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외국인 노동자
“그렇다고 국민들에게 아무런 선택의 기회도 주지 않는 중국이 옳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
선거 때마다 관영 선거 혹은 부정 선거에 대한 논란에 휩싸이고는 하지만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돌아가고 있는 러시아를 조국으로 둔 옐리자베타가 다시 한번 셰넌의 주장에 반박했다.
“그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건, 선거에 참여한 국민이 책임을 진다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야.”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셰넌은 더 이상 논쟁을 이어 가고 싶지 않은 듯했다.
“러시아는 벌써 인도 정부와 협상에 들어갔어요. 인도의 미래를 위한 인프라 건설을 위해 러시아 정부는 그 어떤 도움도 아끼지 않을 거예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과 중국과의 시베리아 전쟁. 두 번의 전쟁을 치르고 난 러시아는 아주 많은 내홍을 겪었지만,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는 선거가 끝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빠른 속도로 경제를 회복하고 있었다.
유진의 공격적인 투자 덕분이기도 하지만, 두 차례의 전쟁 때문에 잔뜩 올라 버린 유가 또한 큰 역할을 했다.
여전히 러시아 국가 재정의 대부분은 드넓은 영토 곳곳에서 얻을 수 있는 천연자원에서 나온다.
원유 가격이 1달러 오를 때마다 국가 재정이 수십억 달러가 늘어난다는 점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무척 흡사했다.
더군다나 러시아가 시베리아 유전의 절반을 중국에 빼앗긴 뒤 터트린 핵폭탄 때문에 유가는 또 한 번 급격하게 솟구쳤다.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천연가스에 의존해야 하는 유럽 여러 국가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당연했다.
미국과 비교해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대체 에너지 산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단순히 탄소 가스로 인한 온난화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 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체 에너지는 아직 화석 에너지에 비해 충분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천연자원을 통한 러시아의 재정 확보는 큰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덕분에 최근 1년 사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와 러시아의 가스프롬의 주가는 배가 넘게 오른 상태다.
물론 이 두 거대 기업은 물론이고, 세계 각국의 에너지 관련 기업들에 대한 투자를 늦추지 않았던 유진이 올린 수익 역시 러시아나 사우디아라비아에 못지않았다.
“러시아와 중국이 인도의 경제 개발을 위해 앞장서 도와준다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모른 척하지는 못하겠네.”
“그렇겠네요.”
셰넌이 조금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통적으로 인도는 중국보다는 유럽에 훨씬 더 가깝다.
유럽 자본이 인도에 투자의 물꼬를 트면, 선제적으로 인도에서 자리 잡으려는 중국의 계획에 지장이 갈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프랑스와 독일 쪽 금융계에서도 점차 인도에 관심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월스트리트에서도 요즘은 인도 이야기가 제일 핫해요.”
중국으로 돌아가 미디어 산업에 여념이 없는 셰넌과 달리 여전히 월가의 투자 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옐리자베타가 그쪽의 분위기를 전했다.
“스위스 쪽도 관심이 있는 것 같고요. 아무래도 유진이 공격적으로 나오니 관심이 갈 수밖에 없겠지요. 인도 정부로서도 환영할 만한 상황이네요.”
한편으로 옐리자베타는 셰넌을 견제하려 일부러 조금은 과장하고 있기도 하다.
평소에는 그렇게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이지만, 각국의 명운이 걸려있는 인도 대 개발 계획에 있어서만은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오히려 두 사람 모두 서로에 대해 잘 알기에 상대에게 어떤 말을 했을 때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게. 그렇지 않아도 엊그제 인도 총리로부터 감사의 전화를 받았어. 자신의 계획이 순항 중인 것에 대해서 말이야.”
인도 총리의 계획이라고 해 봤자, 더 많은 서방 세계의 자본을 받아들여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인도 경제를 부흥시킨다는 것이 전부였다.
여전히 인도의 경제에 대한 모호성 때문에 그의 계획이 얼마나 커다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나, 유진이 등장하며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유진은 그 어떤 국제기구보다 큰 자본을 움직일 수 있고, 또 인도 정부가 구상한 것 이상의 구체적인 계획을 그리고 있었다.
인도 정부에도 수많은 뛰어난 경제학자들과 다양한 분야의 인재로 구성된 싱크탱크가 존재하지만, 유진이 운영 중인 세계구급의 싱크탱크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
지속 가능한 미래 재단을 통해 운영하는 맨해튼의 싱크탱크에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학자만 두 자리를 넘어서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각 분야의 석학은 세계 최상위권 대학 몇 개 정도를 합쳐 놓은 이상이다.
물론 거기에는 인도의 사회·경제 전문가들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들이 유진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아 만들어 낸 인도 구조 조절 계획의 청사진은, 현재 인도 사회 각계가 원하는 이권 다툼을 완전히 배제하고 순수하게 인도의 발전만을 목표로 세워졌기 때문에 더더욱 가치가 있다.
그렇게 넘치는 자본과 명확한 계획을 들고 찾아온 유성이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각 지방 정부의 수뇌들을 직접 만나 한 명 한 명 설득하고 있었다.
