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347화 (347/363)

347화 또 다른 영화

“아까 굉장히 잘생긴 남자와 식사를 하시던 걸 봤는데요.”

유성이 마리아를 만나러 배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셰넌이 방문했다.

“혹시 한국 배우 맞나요? 재원?”

“알고 있었나 보네?”

“정말 맞았네요! 나 예전부터 팬이었거든요. 한동안 사라져서 안타까웠었는데.”

셰넌이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그녀도 상당한 친한파이고, 한국 아이돌이나 드라마에 관심이 많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래? 잘됐네. 그럼 불러서 인사라도 하게 해 줄까?”

“아뇨. 그건 괜찮아요. 그보다 이렇게 여기까지 부른 걸 보면 뭔가 계획이 있으신 모양이네요? 영화를 찍을 생각인가요? 브라질에서?”

셰넌은 꽤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그렇지. 할리우드 영화인데, 배경은 남아메리카에서 북미까지 두 대륙을 횡단하며 찍을 예정이야.”

“와! 굉장하네요. 그런데 유진이 직접 만나 보기까지 하는 걸 보면 그냥 조연 수준은 아닌가 보지요?”

그녀는 어쩐지 재원이라는 배우보다 영화에 더 관심이 있는 표정이다.

“세 명이 주연인데, 그중에서도 꽤 핵심인물이 될 것 같아.”

“유진이 직접 투자하고 깊은 관심까지 보이는 영화라면 상당히 기대되네요.”

“투자라도 하고 싶은가 보네?”

“투자라……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히히.”

셰넌이 평소와 달리 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유진이 그동안 접해 본 결과 그녀가 그럴 때는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투자하고 싶으면 20세기 스튜디오 쪽을 통해 알아 보면 될 거야.”

딱히 비밀도 아니고, 자신이 관심 있는 영화에 다른 사람이 투자하는 것을 막지도 않는 편이라 유진은 흔쾌히 셰넌이 원하는 답을 주었다.

“오! 오랜만에 20세기 스튜디오에서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 흥행작이 한 편 나오나요?”

“블록버스터라. 아마 맞겠지? 적어도 5억 달러 이상은 예상하고 있으니까.”

“순수 제작비만요?”

“어.”

“확실히 흥행은 보장된 영화네요!”

아무래도 셰넌은 그 영화에 어떻게든 투자를 하게 될 듯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흥행이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거기다가 감독도 대단한 흥행 성공을 해 본 적은 없고 말이야.”

“감독이나 배우가 중요한가요? 유진이 중요하지?”

그동안 유진이 할리우드에서 보여 준 행보를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이번에 영화와 기술 관련 투자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셰넌이 조금 생각 외의 말을 꺼냈다. 지금 뉴욕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는 그녀가 평범한 금융 투자기업도 아닌 영화와 기술 관련 투자라니, 조금은 의아스럽다.

“여전히 영화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동안 중국의 영화 산업이 커져 왔기는 하지만, 조금 기형적인 성장이었지요.”

“아무래도 정부에 종속된 산업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중국의 영화 산업이 철저하게 공산당의 승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권위주의 국가의 예술이란 게 늘 그런 법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성장을 하려면, 정부에게서 독립해야 한다는 믿음이 조금씩 퍼져 나가고 있어요.”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거야.”

유진의 기억으로 중국이 공산당의 일당독재에서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중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이건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발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독재 정권을 무너트리고 민주 사회로 넘어가면 다시 해당 국가 다른 기득권 세력과 언론, 그리고 사법계와 정치세력의 연합으로 오히려 독재 시절보다 더 시궁창인 현실이 기다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때문에 많은 국가의 시민들은 때로 독재 시절을 그리워하며, 독재 정권에서 파생된 정당과 후보에 표를 몰아주는 일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전 중국이 정말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되길 원해요.”

셰넌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그녀의 그런 말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자국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지니기를 원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자본과 군사력으로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을 하며 영향력을 늘리고 있지만, 그건 제대로 된 영향력이라 보기는 어려워요. 그저 잘난 척하면서 적을 늘리고 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한국은 전혀 다르잖아요?”

그랬다. 셰넌이 진정 부러워하는 것은 현재 한국이 세계 곳곳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이다.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미국처럼 자국의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주변 국가들을 겁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처럼 다른 나라 경제를 위협하지도 않지요. 그저 아주 좋은 상품을 수출하고, 즐기기 좋은 문화 상품을 제공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잖아요?”

자신이 의도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과로 더 빨리, 더 크게 나타난 현상이기에 유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셰넌의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처럼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나라는 없을 거예요. 미국만 해도 미국이 대단하다 여기고 미국의 서비스를 즐기기는 하지만, 아주 많은 나라 사람들이 미국 자체는 싫어한다고요.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요.”

셰넌은 자국이 세계 각국에서 어떤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바꾸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중앙 정부가 지금까지의 기조를 바꿀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워요.”

아까보다 훨씬 더 어두워진 표정으로 셰넌이 말했다.

중앙 정부란 그녀의 부친이 수장으로 있는 중국 정치의 수뇌부를 의미한다.

“그건 정치인들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슬프게도 말이지요.”

