나 그리 중요할 것 없는 사교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때때로 유성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재미있게도 동생은 아까의 그 여인 곁에서 한 번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유성 또한 적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을 이어 가고 있었는데, 그녀가 늘 곁에 있다는 것을 보면 꽤 호감이 있는 모양이다.
“마리아 바스콘셀로스는 바스콘셀로스 가문의 상속녀입니다.”
유진이 동생에게 신경 쓰는 것을 눈치챈 모니카가 넌지시 유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여인의 정체에 대해 알려 주었다.
“바스콘셀로스 가문이면, 그 광산 재벌이었던가?”
“광산업을 기반으로 다양한 기업 집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은행도 소유하고 있고요. 브라질 기업 집단 순위 5위에서 7위 사이를 오가는 전통 있는 가문이지요.”
“상속녀라니, 남자 형제는 없고?”
“오빠 한 명과 남동생이 있었습니다만, 오빠는 몇 년 전 총기 사고로 사망했고, 동생은 아직 미성년자입니다.”
직접 초대 인원을 선별한 만큼, 모니카는 여인의 가문에 대한 정보도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바스콘셀로스 가문의 평판은 어떤가?”
“뭐. 여느 브라질 부자 가족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모니카가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렇군. 저 마리아라는 여인은?”
“제법 능력 있는 경영자인 모양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유통 그룹에 들어가 빠르게 승진해 지금은 상파울루주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합니다.”
브라질의 부자들도 한국의 재벌 가문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가문에서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가 평민과는 다른 속도로 승진해 서른이 되기 전에 임원급이 되고, 서른이 넘으면 자회사 하나쯤을 책임지게 된다.
거기서 다시 실적을 쌓고 나면 주력 기업의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후계 수업을 착실히 쌓아가다가 언젠가 자리를 물려받게 되는 식이다.
“그녀 부친의 건강이 크게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이른 시간 내로 그녀에게 경영권이 넘어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너무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군. 아직 한창 즐기며 놀 나이일 텐데.”
“맞아요. 올해 스물다섯이니 대기업을 책임지기에는 너무 어리지요.”
“스물다섯?”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유진은 살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나이보다 훨씬 더 조숙해 보이는 것이 당연했었다.
“그런데 유성은 알고 있나?”
스물 다섯이면 거의 띠동갑이 아니던가? 만일 한국이었다면 조금은 문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음, 글쎄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모니카 머리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니. 특별히 문제까지는. 하기는 지난번에 만나던 여자도 비슷했었지?”
“지난번이면 하퍼 양이었던가요? 확실히 스물여섯이었으니 비슷하기는 하군요.”
“뭐. 알아서 하겠지. 무슨 상관이야.”
유진은 거기서 동생에 관한 관심을 돌려 버렸다. 다 큰 어른도 넘어 이제 일가를 이룬 녀석의 연애에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동생이 브라질에 도착하고 이렇게까지 빠르게 호감을 보이는 여자가 생긴 것이 재미있었을 따름이다.
한데 다시 사람들을 만나며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인가 유성과 그리 멀지 않은 자리까지 오게 되었고, 원치 않았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 왔다.
“유성 씨는 지금까지 꽤 많은 여자와 연애를 했는데, 어째서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건가요?”
초면에 하기에는 꽤 직선적인 질문이다. 어쩌면 브라질의 문화가 그런 것이리라. 아니면 저 여인이 남다른 것이거나.
“미국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과 꽤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이어 갔었지요. 그때는 아마 틀림없이 결혼으로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두 사람이 살아온 배경이나 생각이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만남의 시간이 길어지며 갈등이 생겨나고, 다툼으로 이어지고, 그러다가 결국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죠.”
유성이 차분하게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말하는 동안, 마리아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뒤에야 난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무례하고, 모질었다는 사실까지도요. 하지만 너무 늦어 버린 뒤였죠.”
“아! 그럼 아직도 그녀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한 건가요?”
“물론 애정은 아직 남아 있어요. 그렇지만 그게 다시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종류의 것은 아니에요.”
“하긴 그렇죠. 모두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거니까요.”
마리아는 유성의 대답에 마음이 놓인 표정이었다.
“그 뒤로 다시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싸우고 헤어지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을 반복해 왔죠. 그러다 보니 어쩌면 난 여전히 어느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완전하게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알아요. 이해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 상대에 대한 존중이겠지요.”
“맞아요. 서로를 존중하지 못하는 사이의 관계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지요.”
맞장구를 쳐 주는 마리아를 보며 유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스스로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내가 다른 누군가를 그렇게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말이에요. 아마 어쩌면 너무 늦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니에요. 세상에 너무 늦은 건 없어요. 우리 아빠도 마흔이 넘어서 엄마를 만났고, 그때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럴까요?”
“물론이지요.”
그렇게 대답하며 마리아는 유성이 들고 있는 맥주병에 자신의 병을 가볍게 부딪쳤다.
두 사람은 각자가 들고 있는 병을 깨끗하게 비워 버리고, 다시 저쪽의 누군가를 향해 자리를 옮겼다.
“꽤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자 모니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