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알코홀릭
유진은 여전히 올해 제작되는 할리우드 쇼 중 어떤 것이 흥행할지, 그리고 어떤 TV쇼가 시청자들을 끌어모을지 기억하고 있다.
디즈니와 넷플릭스를 비롯한 메이저 스튜디오와 방송국들 지분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유진이 미국의 영화계와 방송계에 투자하는 액수는 물론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지만,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쇼의 흥행이 가져다주는 수익은 투자 비용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때문에 현재 유진이 지닌 미디어 업계에서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진이 투자하지 않는 영화나 쇼는 결코 흥행할 수 없다는 소문은 그저 뜬소문이 아니다.
당연히 모든 제작자가 그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고, 유진이 하는 말 하나를 들어주기 위해서라면 시나리오를 통째로 뜯어고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유진이 자신의 전문 분야도 아닌 쇼비즈니스계에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요청은 아주 단순하다. 가능하면 한국인 혈통을 등장시켜라.
지금까지의 동양인들처럼 주눅 든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등장한 장면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역할로 말이다.
“오늘은 재원 씨와의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날은 멀리 한국에서부터 브라질까지 날아온 한국의 스타 배우와 그를 만나기 위해 뉴욕에서 온 20세기 스튜디오의 한 중역이 함께하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브라질까지는 꽤 멀었죠?”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전용기를 보내 주신 덕분에 편안하게 왔습니다. 그렇게까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유진이 부른 한국의 미남 배우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서 제일 먼 나라가 브라질이잖아요. 1만 8천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미국을 경유해 오려면 엄청 힘들 테니까요.”
정확히는 우루과이 앞바다가 한국의 대척점이다. 그리고 상파울루는 우루과이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솔직히 제가 대단한 배우도 아니고…….”
재원이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재원은 한국에서나 먼 이국인 이곳 브라질에서나 지금은 그리 대단한 인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사실 그런 재원도 한때는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블루칩으로 손꼽히던 배우였다.
천상계의 외모라는 평가 속에 출연하는 드라마나 영화마다 흥행 신기록을 찍었다.
하지만 20대 초반을 넘어서며 새롭게 주연을 맡은 영화 몇 개와 드라마가 연달아 흥행에 실패하며 제동이 걸렸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이지만, 성적이 모든 것을 증명하는 것은 연예계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연기가 나쁜 것도, 행실이 좋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주연을 맡은 작품마다 흥행에 족족 실패해 버리니 버틸 도리가 없었다.
“않지요. 우선 식사부터 할까요?”
유진이 먼저 자리에 앉자, 재원과 20세기 스튜디오의 슈퍼바이저가 따라 앉았다.
“재원 씨가 술은 안 하시니, 주류는 모두 제외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전 못해도 다른 사람들까지 방해하면 안 되지요.”
한때 알콜 중독으로 고생했던 재원을 위해 식탁에 술병을 올려놓지 않았지만, 재원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서버가 술병을 가져와 유진과 20세기 스튜디오 중역에게 따라주었다.
중역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재원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은 실례인 것을 알면서도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물론 그 배우가 얼마나 알콜을 극복했는지 직접 눈으로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무려 5억 달러짜리 영화가 걸린 중요한 일이다. 약간의 실례를 무릅쓸 만한 이유로는 충분했다.
식사가 시작되고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자 유진은 재원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묻는다.
한때 잘 나가던 배우가 일이 끊긴 이후 있었던 일도 서슴지 않고 물어보았고, 재원은 숨기지 않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진짜 운이 없었지요.”
재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군요. 코로나 때문에 두 편이나 개봉이 연기되었으니 버틸 도리가 있겠어요?”
“그거! 기억하고 계십니까?”
유진의 말에 재원의 표정이 확 살아나며 되물었다.
“물론이지요. 재원 씨 영화는 하나도 빠지지 않고 챙겨 봤으니까요.”
“그……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그리고 다음 드라마에서는 주연 맡은 여배우가 음주운전 사고를 내며 엎어졌잖아요?”
하필이면 사전 제작으로 절반 이상 찍어놓은 드라마가 그런 상황에 놓이니 아무리 대단한 배우라도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3화까지 방영이 된 직후였다.
허겁지겁 새로 여배우를 섭외하고 다시 드라마를 찍어 보았지만, 이미 그 드라마의 생명은 끝이 나 버렸다.
“그다음 영화는 제작사가 부도가 났고요.”
“하! 정말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맞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운이 지독하게 없을 때가 있기도 해요.”
“예. 제가 정말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후우…….”
운이 있고, 없다는 건 연예계에서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요인 중 하나이다.
예술계에 몸을 담은 사람이나, 사업을 하는 사람치고 운을 따지지 않는 사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큰돈이 들어가는 경우라면, 재원처럼 운이 없는 사람과는 얽히지 않으려는 경향이 크다.
