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야망 있는 여자
“어울리나? 무슨 곰하고 미녀하고 함께 있는 거 같지 않아?”
“곰은 좀 너무했네요. 키가 크고, 근육이 많아서 그렇지 둔해 보이는 건 아닌데요.”
“뭐. 운동은 열심히 하니까.”
미국에 와서 경호원들의 체구를 보고 시작한 운동이 10년 동안 꾸준히 이어져 왔기에, 유성의 몸은 비즈니스맨이라기보다는 온종일 짐에 사는 헬창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저 녀석이 그렇게 대단한 사랑을 했었던가?”
생각해 보니 유성이 지금 한 말들을 형인 유진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도 털어놓는 속내를 자신에게는 한 적 없다는 것이 어쩐지 조금 서운하려고 한다.
“아, 그거요? 새로 여자를 만날 때면 늘 하는 말 같던데요?”
모니카가 웃으며 말했다.
“늘?”
“아마도요. 쿡!”
모니카는 웃음을 참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냥 자주 사용하는 꾸며 낸 멘트 같은 거야?”
“비슷하지 않을까요? 제법 잘 먹히는 거 같더라고요.”
“아…….”
유진은 동생이 이젠 더 이상 그 순박하기만 한 곰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굳이 그런 멘트 같은 게 필요한가?”
세계에서 두 번째 부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라는 소리는 차마 나오지 않았다.
사실 그것 말고도 유성의 튼실한 거구는 한국에서라면 몰라도 미국이나 라틴 쪽에서는 제법 수요가 있는 듯했다. 적어도 남성미가 풍긴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유성은 동양인의 가장 큰 약점인 가냘픈 신체를 극복해 백인 머슬러나 흑인 머슬러에게도 절대 뒤지지 않을 훌륭한 몸집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 로맨틱하게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음…… 그러려나?”
유진은 동생이 결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원인은 다름 아닌 유성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부 때문이다.
미국의 결혼 제도 아래에서는 자칫 결혼 한 번 잘못하는 것만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는 한다.
파국으로 끝난 제프 베이조스나 빌 게이츠의 경우를 유성은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물론 결혼 계약이라는 방패가 있기는 하지만, 골치 아픈 상황에 부딪히게 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차라리 혼자인 편이 속 편하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유진으로서야 동생이라도 가족을 꾸렸으면 하는 속내가 있었지만, 딱히 그걸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언제고 진정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쪽은 방코 산탄데르 리오의 파올로 콤팡 씨입니다.”
모니카가 이번에는 아르헨티나의 유력 가문 인사를 소개해 주었기에, 유진은 동생을 향한 관심을 접고 다시 사교 활동에 열중했다.
“손님 중 한 명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입니다. 몸을 가누지 못해 객실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수많은 사람과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모니카가 다가와서 보고했다.
“손님이라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대개 격식을 차리는 사람들인 만큼, 이런 자리에서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더군다나 평범한 사교 자리도 아니고 미국에서 온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이니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격식을 차리는 사람들이라고 알콜 중독자가 없으리라는 법도 없고, 더군다나 정열적인 라틴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빠올로라는 남자입니다.”
“뭐 하는 사람이지?”
“브라질의 촉망 받는 작가라고 알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 문단에 데뷔해서 민중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소위 사회주의적 스릴러 작가라고 합니다. 아마존 유역의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을 통해 민중들이 부자들에게 고통 받는 모습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더군요.”
“재미있는 친구로군. 술이 깨면 한번 만나 보도록 하지. 어쨌든 잘했어.”
이 거대한 요트에는 백 단위의 객실이 마련되어 있다.
미국에서 함께 온 손님들이 사용하는 객실을 제외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객실이 충분해, 술 취한 손님 몇 명 정도야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유진의 바람은 생각처럼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 촉망받는 젊은 작가는 연회가 끝날 때까지 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그때 즈음 이미 유진은 빠올로라는 남자의 일을 머리에서 지워 버렸다.
점심 무렵에 시작한 연회는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끝이 났고, 유진은 평소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은 일부러 일정을 여유롭게 잡아 두었다. 전날의 연회가 꽤 요란스러울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날의 연회에서 정말 고생할 사람은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유진 자신이 아니라 연회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모니카의 팀원들이니, 그들을 위해서라도 여유를 줄 필요는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방을 나선 유진은 즐거운 표정으로 갑판에서 내려오는 동생을 발견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어? 아. 지금 막 마리아를 보내 주고 왔거든.”
“마리아? 마리아 바스콘셀로스?”
“알고 있었네?”
“어제 종일 둘이 같이 붙어 있었는데 모를 수야 있나. 어때? 좋은 시간 보냈어?”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유진은 마리아가 밤사이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꽤 재미있는 사람이야.”
“재미있다고?”
“마리아는 룰라 대통령을 지지한대.”
“와우! 그거 대단한데? 진짜로 재미있는데?”
룰라 대통령의 지지자라는 말에 유진도 동생의 재미있다는 표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브라질의 특권 계급이 룰라를 지지한다는 것은 한국에서 재벌 가문 후계자가 좌파 정당의 후계자를 지지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일이다.
