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화
3장. 연말 평가
첫날 레슨이 끝난 후,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갔다.
나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왠지 달라진 듯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좋은 쪽으로의 변화인 건 확실했다.
뭐라고 할까.
처음에는 완전 외부인이라 ‘출입 금지!’가 쓰인 팻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해 준 느낌이라고 할까.
애들이 착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냥 순탄할 것만 같던 일상의 평화로움도 새로운 사건이 생기면서 깨어졌다.
12월 초.
한창 안무 연습을 하던 때 연습실 문이 열렸다.
조규환 이사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막내가 재빨리 MR을 껐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어어, 그래.”
조규환 이사가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휴, 땀 냄새. 연습 엄청 열심히 하고 있었나 보네. 다름이 아니고 너희한테 알려 줄 게 하나 있어서 내려왔어. 별일은 아니니까 긴장 풀고.”
그가 종이를 내밀었다.
“너희 연말 평가 과제 나왔다.”
“진짜요?”
모두 종이를 받아든 김비주 곁으로 모여들었다.
깔끔한 공문 양식으로 인쇄된 종이에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 2013년도 합동 연말 평가 안내 】
-장소 : 태화고등학교 대강당
-일시 : 2013. 12. 28 (토)
-참가 기획사 : DNS 미디어, 레몬 엔터테인먼트, 화이 엔터테인먼트, 빅브라더 컴퍼니, 어울림 엔터테인먼트
-과제 : 서로 다른 2개 곡을 하나의 주제로 묶은 퍼포먼스
-당일 주변 교통 사정이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연습생 부모님들께 미리 사전 안내 부탁드립니다.
긴장한 표정으로 안내문을 보는 이들과 달리 나는 멀뚱멀뚱 있었다.
연말 평가는 또 뭐야?
월말 평가는 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매달 모의고사를 치른다면 아이돌 연습생은 월말 평가라는 시험을 치른다.
국영수가 아닐 뿐 시험이라는 점은 똑같다.
성적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점도 똑같고.
굳이 차이점이라면 모의고사를 망친다고 고등학생에서 잘리진 않지만, 연습생은 월말 평가의 결과에 따라 2~3달 정도 실력이 정체되면 곧바로 계약을 해지당한다는 것 정도.
더 나아지지 않으면 버려지는 것이 연습생의 삶이다.
내가 TJ 엔터에 있었을 때는 한 달에 이런 평가만 서너 개가 넘었다. 2주에 한 번 하는 작은 평가와 매월 목요일에 진행하는 큰 평가.
종목은 그때그때 다르다.
개인별로 ‘너는 고음이 약하니 이 노래를 마스터해라’하는 경우도 있고 ‘너희끼리 안무를 만들어라’하면서 팀끼리 경쟁시키는 것도 있고.
아마 종이에 쓰인 ‘서로 다른 2개 곡을 하나의 주제로 묶은 퍼포먼스’도 그런 시험 종목 중에 하나일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월말 평가를 공개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기획사들과 함께.
그냥 쇼케이스라고 생각하면 되나?
쇼케이스는 홍보 차원의 무대를 부르는 말이다.
진열장(showcase)이라는 단어 뜻처럼 미리 보여 주고 반응을 보는 것.
4대 기획사 중 하나인 MOP가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에게 연습생 무대를 공개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뭐. 일단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정보가 필요했다.
연말 평가가 대체 뭔지.
안내문을 훑어보는 연습생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중에 가장 입이 싼 사람을 골랐다.
“우에? 여할헝가오?(예? 연말 평가여?)”
“그래.”
쉬는 시간, 내가 사 준 초코 빵을 오물거리던 왕지호가 물었다.
“연말 평가 처음 들어봐여?”
“월말 평가만 알아.”
“아, 이거 6개월마다 주변 기획사들이랑 같이 월말 평가를 진행하거든여. 그중에 12월에 하는 거를 연말 평가라고 불러여.”
“MOP 쇼케이스랑 비슷하네.”
“좀 다르져. MOP에서는 일반인 관객 부르잖아여. 우리 연말 평가는 연생들 가족이나 주변인 불러서 하는 거예여.”
“차라리 일반인이 더 낫지 않나.”
내가 몸서리를 치자, 막내가 동감했다.
“그니까여. 부모님 보는 앞에서 삑사리 나거나 랩 절면 망신이 따로 없다니까여.”
할머니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안으로 파고들 지경이었다.
암담한 미래에 울적해하는 동안 왕지호가 초코 빵을 우적우적 씹었다.
“근데 연말 평가를 잘 봐야 하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어여.”
“뭔데?”
“이게 회사끼리 하는 거라서 경쟁이 붙거든여. 우리랑 DNS가 제일 커서 라이벌 의식 같은 게 있어여. 우리가 걸그룹 내보내면 저쪽에서도 걸그룹 내보내고 하는 식으로. 연말 평가도 그런 분위기예요.”
“축구로 따지면 한일전 같은 건가?”
“비슷하져.”