중국이 공산당의 일당독재라고는 하지만, 정책의 기조는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일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사실 대개의 권위주의 국가에서 정권이 가지고 있는 부실한 정통성을 대신하기 위해 자국민들이 자국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하려는 의도로 스포츠 등을 통해 소위 말하는 국뽕을 유도하는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정치 기술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내부적으로 직면한 다양한 문제점을 다양한 정치 권력들의 토론과 경쟁, 그리고 협상 등을 통해 해결해 나가려 하지만,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그러한 사회통합 과정이 존재하기 불가능하기에 국외의 적을 상정하는 것으로 내부의 갈등에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감정의 대상을 치환하는 것이다.

더불어 대개의 국민들은 국뽕, 그러니까 자국이 타국에 대해 우월하다는 기분을 느끼기 원한다.

물론 자국과 경쟁 관계에 놓인 나라에 모든 면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것은 더더욱 당연하다.

중국의 경우도 주변 수많은 나라와의 갈등 관계를 통해 자국 내부의 갈등에서 생기는 그러한 부정적인 에너지를 외부로 발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 때문에 중국에서 만들어 내는 영화들 대부분은 그러한 정부의 시책에 맞춰 위대한 중국인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든 변화의 기조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도 중국에 적지 않아요.”

그러한 목소리가 쉽게 표출되지 않을 뿐이지, 중국 내부에서도 여러 반성과 우려의 목소리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무려 14억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는 나라이다. 그들 모두가 정부에 순응하는 생각만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보려고요.”

“영화 산업? 나쁘지 않지.”

“그렇다고 당장 어떤 가시적인 결과를 내려는 것은 아니고요. 우선은 많이 배워야겠지요. 그 후에 중국의 영화 산업에 기여할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에요.”

중국 최고 지도자 부친을 둔 셰넌은 지금 당장 중국 정부의 방침에 거스르는 행동을 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반정부 운동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부지런히 배울 생각이에요. 우선은 제가 잘하는 투자에서부터 시작하고, 할리우드 시스템을 어떻게 응용할지 연구해 봐야겠지요.”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예술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해 온 것처럼 투자 측면에서 먼저 접근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문화가 지닌 힘이 지금처럼 빛을 발하게 된 과정에서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 유진이잖아요?”

셰넌이 다시 표정을 밝게 하며 말한다. 지금까지 이런 말들을 늘어놓은 이유가 다름 아닌 유진에게서 노하우를 얻어가겠다는 부탁의 말이라는 의미이다.

“내 역할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자본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한국의 문화 산업이 지닌 잠재력이 제대로 싹을 피우도록 약간 거든 게 전부야.”

“사실 그게 중요한 거 아니에요? 우리 중국인들의 잠재력도 대단하다고요. 거기에 약간의 도움만 있다면 우리도 미국 못지않게 세계 시장에서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지금 잔뜩 들어간 그 허세 넘치는 쇼비니즘을 덜어내는 것이 우선이지만요.”

다시 한번 셰넌은 우울한 얼굴을 지었다.

“그런데 내가 딱히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야. 앞으로 다가올 환경은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를 테니까.”

유진은 솔직하게 미래의 편린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환경이요?”

“그래. 영화나 드라마나, 그 어떤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야. 지금 기존 미디어 분야의 종사자들은 그들 앞에 닥쳐 있는 거대한 회오리를 마주하고 있어.”

“아! 인공지능 기술 발전 말이지요?”

“그래. 인공지능 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바로 그 태풍이야. 지난 수십 년 동안 축적되어 온 다양한 분야의 기술들이 지금 폭발적으로 분화하고 있으니까. 사실 나조차도 당장 내년의 미디어 환경이 어떻게 될지 감도 잡기 어렵거든.”

셰넌은 아직 완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어 보였다.

“인공지능이 영화계에도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칠까요? 물론 아주 다양한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선보이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런 설익은 기술들은 그저 틱톡이나 유튜브, 많이 나가 봐야 드라마 제작 비용 절감 정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영화는 전혀 다른 분야에요. 인공지능이 만들어 주는 합성 화상은 수많은 애니메이터가 달라붙어 정성스럽게 만들어 낸 효과와는 아직 비교하기 어렵다고요. 제대로 된 결과물을 뽑아내려면 결국 인공지능도 그만한 비용이 들고 말이에요.”

셰넌의 말은 일견 일리가 있어 보였으나, 유진은 그녀가 놓치고 있는 면을 일깨워 주었다.

“그건 오늘까지의 일이지.”

“오늘이요?”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거야. 내일의 기술은 오늘과 완전히 다르니까. 내가 재미있는 영화 하나 보여 주지.”

유진은 곧 응접실 TV를 켜고 영화 하나를 틀었다.

“쉰들러 리스트? 고전 영화네요. 나 저 영화 안 봤어요.”

“요즘 세상에 저걸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유진은 어렸을 때 즐겁게 본 기억이 있지만, 어느새 그 영화는 고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응? 영화가 갑자기 컬러로 바뀌네요?”

쉰들러 리스트는 일부러 흑백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가 컬러가 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의 변화된 부분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우가? 어라? 아까 재원 씨? 어째서?”

셰넌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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