“맞아. 자라온 환경이 특출난 데 비해서는 상당히 열려 있는 생각을 지니고 있더라고.”
“열려 있다라? 단지 룰라를 지지하는 거 이상이라는 말 같네?”
“그래. 지금의 브라질 사회가 아직은 경직되어 있고, 자신 같은 부자들이 가진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거야. 더군다나 더 나아가서 브라질 국민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는 아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더군.”
“그건 굉장한데?”
유진은 남아메리카의 부유층이 다른 나라, 그러니까 아시아나 미국과 그 층위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부자들 대개는 전쟁 이후 독립한 신흥국가의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닌 특권층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을 특별한 권력을 지닌 부유층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귀족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에 비해 남아메리카의 특권층들은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수백 년간 정당을 장악하거나 직접 공직을 맡는 방식으로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행사해 오고 있는 진짜 귀족들이라 할 수 있다.
대개는 유럽, 특히 스페인 혈통으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비슷한 혈통을 지닌 사람들과 결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목장이나 농장의 형태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대량의 일차 산업 상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것으로 막대한 부를 쌓고 있다.
브라질의 경우도 그러한 대농장 지주들이 브라질 국토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일반 국민들과는 사뭇 다른 사고를 지니고 있다.
이미 한 세기도 더 지난 예전 유럽 귀족들이 지니고 있던, 자신들은 평민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그런 특권 의식 말이다.
한데 마리아라는 여인은 그런 특권 의식을 부정하고 있다고 한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지는 모르지만, 흥미 있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이야기하다 보니 꽤 여러 가지 구체적인 생각도 갖고 있는 것 같더라고.”
“구체적이라?”
“부친의 기업을 물려받으면 당장은 종업원들 대우부터 바꿀 생각이래. 적어도 지금까지처럼 저임금으로는 종사자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어렵다는 거지.”
“그렇지만 그래서야 기업의 운영이 어려울 텐데? 경쟁력을 잃게 되면 이윤을 낼 수 없을 걸 알고는 있는 거지?”
좋은 경영자는 없다. 적어도 사업에 성공한 좋은 경영자는 드물다. 그건 수많은 기업에 투자해 온 유진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기업을 이끄는 리더는 국가나 다른 사회 단체를 이끄는 리더와는 전혀 다르다.
기업의 목적은 철저하게 이윤 추구에 있어야 한다. 만일 그 첫 번째 목표를 포기한다면 치열한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지금은 수많은 사회 복지 사업을 하고 있는 빌 게이츠도, 막상 자신이 마이크로소프트를 이끌어 갈 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형적인 독재적 기업가였다.
“물론 알고 있더라. 그리고 조금 다른 욕망도 있는 것 같고.”
“어떤?”
“정치적인 것 말이야.”
유성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아. 그러네. 뭐, 이상할 것도 없지.”
어느 나라이건 어느 정도의 부를 쌓은 뒤 정치적인 야심을 드러내는 일은 그리 드물지도 않다.
“그러니까 뿌리 깊은 귀족 집안이면서도 민중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겠다는 거지?”
“그럴 생각인가 봐. 그래서 룰라 대통령에게 후원해 가며 그의 관심을 살 생각인 듯해. 사실 노동자당으로서도 나쁠 거야 없지. 젊고 유능하면서도 전통적인 부유층 가문의 여자가 후원하고, 그녀가 이끄는 기업이 노동자 친화적 정책에 앞장선다면, 프로파간다로 사용하기 제격이잖아?”
“하기는 지금의 노동자당 정치인들의 배경이 대개 천편일률적이니까.”
노동자당의 리더인 룰라 대통령은 금속 노동자 출신이고, 룰라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올랐다가 탄핵당했던 지우마 호세프는 반정부 게릴라 출신이다.
노동자당의 지도부가 대개 과격한 투쟁주의자 출신이라는 사실은 물론 정치적으로 통일된 길을 가기에 좋은 조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지난 2010년 중반 이후 노동자당이 사법부의 공격에 고난의 시기를 보낸 것도 그런 약점을 극복하지 못해서였다.
“이제 겨우 20대 중반치고는 꽤 대단한 야망을 지니고 있지?”
“최종적으론 대통령을 원한다는 거지?”
“콕 집어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그런 뉘앙스였어.”
“그래서 넌 마리아를 지지할 생각이고?”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냥 재미있는 여자라는 거지, 무슨 앞날을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래. 여하튼 잘해 봐라.”
아쉽게도 유진의 기억 속에 그녀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았다.
브라질의 대통령이 되었다면 조금이나마 머릿속에 넣어 두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녀의 야망은 그저 야망으로 끝나고 말았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생의 행보에 영향을 줄 생각은 없다. 유진이 지닌 미래의 정보를 활용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그리는 그림을 위해서였지, 동생의 삶에까지 감 놔라 배 놔라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두 사람은 함께 식당으로 가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다. 그때 즈음 모니카도 유진을 찾아와 함께 자리했다.
“참! 어제의 그 젊은 작가는 어떻게 되었지?”
“아침 무렵에 괜찮아졌다가, 술을 깬다고 하더니 자리에 나온 포도주를 몇 병이나 비우고 다시 쓰러졌다네요.”
모니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