비주얼은 어디에서도 꿀리지 않을 만큼 훌륭하고, 연기도 제법 나쁘지 않은 재원이지만 사람들이 꺼리기 시작하니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그를 몇 번 불러 주는 연예 프로그램이 없지는 않았지만, 잘 나갈 때의 재원과 달리 기운이 빠진 재원은 그런 프로그램에 나가서도 그다지 두각을 드러낼 수 없었다.
한 번 사람이 위축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 결국 그런 프로그램에서마저 섭외가 끊기며 재원은 차츰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가기 시작했다.
“그런 저를 이렇게 불러 주시니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0세기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면서 한국 출신 배우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비주얼이 훌륭하면서 연기가 되는 사람을 찾는데, 재원 씨가 물망에 올랐다고 하더군요.”
“아…….”
“그런데 재원 씨가 한동안 슬럼프로 고생을 하고 있어서 재기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 고심 중이라길래 내가 한 번 알아보았지요. 얼마 전까지 알콜 때문에 무척 힘들었다면서요?”
사실 유진의 이야기는 조금 변질되어 있었다. 재원을 추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제작에 들어가려면 한참을 남았을 그 시나리오를 예정보다 빨리 꺼내 놓은 사람도 유진이다.
“맞습니다. 제가…… 힘에 부쳐 술에 빠져 살았습니다.”
재원은 순순히 자신의 불미스러웠던 일을 인정했다.
“그런데 알아보니 이제 거의 회복했다면서요?”
“네. 그것도 맞습니다. 한동안은 정말 술 말고는 아무런 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술을 사러 나가기 위해 옷을 걸치려 옷장을 열었더니, 갑자기 그 옷장 안의 어둠이 확 제게 밀려오더군요. 원래라면 등이 켜져야 하는데, 하필 그날 등이 나갔던 모양이에요.”
유진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는 재원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지금은 무어라 맞장구를 쳐 주는 것보다 그저 경청해 주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냥 어둡구나 하고 느껴지질 않더군요. 마치 저 옷장 안이 끝이 보이지 않는 동굴처럼 느껴졌습니다. 전 그 어둠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겁에 질린 어린 원시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지요. 이대로라면 내가 이 토굴 속에서 죽어 가겠구나. 그때였습니다. 장롱 한쪽에 언젠가 던져 두었던 수첩 하나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 수첩을 주워들고는 옷방을 뛰쳐나왔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요.”
알콜에 중독되어 폐인처럼 살던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제법 진지하면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전적으로 그가 지닌 그 대단한 외모 때문이다. 그가 그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건, 아마 그 분위기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다시 한번 이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사실 그 빌어먹을 만큼 불공평한 세상 덕분에 유진은 두 번째 삶을 살게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부를 손에 넣었으며, 더 나아가 세상의 운명까지 손에 쥐고 흔들 생각이니 삶의 불공평에 대해 불평을 할 생각은 없다.
“거실로 나와 수첩을 열어 보니, 사진이 한 장 튀어나오더군요. 그 사진 속에는 어느 여인이 아이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옆에는 아직 망가지기 전의 제가 아이를 보고 웃고 있었습니다.”
“어! 혹시 재원 씨한테?”
20세기 스튜디오사의 수퍼바이저가 흠칫하는 얼굴로 재원을 바라보며 물었다.
거의 캐스팅 결정이 끝난 상황에서 재원에게 숨겨진 아이라도 있다면 굉장히 골치 아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하하. 그녀는 제 여동생이고, 안고 있던 아이는 조카였습니다.”
“휴우, 다행이네요.”
“돌이켜 보니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렇게나 좋아하던 저였는데, 몇 년 동안이나 그 아이를 보지도 못했더라고요. 아! 이러다가는 지효한테 쓸모없는 삼촌으로 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저를 엄습했죠. 이대로 아까의 옷장 같은 어둠 속에 숨어지내다가 그 썰렁한 집안에서 홀로 죽어 간다는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이제야 마음이 놓인 슈퍼바이저는 편한 표정으로 재원의 나머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방울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를 운동하고, 사람들을 만나 저를 써 달라고 부탁하고, 동생과 통화를 하며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충실하게 살아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재원은 아주 열정적인 눈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힘겨운 시기를 보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걸 극복하려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진이 슈퍼바이저를 보며 말했다.
“좋은 스토리로군요. 홍보용으로 써먹을 수 있겠어요.”
슈퍼바이저는 재원의 허락을 구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물론이지요. 얼마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재원은 흔쾌히 허락했다.
“이번 영화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액션도 많고, 로케이션도 적지 않습니다.”
“전 조금도 상관없습니다. 기회가 온 것만으로 이미 지금까지의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원이 그 수려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미스터 강의 성공을 기원하며…….”
식사가 이어지고, 이야기가 깊어지는 사이 슈퍼바이저는 제법 여러 잔의 술잔을 비웠다.
그 와중에도 재원의 눈빛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그는 마음 편히 술잔을 들어 앞날을 축원했다.
유진 역시도 재원의 재기를 기원하는 말을 건넸다.
그러나 사실 유진이 20세기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려는 영화에 재원을 선택한 것은 원래 그가 그 자리를 차지할 운명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