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투룸바
“한국에서는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하루에 많을 때는 열네 시간씩 일하기도 했었지요.”
바라티야는 다시 영어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물론 제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제가 일하는 만큼 충분한 보수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인도에서는 꽤 이름난 기업에 취업해도 한 달에 겨우 5만 루피를 받는 게 전부였지만, 한국에서는 열심히만 한다면 이삼일이면 그 정도를 받을 수 있었지요.”
“그 정도로 차이가 났었군요.”
“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면 인도에 있을 때보다 열 배 스무 배를 벌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그건 제가 인도에서도 상당히 엘리트라서 받을 수 있는 급여였단 말입니다.”
인도 사람들과 만나며 항상 느끼는 것은 그들이 참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바라티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저처럼 좋은 대학을 나온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한 달에 50만 원, 그리고 학교 선생은 20만 원을 조금 넘는 돈을 받아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한 달에 많게는 400만 원, 500만 원까지도 벌어 봤지요.”
2020년대로 들어와서도 인도의 공식적인 최저임금은 8만 원대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 그런 최저임금마저도 받지 못하는 인도인이 억을 넘나든다.
공장에서 온종일 일하고도 30달러를 간신히 받는 사람들이 수천만 명에 달할 정도이니, 바라티야의 말처럼 한국에서 일하면 수십 배를 받는다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인프라만 충분히 갖춰진다면 인도가 중국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 생산기지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인정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과 비교해서는 10% 미만, 중국에 비해서도 20%에 불과한 임금으로 공장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하나 여전히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계급이나 종교로 인한 갈등 그 자체보다는, 무기를 사용한 흉악 범죄나 테러의 발생 따위의 안전 이슈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그러려면 굉장히 힘들었겠군요.”
유성도 부친의 공장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어 대충은 알고 있다.
아무리 수당을 많이 받는다고 해도, 결국은 거기에 자신의 건강을 갈아 넣어 돈과 바꾸는 행위였다.
“그랬지요. 하하. 하지만 그때의 경험이 제겐 너무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으니까요. 음, 말하자면 한국 남자들이 군대에 다녀온 것과 비슷하려나요? 하하!”
“하하! 정말로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그렇지요. 거기서 5년을 일했으니, 절반쯤은 한국 사람이에요.”
여전히 간간이 한국말을 섞어 대화를 이어 가는 바라티야는 정말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군요. 저도 이제 인도에 와서 여섯 달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러니 절반은 아니라도 1/4쯤은 인도 사람으로 봐도 될까요?”
유성이 웃으며 바라티야의 농담에 호응했다.
“아니요!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바라티야는 얼굴을 딱딱히 굳히며 대답했다.
“아! 안 되는 건가요?”
조금은 머쓱했지만, 유성은 부드러운 표정을 풀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네. 절대 안 됩니다. 유성 같은 분이 인도인이라니요. 쓸데없는 생각 마세요. 이 더러운 나라의 사람이라니 말도 안 됩니다.”
생각 외로 바라티야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차라리 개나 돼지가 낫지, 인도인은 안 됩니다.”
“그런가요?”
유성은 조금은 어색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외국인이 인도 사람이 되면 부여받는 계급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수드라입니다. 수드라 잘 아시지요?”
“아. 네. 조금은요.”
“인도에서 수드라는 전통적으로 소와 원숭이 아래로 취급합니다. 비유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 정도였나요?”
“물론 지금에 와서야 과거의 그런 습관이 없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도 사람은 계급과 함께 태어나고, 계급과 함께 살아가다가, 계급과 함께 죽습니다.”
바라티야의 얼굴에는 아주 짙은 혐오가 서려 있었다.
“그러니까 유성 씨 같은 분이 다른 인도인을 만나실 때는 인도 사람이 된다거나 하는 말씀은 하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물론 내색은 하지 않겠지만, 그들은 벌써 유성 씨를 얕잡아보기 시작할 겁니다.”
“호오!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좋은 가르침을 받았군요.”
“주제넘게 나선 것 같아 죄송합니다.”
바라티야가 허리까지 깊이 숙이며 사과해 왔다.
“사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행동이 실례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라티야가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 상념을 더듬었다.
“인도는 아주 끔찍한 나라입니다. 물론 유성 사장님께서 이 인도를 위해 굉장한 도움을 주시고 계신 것에 대해서는 무한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데 솔직히 이 나라가 그런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든 인도인이 그렇지는 않을 테니까요.”
“글쎄요. 솔직히 그것도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그런 과거의 구습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반대하는 이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젊을 때나 그렇지,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 어느새 구시대의 습성을 물려받고는 하더군요.”
그는 인도의 관습에 맺힌 것이 무척 많은 사람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하위 계층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딱히 낫지도 않습니다. 유성 사장님께서 얼마나 알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수드라 밑에는 또 그 아래가 있습니다.”