왕지호가 우유를 들이켜고는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6월 달에 우리가 완전 발렸거든여. 축구로 따지면 7대0이라고 해야 되나. 그때 분위기 장난 아니었어여. 대표님이 며칠 동안 인사도 잘 안 받아 주고.”
“우리 대표님이?”
“안 믿기져? 근데 진짜 그랬어여.”
“이번에 꼭 이겨야 되는 건가.”
“넵넵.”
“근데 너희도 실력 대단하잖아. DNS가 그 정도로 잘했어?”
“제 기억으로 그쪽 형들이 굉장히 잘했어여. 아마 이번에 데뷔조에 든 형들일 걸여?”
왕지호가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기사들을 보여주었다.
-‘라비앙로즈’ 남동생 그룹 나온다.. 9인조 ‘스트릿 보이즈’
-DNS 미디어 신인 ‘스트릿 보이즈’, 데뷔 리얼리티로 첫 선
-‘라로즈 후배 그룹’ 스트릿 보이즈, K-Net 리얼리티로 데뷔기 공개
설명을 보니 힙합 컨셉의 9인조 보이그룹이었다.
4월 데뷔를 목표로 현재는 K-Net에서 방영 예정인 리얼리티를 찍는 중이라나.
“얘네가 우리 경쟁자야?”
“넹.”
“뭔 데뷔 전부터 리얼리티를 찍냐.”
“진짜 부럽지 않아여? 이런 거 하면 팬들 쭉쭉 들어올 텐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하는지도 모르는 시청률 0.1프로짜리 프로그램이지만 아이돌에게는 다르다.
4대 기획사처럼 내보내기만 해도 인지도가 생기면 모를까, 중소 아이돌에겐 이런 것도 감지덕지였다.
부러운 눈으로 인터넷 기사를 훑어보는 막내의 팔을 톡 건드렸다.
“들어가자. 애들 기다리겠네.”
“형.”
“왜.”
“말 많이 했더니 목이 아파여. 초코 우유 하나만 사 주면 안 돼여?”
막내에게 초코 우유를 하나 더 사 주는 김에 멤버들 음료수도 샀다.
돌아온 연습실.
각자 음료수 하나씩을 든 채 연습실에 빙 둘러 앉았다.
이른바 작전 회의였다.
연말 평가 과제인 ‘서로 다른 곡을 하나의 주제로 묶는 퍼포먼스’를 어떤 식으로 준비할지에 대한 토론.
“지난번에 DNS 애들이 힙합으로 나왔잖아. 우리도 센 컨셉으로 가 볼까?”
“형, 상대팀에 래퍼만 4명이예요. 우리는 래퍼가 형밖에 없잖아요. 강렬한 컨셉으로 붙으면 우리 쪽이 불리할걸요.”
“음… 그렇지만 중현이 말도 일리가 있지 않을까?”
김비주가 말했다.
“우리도 강한 컨셉으로 가 보는 건 어때? 지난번처럼 소프트한 컨셉 했다가는 밀릴 수도 있고.”
“글쎄요. 정면승부하면 우리가 불리할걸요.”
“난 정면승부 괜찮을 거 같아.”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차분하게 갑론을박이 오간다.
노래를 선정하기 전에 어떤 콘셉트를 할지 토론하는 단계였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셋과 상황을 관망하는 막내와 나.
아무 생각 없이 형들 눈치를 살피다가 핸드폰을 보며 노는 막내와 달리 나는 고심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얘네 모두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 같다.
* * *
-DNS 쪽 애들이…
-DNS가 지난번에 했던 컨셉으로…
-보컬로 압도를 해야 우리가 DNS를…
상반기의 패배가 뼈에 사무쳤던 걸까.
멤버들이 하는 말마다 DNS 미디어가 나왔다.
이런 건 싸워서 되는 게 아닌데.
연말 평가를 일종의 서바이벌로 취급하는 느낌이었다.
라이벌을 꺾고 승리를 쟁취해야 하는 전쟁.
평소였다면 이들도 그런 생각에 매몰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족이 참관하러 온다는 사실과 지난번의 뼈아픈 패배가 ‘상대편보다 잘해야 한다’는 집념으로 이끈 듯했다.
이런 것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럼에도 내가 침묵을 지키는 까닭은 연차 때문이다.
단순 경력만 따지면 가장 길지만 레몬 엔터에 들어온 지 2주도 안 된 마당에 가타부타 말 꺼내기가 난감했다.
갓 부임한 중대장이 주임 원사들 토론에 끼는 것 같다고나 할까.
“형들, 우리 빨리 결정해야 돼요.”
서리혁이 마룻바닥을 탁탁 치며 말했다.
“편곡 작업까지 치면 시간이 더 걸린단 말이에요.”
“이사님이 편곡 안 해 주신대?”
“이번에 윤찬혁 선배님 앨범 작업 때문에 이사님이랑 엔지니어 분들 모두 바쁘대요.”
“완전 우리끼리 해야 되는구나.”
“여기에 안무까지 짜면 실제 연습 시간은 2주? 그 정도 나올걸요.”
“그럼 어서 정하자.”
