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세상의 종말
“만일 다음번에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어쩌면 인간 세상의 종말이 될지도 몰라.”
셰넌과 옐리자베타의 미래에 대한 불길한 우려를 듣고 있던 유성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요.”
“그런 일은 결코 없어야 하는데요.”
셰넌과 옐리자베타는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바라보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아마도 지금의 대화처럼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서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조국이 원인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러시아나 중국이 패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세상은 늘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할 거야.”
셰넌과 옐리자베타의 대화를 듣던 모니카가 짓궂은 말을 던졌다.
“러시아도 중국도 지난 두 차례 세계대전의 일방적인 피해자였었다고요.”
“맞아요. 언제나 세상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은 것은 서방 세계였었지요.”
모니카의 말에 셰넌과 옐리자베타가 합심해 한마디씩 한다.
“맞는 말이야. 적어도 20세기 이후 벌어진 수많은 끔찍한 사건의 배경에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
모니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두 여자의 말을 수긍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세계 정세의 불안 요인을 서구 세계로만 몰아가기에는 소위 말하는 그 서구 세계의 힘이나 영향력이 그다지 대단치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영국이든 프랑스든 독일이든, 아니 세 나라의 군사력을 합쳐도 러시아나 중국에 대항할 수 없을 거야.”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적인 긴장감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은 주변 국가들과의 갈등을 내부의 사회문제를 덮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며 점점 더 큰 불안을 가중시키는 중이다.
러시아가 힘을 행사하려는 곳은 비단 우크라이나만이 아니라, 핀란드에서 터키까지 이르는 동부 국경 지역 전부였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다. 이미 북동쪽의 러시아에서부터, 국경과 해협으로 접하고 있는 동아시아 모든 국가와 쉴새 없이 긴장 상태를 만들어 왔으니까.
이러한 우려대로 앞으로 인류는 정말 거대한 전쟁에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인류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비극보다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될 것이다.
이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세계 강대국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전쟁에 휩쓸려 끔찍한 비극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유진은 지난 삶에서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미래의 어느 날 CNN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전쟁의 참사를 굳은 얼굴로 지켜보던 기억을 떠올렸다.
* * *
[기어이 중동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새벽, 이란군이 이라크 국경을 넘었습니다. 지난 1980년 이라크군이 이란 국경을 기습적으로 넘어 발발했던 이란-이라크 전쟁이후 50여 년 만의 일입니다. 당시 8년여에 걸친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양국에서 2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었습니다. 이번 전쟁으로 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나올지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국제 사회는 전쟁 발발 당사국인 이란에 대해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란군에 이라크로부터 물러나지 않을 경우 국제 제재를 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최근 들어 불안해지는 중동 지역 정세로 인해 유가가 끝도 없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미 2008년 기록한 최고치인 150달러를 넘어 200달러 가까이 오르고 있습니다. 전쟁이 조기 종결되지 않는다면 유가 상승의 여파가 전 세계 경제에 미칠 것이 확실한 상황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이란에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1주일 안으로 이라크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국제 연합군이 이라크를 돕기 위해 참전한다는 내용입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한 10여 개 국가의 연합군이 이란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이에 러시아 외무부는 서방 세계에 대해 경고를 보냈습니다. 서방 국가들이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에 참전한다면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다는 의사로 보입니다.]
[미 해군 제5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으로 진입했습니다. 이로써 미국의 참전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러시아 연방군이 카스피해를 통해 이란에 상륙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러시아군과 미군의 무력 대결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암울한 예견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유가 상승을 불러왔고, 아직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빠른 시간 내에 전쟁을 종식하고 유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한편 유가 상승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나라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가 이란을 공격하는 것에 반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미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국제 사회의 이란에 대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이란에 무기를 공급해 오던 러시아는 이란 정권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부정했으나 이란의 핵 개발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도 러시아였고,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적지 않은 경제 협력 관계를 이어 왔다.
만일 이란이 서구 세계 연합군에 의해 전쟁에서 패배하고, 친서방 정권이 탄생한다면 러시아로서는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사실상 러시아로서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다고 봐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연합군과 러시아군은 절대 마주 부딪치지는 않으려 노력했다.
구 세력의 직접적인 부딪침이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은 이란군이 빠른 속도로 이라크를 완전히 정벌하도록 도움을 주려 했고, 미군을 비롯한 서구 연합군은 이란의 주요 군사 시설을 폭격하는 것으로 그런 야욕을 좌절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느닷없이 중국이 야욕을 드러냈다.
