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공산당과 지주
“브라질의 혼란이 점점 가중되고 있습니다. 반정부 시위대가 이번처럼 총기를 사용한 적은 처음이니까요. 어쩌면 투자에 대해 재고해 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뉴욕에서 날아온 윌리엄이 브라질을 비롯한 남아메리카에 대한 대대적 투자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투자에 대한 약속이 나온 이후 브라질의 상황은 오히려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정작 투자가 실행되고 나서 브라질 경제가 고꾸라질 우려도 있습니다.”
물론 윌리엄의 개인적인 의견은 아니다. 유진의 씽크탱크에는 세계적인 경제학자들이 대학교 몇 개를 만들고도 남을 만큼 우글거렸고, 그들은 유진의 투자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수시로 의견을 내놓는다.
“그럼에도 브라질이 매력적인 나라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맞습니다. 정치 상황만 안정된다면, 여느 선진국 못지않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곳이지요. 하지만…….”
늘 ‘하지만’이 붙어 있는 곳이 바로 이 남아메리카이다.
4억 5천만에 달하는 인구, 풍족한 자연환경, 세계 각국에 제공하고 있는 다양한 천연자원과 농산물들.
그런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여전히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정치 문제였다. 남아메리카 각국의 정치 상황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래로 200여 년 동안 혼란 그 자체이다.
부패한 관료들과 언제라도 정권을 찬탈하려 눈을 부라리고 있는 군부, 국가 자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의 부유층과 농민들 사이에서 암약하고 있는 좌익 게릴라 세력들이 어우러져 사회를 더욱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다.
브라질은 만일 사회가 안정된다면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 대국까지도 노려볼 법하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혼돈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 유진이 사상 초유의 투자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브라질에 있어서 둘도 없는 기회가 될 것이나, 한편에서는 여전히 미국 자본의 투자가 국부를 유출하고 말 것이라는 반대 논리로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제 총기 발사까지 일어났으니 브라질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 틀림없다.
“보스가 브라질에 도착한 이후로 브라질 주가지수는 30% 이상 하락했습니다. 그나마 며칠 전 투자를 다시 확인하며 회복한 수치지요. 하나 오늘의 총격 사건으로 주식 시장은 다시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당연한 반응이겠죠.”
“문제는 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브라질 사회의 갈등이 좀처럼 봉합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점점 더 갈등이 커지고만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 대한 투자와 달리 남아메리카에 대한 투자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네요. 쉽지는 않군요.”
유진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요트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고, 브라질의 주가가 폭락한 뒤로 유진이 보유한 투자 기관들은 은밀하게 브라질 기업들의 주식을 매입해 왔다.
어차피 유진이 다시 투자에 대한 신뢰를 주면 오르게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쓸 만한 기업들의 주식을 매입하면 확실하게 큰 수익을 올릴 기회라는 생각이었다.
유진이 한동안 요트에서 두문불출하며 조용히 지낸 것도, 주가가 떨어질 만큼 떨어지기를 바란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그 계획은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으로만 보였다.
유진이 투자에 대해 변함이 없다고 인터뷰한 이래로 주가는 다시 폭등을 시작했으니까.
그런데 사우바도르에서의 총격 사건으로 주식 시장이 다시 얼어붙어 버렸다.
물론 다시 유진이 나서서 투자를 확신하고, 룰라 대통령과 사진 몇 장 찍으며 상파울루의 의약단지를 시찰하면 시장이 다시 반응하겠지만, 윌리엄의 말처럼 결코 쉬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어차피 길게 보고 있으니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유진의 마음이 바뀐 것은 아니다. 브라질을 비롯한 남아메리카를 한국에 이어 자신의 두 번째 든든한 배후지로 만들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윌리엄은 유진을 설득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것으로 족했다.
“기왕 왔으면 며칠 휴가라도 즐기도록 해요. 브라질의 해안은 아주 멋지더군요.”
비록 직접 해변을 걸어 보지는 못했지만, 상파울루 앞바다에서 바라보는 경관만으로도 충분히 칭찬할 만했다.
“그러도록 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이쪽 사람들과 만날 약속이 있었습니다.”
요안나도 그렇지만, 윌리엄도 어지간한 일벌레였다. 도대체 휴가와 비즈니스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윌리엄과 면담이 끝나자 이번에는 존 브래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보고해야 할 것이 있다는 소식이었다.
“빠올로라는 사내에 대한 일입니다.”
“빠올로? 아! 그 사회주의적 스릴러 작가 말인가요? 그날 파티에서 술에 취해 여기서 자고 갔었지요?”
“맞습니다. 다음날도 술을 잔뜩 마시고는 다시 객실을 차지하고 이틀 뒤에 돌아갔습니다.”
“그 젊은 작가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다소 의외의 이름이 언급되자 유진이 물었다.
“예. 그때 테러리스트의 배후에 대해 정확한 증거를 내놓는다면 1억 달러를 주겠다고 한 제안에 빠올로라는 작가가 응해 왔습니다.”
“그자가 배후를 알고 있단 말인가요?”
“본인은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네요. 사실 확인은 다 된 거지요?”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았습니다. 증거를 제출할 테니, 자신을 이번 범죄와 관련한 사법 처리 과정에서 제외해 달라는 요구가 있습니다.”
유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 친구도 관련이 되어 있다는 말이로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날 배에 타고, 술에 취해 여기 묵었던 것이 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보스의 객실 위치를 확인하고, 공격이 있을 때 보스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 했었다는군요.”
