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환골탈태
“혹시 그레고리 펙도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세기의 미남을 빼놓을 수야 있나요.”
“아무래도 집에 있는 극장 시설을 바꿔야겠군요. 타이타닉을 한 번 다시 봐야겠네요.”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 커플의 러브스토리도 멋졌지만, 헵번과 그레고리 펙의 앙상블을 로마의 휴일이 아닌 타이타닉에서 보는 것도 멋질 것 같았다.
그레고리 펙의 신장이 디카프리오보다 10cm가량 더 크지만 상관없다. 인공지능이 배우의 얼굴뿐 아니라 신장이나 몸의 형태까지도 바꾸어 주니까.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얼마 전에 새로 스크린을 바꿨습니다. 제일전자에서 나온 시스템이 제법 괜찮더군요. 700인치 사이즈인데 겨우 500만 달러밖에 안 합니다.”
유진은 은근히 자신이 대주주로 있는 제일전자의 신상품을 홍보했다.
“가격을 들어보니 마이크로 LED로군요?”
“마이크로 LED 산업이 이제 슬슬 궤도에 올라가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초고가 시장에서만 약간의 반향을 보이는 수준인데, 이번 기회에 차세대 TV 시장의 주역으로 삼을 수 있을 듯합니다.”
“거실에 마이크로 LED TV를 설치해 놓았는데, 확실히 선명도나 화질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더군요.”
마이크로 LED 디스플레이는 액정 없이 LED 자체가 발광하기 때문에 명암비, 응답속도, 색 재현률, 시야각, 밝기, 최대 해상도, 수명 등 거의 모든 부분에서 기존 LED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성능을 자랑한다.
단지 문제는 제조 공정이 기존 LED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난도가 높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최근 제일전자에서는 자동화 설비를 통해 기존의 제조 공정보다 수백 배 빨라진 공정 수준을 달성했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의 맹렬한 추격에 고심하던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다시 한번 중국과의 격차를 벌릴 기회였다.
아직은 기존 디스플레이 중 가장 고가인 OLE에 비해서도 상당히 고가인 수준이지만, 시장의 확장 여부에 따라 코스트는 충분히 낮출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게 되면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볼 수 없는 멋진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대형 TV 구매에 나설 것이고, 마이크로 LED 또한 호기를 맞게 된 셈이다.
“600인치 마이크로 LED 화면에서 보는 새로운 타이타닉이라…….”
저커버그도 상당히 끌리는 듯하다.
“얼마 전에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봤죠. 너무나 멋진 경험이었습니다.”
“아! 그건…… 인디의 주인공이 바뀌면 곤란한데요.”
“당연하죠. 해리슨 포드를 빼놓고 인디아나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바꾼 건 배우가 아니라 영상의 질과 특수 효과였습니다.”
인공지능의 능력은 정말 대단하다. 영화 속 주인공을 바꾸는 것이야 이미 10여 년 전에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단순히 얼굴을 바꾸는 것을 넘어, 영화의 질 자체까지도 스스로 생각해 바꾸어준다.
소소한 소품은 물론이고, 수십 년 전의 허접한 특수 효과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배우를 바꾸는 것보다는 좀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하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서비스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어 이 부분은 조금 뒤로 미루어 놓았다.
“최근 몇 년 안에 찍은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요 몇 년 전 개봉한 영화 수준은 충분히 될 겁니다.”
“멋지군요. 그럼 스타워즈도 가능할까요?”
“사실 스타워즈 프랜차이즈 때문에 디즈니와 협상 중입니다. 새로운 기술로 재해석한 스타워즈 시리즈를 다시 극장에 걸 예정에 있습니다.”
“호오!”
“이미 기술적인 문제는 끝났습니다. 단지 그 시기를 조율하는 게 문제이지요.”
컴퓨팅 자원만 받쳐 준다면 인공지능이 한 편의 기존 영화를 새로운 영화로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심지어 수십 개의 다양한 버전을 만들어 비교하고, 서로 더하고 빼서, 더 나은 버전을 만드는 데도 말이다.
조금 더 공을 들이면 최신 개봉작에 비해서도 조금도 밀리지 않는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물론 해리슨 포드를 비롯한 주역들은 바뀌지 않았다. 단지 제대로 된 리마스터링을 통해 조금 더 세련된 외모로 바뀐 정도이다.
“아마도 이쪽 서비스가 시작되는 것에 맞춰 개봉하는 것이 제일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태어난 완벽한 스타워즈 시리즈가 개봉한다면 상당한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디즈니에서는 새로운 흥행 신기록까지 노리고 있습니다.”
세 편의 클래식 스타워즈를 인공지능이 완전히 재해석해 내는 데 드는 비용은 과거 1977년 조지 루카스가 첫 스타워즈를 제작하는데 사용한 비용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3억 달러짜리 스타워즈 시퀄 마지막 작품보다 훌륭했다.
영상미에 있어서나, 영화 자체의 완성도에 있어서나 말이다.
클래식 스타워즈 세 편을 그렇게 완벽하게 만들어 대대적인 마케팅과 함께 개봉하면, 수십억 달러의 수익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풍을 새롭게 시작하는 서비스로 돌리면, 마케팅에 꽤 큰 도움이 되리라.
“과연 그렇겠군요. 그런 식이라면 다른 영화도 그렇게 리마스터링해서 상영할 생각들이겠네요?”
저커버그는 재빠르게 다음 수순을 넘겨짚는다.
“물론이죠. 다들 눈치 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렇죠. 영화 100년 사에 기억될 만한 영화가 한두 편이 아니니 말이지요.”