[중국 해군이 대만 해협으로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대만 당국은 군에 비상령을 내리고 중국군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에서 미군이 러시아와 부딪칠 상황에 놓이자, 중국은 미국이 대륙의 양쪽에서 한 번에 두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 하에 전격적으로 대만에 대한 침공을 시작했다.
당장 미국과 서구 세계 그리고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에 위험한 행동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보냈지만, 이미 계산이 끝난 중국이 멈출 이유는 없었다.
[미 국무부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군이 최선을 다해 대만을 방어하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대만해협에서 중국 해군과 대만 해군 사이의 해전이 발생했습니다.]
중동에 이어 다시 동아시아에서도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전쟁은 중동에서의 전쟁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던 한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육군 일부가 대만에 상륙함에 따라 한국군과 일본군의 참전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긴급대응군이 대만에 상륙했습니다. 중국은 한국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일본 자위대가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중국 인민군 해군과 대치 중에 있습니다.]
그렇게 세 번째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중동 국가들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와 중국, 한국, 일본, 대만이 참전한 전쟁을 세계대전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온 세상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번 전쟁은 단순히 국지전으로 끝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예측 속에 전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 가운데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의 숫자만 여섯 국가에 달한다.
이들 중 어느 한 나라라도 핵무기의 사용을 시작하면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것이 자명했다.
이미 몇 년 전 시베리아 침공 당시 핵무기가 사용된 바 있어, 이러한 우려는 단순한 기우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 * *
“다시 한번 세계적인 전쟁이 일어난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정말 핵무기 사용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잖아요.”
셰넌 리와 옐리자베타는 자신들의 조국들이 다가올 그 전쟁에서 얼마나 끔찍한 결과와 직면해야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형 생각에는 정말 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질 것 같아?”
유성이 묻자, 사람들의 눈길이 대번 유진에게 모였다.
“그걸 누가 알겠니? 당장 급박한 상황에 처한 것도 아니고, 언제 일어날지도 모를 전쟁을 예측하는 게 가능할 거 같아?”
“아니. 그래도 형이라면 뭔가…….”
유성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글쎄, 나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네.”
그건 솔직한 대답이었다. 유진의 개입으로 인해 세계 정세는 아주 많이 바뀌었다.
더군다나 세계의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정상들과는 이제 꽤 말이 통하는 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전쟁이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도 없다.
전쟁의 발발이란 것은 원래 예기치 못한 원인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렇지만 굳이 예측을 해 보라고 한다면, 유진은 그 전쟁이 언젠간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쪽에 좀 더 무게를 둘 것 같다.
유진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여전히 경제적인 부분에 한정되어 있고, 세상일은 생각보다 경제 이외의 것들이 더 큰 힘을 발휘하고는 한다는 사실을 유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런 전쟁이 벌어지면 적어도 미국 본토는 안전하겠지요?”
“전면적인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그렇지 않겠어?”
“설마 핵전쟁까지야 가겠어?”
글자 그대로 핵무기가 사용된 전쟁이라는 의미에서의 핵전쟁이라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적어도 유진의 기억에는 그랬다.
2차 세계대전의 말기에 미국이 사용한 두 발의 폭발 이후로 전쟁에서 핵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전쟁 중인 두 국가가 핵무기를 사용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폭탄은 사용된다. 시베리아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가 테러로 위장해 터트렸던 것처럼, 핵무기를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테러의 형태로 사용하는 것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벌어진다.
그리고 그 폭발의 희생자들은 끝내 미국에서도 나온다.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때부터 세상은 미국의 분노를 마주해야 했다.
이번 생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생각하는 것처럼 미국 본토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리라는 신화는 허상에 불과하다.
“그래도 여기 남아메리카는 그런 전쟁으로부터 제일 안전할 거 같아.”
“그러니까. 여기 사람들은 다들 여유가 있어 보이더라고.”
유진과 달리 경호원을 대동하고 상파울루 항에 내려 열정적인 브라질 국민들을 접하고 돌아온 두 사람은 브라질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듯했다.
“그러고 보면 브라질이나 남미에서는 그런 전쟁 같은 것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그녀들의 말처럼 브라질이 마지막으로 전쟁을 수행한 것은 이미 200년 전의 일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는 했지만, 브라질이 주체적으로 전쟁을 수행한 것은 아주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셰넌과 옐리자베타의 말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다가오는 세 번째 세계대전에서도 브라질을 비롯한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는 그 참혹한 전쟁에 멀리 물러서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남아메리카 대륙이 안전한 곳이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안 좋은 소식입니다. 바이아주 사우바도르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무장한 반정부 시위대가 총격을 벌였다는군요.”
모니카가 새로운 소식을 전해 왔다. 아마도 브라질의 평화는 쉽게 오지 않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