“흠. 확실히 관련이 있는 거로군요.”
“브라질 경찰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증거를 내놓고 경찰에 체포된다면 아마 하룻밤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
브라질 경찰의 부패와 폭력성은 무척 유명한 편이다.
워낙에 총기를 사용한 범죄가 너무나도 쉽게 일어나는 나라이다 보니, 브라질의 경찰들은 범죄자로 지목된 사람에게 폭력을 쓰는 것을 굉장히 쉽게 여겼다.
더군다나 범죄 조직이나 정치인에 매수된 경찰은 아주 흔한 일이고.
그러니 그 빠올로라는 작가가 뭔가 증거를 내놓는다고 해도, 경찰서에 잡혀 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증언도 사라지게 된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까?”
“뭐. 브라질을 떠나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되면 그의 증언을 사용하기 어려울 텐데요?”
“어차피 증언을 법정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정말 하룻밤이라도 버티면 다행이겠지요.”
존 브래넌은 빠올로만큼이나 이 나라 경찰에 대한 확신을 가진 듯 보였다.
“그것만으로 그 배후 인물들을 단죄할 수는 없겠군요?”
브라질 경찰도, 브라질의 법정도 믿을 수 없다면 어떠한 증거가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방법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존은 나름대로 생각해 둔 수가 있었다.
“대신 현상금을 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빠올로도 자신이 브라질을 떠나는 것과 어느 정도의 대가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하더군요.”
존이 말한 약간의 대가는 유진에게는 그야말로 푼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 브라질 사람들에게는 평생을 벌어도 모을 수 없는 돈이기도 하다.
그날 저녁, 빠올로는 존 브래넌이 제공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유럽으로 떠났다.
포르투갈에 친인이 있어 그곳에 몸을 의탁할 생각이라고 한다.
“빠올로에게 받은 녹음 파일입니다.”
존 브래넌은 빠올로를 포르투갈로 보내 주고, 200만 달러의 현금을 넘기는 대가로 빠올로가 녹음해 왔다는 음성 파일을 받아 내었다.
- 약속과 다르지 않아? 요트는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파일을 재생하자, 유진에게는 낯선 포르투갈어로 남자가 화를 내고 있었다.
빠올로의 음성이라는 존 브래넌의 설명이 뒤따랐다.
- 약속대로 요트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잖아?
- 무슨 소리야? 그렇게 커다란 폭발이 있었는데? 막지 않았으면 요트에 붙어서 함께 터졌을 거 아니야? 그랬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지 알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있지? 미국에서도 힘 있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고! 그들이 죽었다면 미국이 브라질을 가만 뒀을 거 같아?
- 아아, 진정하라고.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 진정하게 생겼어? 그 일 때문에 어떤 난리가 났는지 보라고!
녹음된 음성은 빠올로와 다른 한 남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제대로 된 혁명을 일으키려면.
- 지금 이게 제대로 된 혁명이 일어나는 거로 보여? 혁명은커녕 당장 여당이 무너질 지경이잖아?
- 그 가짜 사회주의 자식들은 무너져야 해. 그리고 사람들이 더 고통받아야 우리의 이상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 미친 자식!
녹음 파일이 흘러나오는 동안 존 브래넌이 하나하나 번역해 주었다.
“그럼 이 상대방이 배후라는 건가요?”
“그렇다고 합니다. 브라질 공산당의 격렬한 투쟁주의자 중 한 명입니다.”
“그러니까 브라질 공산당에서 룰라를 무너트리기 위해 날 공격했다는 말이로군요.”
“우선은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저 먼 뒤편에 있기 마련이지요.”
존 브래넌이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뭔가 다른 사정이 있다는 표정이네요?”
“예. 오늘 또 다른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또 누구입니까?”
“호드리스 구에라라는 사람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 합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이번 생과 저번 생의 기억을 모두 뒤져 봐도 낯선 이름이었다.
“상파울루의 지주 가문입니다. 대대로 캄피나스 시에서 커다란 커피 농장을 운영해 온 대지주지요.”
“그자가 테러를 사주했다는 겁니까?”
“예. 파라과이 인민군이나 콜롬비아 카르텔의 폭탄 전문가를 고용한 것도 바로 그 구에라의 수작이었다는군요.”
“제보자는 누구인가요?”
“캄피나스 시에서 제법 넓은 커피 농장을 경영하는 루이스라는 남자입니다. 최근 들어 경영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유진이 잠시 머릿속으로 새로운 정보들을 정리해 봤지만, 아직 의문점이 많았다.
“그런데 그 브라질 공산당과는 또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거죠?”
“호드리스 구에라의 심복이 빠올로에게 이 배에 타서 보스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라 시켰던 공산주의자에게 10만 헤아르를 보냈다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겨우 10만 헤아르인가요?”
유진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국 돈으로 하면 2만 달러도 되지 않는 액수이다.
물론 이곳 브라질의 물가로는 적지 않은 돈이기는 하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사내가 겨우 2만 달러에 그토록 증오하는 지주에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넘겼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 나름대로는 이번 테러에 진심이었던 모양입니다. 보스가 브라질에 투자하는 것이 공산 혁명에는 방해가 된다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보스를 공격해 룰라를 실각시키면 언젠가 공산 혁명도 가능하리라 생각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 루이스라는 남자는 믿을 만한 인물인가요?”
“확인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범죄 집단의 테러로 보였던 사건의 이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