“예.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정 카스트나 다른 여러 종류의 계급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네 계급의 카스트 중 최하위 계급인 수드라는 실제로는 상위 30%에 해당하는 높은 계급이다.
그 아래로 수드라의 하위 계급인 지정 카스트와 불가촉천민, 그리고 지정 종족, 심지어 인도인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기타 소외 계급까지 무척 다양하게 분화된 차별받는 계급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카스트로는 구분이 되지 않는 직업과 가문의 체계인 자티 등을 통해 외부인으로서는 감히 이해가 되지 않을 다양한 체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나라가 인도이다.
“수드라 계급에 속하는 이는 그 아래 계급을 무시하고, 또 그 아래 계급은 자신과 같은 층에서 더 낮은 계급이 있다면 그들을 차별하지요. 끔찍한 나라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인도처럼 차별이 생활화된 곳은 없을 겁니다.”
“으음…….”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사실 한국 사람들로부터 조금은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저 나와 다른 종류의 사람에 대한 거부감 수준이었지요. 한국은…… 정말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아마도 바라티야는 ‘인도에 비하면’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빼놓았을 것이다.
“제가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들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물론 약간의 다툼은 있었지만, 결국 모두 서로가 인간이라는 것은 인정했었습니다. 이곳은 계급이 다르면 같은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곳이지요.”
어느 나라이건 자국에 대한 혐오를 지닌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한국에서도 자신이 속한 나라를 비하하고, 한국인에 대해 혐오의 발언을 내뱉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바라티야의 태도는 확실히 남달랐다.
“그렇지만 미스터 바라티야는 여전히 인도에서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전…… 인도 사람이니까요.”
조금은 처연하게 대답했다.
“제 가족들 모두가 인도 사람이고, 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와서도 전 다시 인도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아! 저희 어머니께서 찾아 준 사람입니다. 아주 좋은 여자이지요.”
가족과 부인 이야기가 나오자, 바라티야의 얼굴은 다시 환하게 밝아졌다.
“한국에 있을 때 정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대로 한국에서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거기서 전 틀림없이 이방인이었지만, 인도에서처럼 불공정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여러 이유로 인도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뭐, 돌아온 것이 결과적으로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결혼도 할 수 있었고,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으니까요.”
바라티야의 얼굴이 다시금 살짝 어두워졌다.
“뭔가 걱정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사실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 카스트 제외 계급에 속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카스트 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은 카스트 체계 내에 들지 못하기 때문에 최하층의 천민으로 분류된다.
물론 그들의 자녀들 또한 무조건 같은 계급에 속하게 된다.
“제 아버지는 남인도의 투룸바 계급이었습니다. 아! 생소하시겠군요. 투룸바는 카스트에서도 가장 아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너무나도 신분이 낮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조차 허락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어딘가를 이동할 때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밤에만 움직여야 하고, 야자 잎으로 바닥을 쓸어 걸어간 흔적을 명확하게 남겨야 했습니다. 다른 계급 사람들이 투룸바 사람들이 지나간 길을 피해서 다닐 수 있도록 말이지요.”
“아!”
유성은 비로소 바라티야가 가진 인도에 대한 짙은 혐오의 실마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차별이란 것이 있다는 것이야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다.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지나간 자리마저 피해야 할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끔찍한 삶을 살았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나 안드라프라데시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는 그나마 고향에서의 끔찍한 차별을 피해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셨죠. 그리고 그곳에서 어머니를 만나셨습니다.”
다시 바라티야의 눈가가 처연해졌다.
“저희 어머니는 케사르와니 자티…… 그러니까 바이샤 계급에 속하는 가문의 분이셨지요. 그리고 두 분의 결합은 당연히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안드라프라데시를 떠나셔야 했습니다. 두 분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유성은 이제 인도에서 서로 다른 두 계급의 남녀가 만나 결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높은 카스트의 여인이 하위 카스트의 남자와 결혼할 때의 심각함은 더했다.
지금도 인도 곳곳에서는 이런 계층 간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지닌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유성은 벌써 바라티야에게 닥칠 운명을 예감할 수 있었다.
“두 분은 멀리 떨어진 콜카타까지 가셨습니다. 수천만 명이 사는 대도시이고, 안드라프라데시로부터는 1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니 안전하리라 생각하셨던 거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가문에서는 두 분의 결합을 치욕으로 생각하셨고, 사람들을 보내 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이때 즈음이 되자 바라티야는 오히려 침착해졌다.
“제가 여섯 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셔야 했습니다. 저와 제 동생이 아니었다면, 어머니께서도 어쩌면…… 여하튼 그렇게 되었으니, 제가 이 나라에 대해 결코 좋은 감정을 지닐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바라티야가 조금 힘없이 웃었다.
“그렇군요.”
유성은 이제껏 자신도 살아오면서 참 많은 일을 겪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바라티야의 삶에 비하면 정말 평탄한 삶을 살아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