큰돈을 들이지 않고 지금까지 대중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명작 영화를 현대식으로 리마스터해서 극장에 거는 것만으로 가외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면 나쁠 게 무언가?
알맞은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탐을 내는 것이 당연했다.
“아직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어요. 그렇다고 모든 고전 영화들이 새롭게 재개봉한다고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극장의 스크린 수는 한정되어 있고, 관객들 또한 모든 명작 영화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그러니 여전히 흥행 여부는 미지수이다. 흥행을 위해서는 막대한, 그러니까 블록버스터 영화 제작비 수준의 홍보비가 필요한데, 그걸 고려하면 무턱대고 리마스터링해서 극장에 재개봉할 수는 없었다.
그런 리마스터링 영화의 상당수는 결국 OTT 서비스 따위를 통해 TV로 선보이게 될 것이다.
“물론 스타워즈와 터미네이터, 그리고 쥐라기 공원처럼 특수 효과를 사용한 영화들이 좀 더 유리하기는 합니다.”
30년 전 아직 컴퓨터 그래픽이 제대로 나오지 못했던 때의 특수 효과를 지금 보면 조악하기 그지없다.
만일 AI 기술 없이 그걸 다시 찍는다고 하면 영화 한 편의 제작비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다시 흥행하게 되겠군요.”
“그렇죠.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영화들이니까요.”
유진도 그리 다르지 않은 취향을 지니고 있다.
“영화사의 입장에서야 어쨌든 당장은 큰돈이 들어올 테니 환영하는 쪽이지만, 제작 파트는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그렇겠죠. 새로운 미디어와의 경쟁에, 지난 100여 년의 영화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작품들과 스크린 점유율을 둘러싼 경쟁에, 당연히 돈을 내놓는 쪽에서도 섣불리 모험에 나서고 싶지 않을 테고…… 여러모로 곤란한 점이 많을 것 같습니다.”
잠깐의 생각만으로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겨날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란 것이 늘 새로운 시장과 도태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저커버그는 여전히 뒤처지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도 새로운 기술들이 속속 선보이면서, 제작 환경이나 제작 비용에도 변화가 오는 것에 환영하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제작 비용 감소 덕분에 오히려 더 많은 영화를 제작할 수도 있겠어요. 대신 경쟁자가 많아진다는 단점도 있겠지만요.”
현재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 한 편의 제작에는 3억 달러 수준의 비용이 들어간다. 그리고 적당히 메이저급 영화라면 1억 달러 내외가 필요하고.
한데 이제는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영화 제작에 필요한 자본이 비약적으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관객의 눈으로는 무척 허술하게 느껴지는 30년 전 영화를 지금 사람의 눈에도 나쁘지 않은 영화로 바꾸는 비용이 많아야 1천만 달러 미만이다.
마찬가지로 저비용 영화를 찍어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환골탈태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블록버스터 영화를 양산할 수 있다.
대신 비슷한 수준으로 높아진 영화들이 잔뜩 나오니,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늘 경쟁은 새로운 발전을 만들어 내기 마련이지요. 지금까지는 자본의 경쟁이었다면, 다가오는 시대에는 자본보다 감독의 창의성이 훨씬 더 중요하게 될 겁니다.”
언제나 미국인들은 경쟁의 미덕을 찬양해 왔다. 그리고 새로운 바람이 불러일으킬 새로운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놀라운 발전과 창조가 나타나게 될 것을 유진은 잘 알고 있다.
기존의 제작 환경과 배급 환경은 앞으로 몇 년 사이에 완전히 바뀌게 될 것이고, 그 와중에 새로운 스타가 태어나고, 기존에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개인이나 단체가 몰락하는 일이 속출할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어쨌든 이번 비즈니스는 기대가 큽니다.”
“물론이지요.”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되어 같은 미래를 꿈꾼다.
예정대로 이 신개념 미디어 비즈니스는 페이스북을 통해 서비스될 예정이다.
이제는 35억에 달하는 가입자를 확보한 페이스북과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장점이 될지는 이미 명확한 일이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서비스가 저커버그가 열정적으로 추진 중인 페이스북 머니에도 큰 힘을 실어 줄 것이라는 점이다.
결제를 오직 페이스북 머니로만 한다는 것은 사실 비즈니스의 입장에서는 꽤 단점이 많다.
결제를 위해 페이스북에 머니 계정을 만들고, 달러를 환전해 페이스북 머니를 넣어 두고 나서야 원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불편함을 감수할 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공하려는 콘텐츠가 워낙 독보적이고, 또 화제성이 있기에 오히려 이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 페이스북에 가입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콘텐츠를 즐기기 위해 페이스북 머니 계좌를 만들게 되면, 결국 페이스북 머니 생태계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한 번 카드 결제에 익숙해지고는 더 이상 현금을 사용하지 않게 된 것처럼.
그 후 스마트폰 결제 시스템에 익숙해지고는 그 카드조차 들고 다니지 않게 된 것처럼.
페이스북 머니 생태계로 들어온 사람은 점차 모든 결제를 페이스북 머니로 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애플이 스마트폰이나 퍼스널 컴퓨터, 태블릿뿐 아니라 아주 다양한 서비스와 애플 페이를 통해 자신만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런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려 노력하는 면에서는 페이스북도 그리 다르지는 않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경쟁자라 할 수 있는 구글, 아마존 같은 거대 공룡 IT 기업들에 밀려 왔던 메타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역전 만루 홈런을 날릴 절호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