당장 유성이 개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금력만으로도 이미 인도 정부 1년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다.
인도의 경제를 10년 안에 지금의 두 배 이상으로 확충시키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현 총리로서는 유진과 유성 형제의 헌신이 고마울 뿐이다.
“인도의 발전은 단순히 많은 자본이 투자된다고 해결되지 않아. 중국은 유럽이나 월가에서 제공할 수 있는 수준의 자본과 그들이 결코 내줄 수 없는 산업화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
셰넌이 딱 잘라 말했다.
“중국이 겨우 20년 만에 선진적인 산업국으로 발전할 수 있던 노하우는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지.”
“한국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옐리자베타도 조금도 지지 않고 말한다.
“사실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모두 그런 경험을 지니고 있잖아?”
“일본과는 다르지. 한국은 인정해. 중국의 발전 모델이 되어 왔으니까. 하지만 규모에서 달라. 인도는 한국의 방식이 아닌 중국식의 발전이 필요해.”
두 사람은 그저 단순히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말다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인도 개발의 가장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유진에게 자신이 지닌 장점을 어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두 사람은 자신들이 유진과 함께 지내 온 시간만큼 충분한 유대감을 쌓아 왔다고 여겼기에, 그의 앞에서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을 내밀면, 인도 공략에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러시아는 타피(TAPI, Turkmenistan-Afghanistan-Pakista-India) 가스관 건설에 대해 좀 더 많은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러시아의 가스가 인도까지 연결되면 인도의 산업화에 더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옐리자베타도 지지 않고 러시아가 인도의 발전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시베리아로부터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연결되는 가스관이 다시 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까지 연결되면 러시아는 자국 가스를 안정적으로 남아시아에 공급할 수 있고, 인도로서도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에너지 자원을 구매할 수 있어 양국 모두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탈레반들이 이 가스관 건설 현장을 습격하는 등 불안 요소가 가득하다.
그렇지만 이 가스관이 러시아, 인도 양국은 물론이고, 여정 국가인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 이익이 될 것은 분명하기에, 러시아는 이번 가스관 건설에 적지 않은 자금을 투여하기로 했다는 것이 옐리자베타의 전언이었다.
유진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후, 러시아와 중국의 인도 투자에 대한 경쟁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맨해튼의 호화 저택에서 벌어지는 두 여인의 싸움은 그 치열한 경쟁의 첨단이었다.
“라제시 바하티야입니다.”
비슷한 시간, 유성은 인도 최대의 도시인 뭄바이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라제시. 생각보다 훨씬 젊으신 분이셨군요.”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유성 사장님.”
뭄바이 지역에서 IT 관련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는 40대의 인도인은 갑자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 왔다.
“한국어가 상당히 유창하시네요.”
유성이 조금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예전에 젊었을 때 한국에서 일했어요. 군포에 있는 공장이었는데 사장님이 참 잘 대해 주셨어요.”
바하티야가 조금은 어눌한 말투로 한국어를 구사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똑 떨어지는 영어를 구사하던 사람이 한국말로 떠듬거리며 말을 하니, 어쩐지 정말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거 놀랍군요. 저희 아버님도 군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공장을 경영하고 계십니다.”
“저도 유성 씨 부친께서 하시는 공업 회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유성 씨께서도 어린 시절에는 그곳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유진과 유성 두 형제는 세계적인 유명인사이다.
한 나라의 국왕이나 대통령 같은 정상급 인사 이상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영화배우나 국제적인 아이돌 같은 슈퍼스타 이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들이 어느 나라에, 혹은 어떤 산업에 관심이 있다는 풍문만 들려와도 관련 주가가 들썩일 정도다.
당연히 유성을 만날 목적이었다면 그들 형제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아보았을 것이고, 한국에 있는 두 사람의 가족이나 과거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바하티야처럼 한국에서의 근무 경험이라는 작은 인연의 실마리라도 있다면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제법 공통점이 있었군요.”
“유성 씨 같은 분과 공통점이라니 영광입니다.”
말은 무척 공손하지만, 바라티야의 몸짓과 눈빛에는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은 인도의 기업 중에서 그리 수위권에 올라서지 못하고 있지만, 창업 5년 만에 업계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더니 과연 꽤 도전적인 사업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인도 공과 대학을 나오셔서 IT 계통으로 일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한국에서 공장을 다니셨다니 꽤 의외로군요.”
“인도에 일자리가 별로 없었어요. 대기업에 취직해도 돈 많이 안 줘요. 그런데 한국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준다고 했어요. 친구랑 같이 한국으로 갔어요. 거기서 일하면서 돈 많이 벌었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덕분에 인도로 돌아와 창업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어요.”
한국 이야기가 나오자, 바라티야는 웃으며 다시 더듬거리며 한국말로 이야기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는 인도의 저명한 사업가라기보다는 그저 순진무구한 외국인 노동자로만 보여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유성은 바라티야의 그런 모습이 상당히 계획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유성과의 인연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다양성과 자신감, 그리고 유연함을 드러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