“일단 DNS 쪽에서 뭐 하는지 이야기 들은 거 없어?”
연말 평가 주제는 서로 다른 두 개 곡을 연결시키는 퍼포먼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1절과 2절을 부르는 것이다.
노래를 선정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골머리를 끙끙 앓던 녀석들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지호랑 우주 형은 의견 없어요?”
“전 형들이 뭘 하든 다 좋아여.”
나머지 세 쌍의 눈동자가 내게 향한다.
“나는 의견이 있긴 한데.”
“그래요? 뭐든 좋으니까 말해 보세요.”
“……이런 말 하기는 좀 미안하지만, 내 생각에 너희들이 지금 하는 방식은 좀 아닌 것 같아.”
갑자기 조용해지는 분위기.
눈매를 지그시 모은 서리혁의 말투에 가시가 묻어 나왔다.
“뭐가 이상한데요?”
“내가 얘기를 들어 보니까 대부분 DNS가 뭘 할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요?”
“라이벌을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건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아니잖아. 나는 무대의 본질을 고려해야 한다고 봐.”
썩 호의적인 반응은 아니다.
‘님이 뭘 아는데요.’하는 듯한 표정이 여러 얼굴 위로 스쳐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갔다간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나까지 망할 판이었으니까.
“나는 관객들을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봐.”
“관객이요?”
“애초에 우리가 무대에 서는 이유는 재밌어서잖아. 그리고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게 우리의 목적이고.”
모든 엔터테이너의 목표는 대중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다.
“퍼포먼스 테마나 곡을 선정하기 전에 관객들 성향부터 먼저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할머니 백반집의 매출을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릇 음식 장사를 하려면 근처 상권이 어떠하고, 요즘 사람들이 무슨 음식을 먹는지, 손님들은 어떠한지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이들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런 요지였다.
옆집 아구찜이 잘된다고 아구찜을 팔 것이 아니라 가게에 오는 손님부터 생각하자는.
김비주가 미소를 지었다.
“일리 있는 이야기네요.”
“일리는 있죠.”
서리혁의 날카로운 눈매가 나에게 향했다.
“근데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잖아요.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걸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누가 몰라요. 중요한 건 구체적인 대안이지.”
“아이디어도 있어.”
“그래요? 그럼 들려주세요.”
나는 내 계획을 말해 주었다.
처음 주제를 들었을 때부터 떠올렸던 구상이었다.
우리 매력을 살리면서 관객들도 만족시킬 수 있는 무대.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전 형 아이디어도 좋아여.”
“괜찮긴 한데 좀 애매하지 않을까요? 모 아니면 도인데.”
“저는 랩 파트만 보장되면 환영이에요.”
“너무 난이도가 높아요. 구상은 마음에 드는데 이거 편곡하는 데만 2주는 걸릴걸요. 우리 중에 편곡할 줄 아는 사람은 중현이 형이랑 저밖에 없고요.”
그건 해결책이 있지.
“나 편곡할 줄 알아.”
“아니.”
서리혁이 답답하다는 듯 재차 말했다.
“편곡을 할 줄 아는 거랑 별개로 난이도가 너무 높다니까요. 편곡할 줄 알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잖아요. 형 작업 끝날 때쯤이면 연말 평가 이미 시작했을 거라니까요.”
“하루.”
“네?”
“하루면 돼.”
조용한 정적이 감돌았다.
다들 ‘지금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얘네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될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 근거도 없이 혼자 자신감에 차서 막 지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지만 나는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이었다.
음악 대학 작곡과를 준비하면서 2년 동안 수능뿐만 아니라 작곡 공부도 열심히 했으니까.
서리혁이 나를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진짜 가능하다고요?”
“당연히 진짜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
“하루나 이틀이면 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나랑 내기할래?”
서리혁이 잠시 머뭇거렸다.
“내기요?”
“그래. 만약 내일 자정까지 내가 편곡을 못 끝내면 일주일 동안 간식은 내가 쏠게.”
“우와, 진짜여?”
지금까지 목석처럼 가만히 있던 막내가 눈을 초롱초롱 떴다.
김중현과 김비주는 흥미롭다는 듯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일주일 간식이라는 말에 솔깃한 눈치였다.
이게 무슨 함정 같은 건가 싶어서 멈칫하던 서리혁에게 내가 나긋나긋한 미소를 보였다.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는 내기잖아.”
“조건은요?”
“응?”
“형은 뭘 원하는데요?”
“간단해.”
내가 답했다.
“내가 이기면 연말 평가 퍼포먼스는 내 뜻대로 구상하게 해 줘.”
“…….”
“어차피 너희한테는 손해 보는 것 없는 내기잖아. 안 그래?”
“맞아여, 잃을 게 없는 내기네여.”
간식에 눈이 팔린 막내가 채근했고, 고3 라인은 동생이 어떻게 할지 조용히 관망했다.
이윽고 고민하던 서리혁이 대답했다.
“좋아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웅크리고 관망하는 전략은 내 성격에 안 맞는다.
기왕 판에 들어왔다면 내가 주도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