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9화
새벽 3시.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한 연습실.
나는 악보를 그리고 있었다.
귀로는 노래를 듣고 손은 음표를 그려 넣고.
여기다 뭐 넣지? 기타? 건반?
편곡을 할 줄 안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공부도 공부지만, TJ 엔터에 있을 적에 여러 프로듀서들로부터 기본기를 탄탄하게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초코 드링크를 한 모금 들이켰다.
대충 이 정도면 얼개는 잡았어.
주변에 흐트러진 수십 장의 A4 용지.
어지러워 보이지만 규칙성을 가지고 배열한 것이다.
일종의 마인드맵이라고 할까.
나열된 A4 용지들을 머릿속에 입력하듯 집중하며 바라본 나는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일단 무대부터 만드는 거야.
우리가 설 무대가 고등학교 강당이었다.
허허벌판.
내 머릿속의 광활한 들판에 내가 인터넷으로 검색한 해당 학교의 강당이 모형처럼 세워진다.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무대.
나는 악기를 설치했다.
기타, 베이스, 건반, 드럼, 색소폰, 첼로 등등.
이제 사람을 올려 보자고.
허허벌판 위의 무대에 불이 들어온다.
1번 김비주.
2번 김중현.
3번 서리혁.
4번 왕지호.
5번 선우주.
차례차례로 들어온 연습생들이 무대 위에 서고 노래를 시작한다.
처음 공연은 반주 없이 노래 가사만 이어진다.
이게 뭐지?
머릿속으로 다섯 목소리를 하나로 합쳤을 때 나는 흠칫 놀랐다.
다섯 목소리가 만들어 내는 화음 때문이었다.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음역대가 모여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이래서 조 이사님이 나를 뽑은 거구나.
지금껏 품고 있던 미스터리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조규환 이사는 아마도 TV 인터뷰에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듣고 이런 화음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완벽한 하모니.
하지만 감탄은 길지 않았다.
이제 새로운 작업을 해야 했으니까.
나는 머릿속에 있는 악기들을 하나씩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중간중간 즉흥적으로 수정도 하면서 작업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 진척이 있을 때마다 나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새벽 3시 반.
다시 눈을 감고 작업에 들어간다.
새벽 4시.
완벽한 것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했다.
새벽 5시.
마침내 최종 편곡을 완성했을 때, 나는 홀린 사람처럼 그것을 하나의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다.
최종 작업물을 만드는 게 오래 걸렸지, 옮기는 작업은 금방이었다.
“완성이다.”
눈앞에 완성된 것은 어디까지나 종이에 쓴 버전이었다.
아이들에게 호언장담한 대로 완성된 것을 만들려면 이제 작업실로 올라가 컴퓨터를 켜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회사에 아무도 없을뿐더러 나 역시도 그런 작업을 할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피곤하다.
졸음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몽마의 유혹에 나는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 * *
새벽 5시 반.
레몬 엔터의 제작이사 조규환은 차에서 내리며 아메리카노를 흡입했다.
손수 제조한 카페인 만땅 드링크.
그걸 한 모금 들이키자 정신이 깨어나는 듯했다.
“아, 골 땡겨.”
최근 일주일 동안 수면 시간은 도합 10시간.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눈을 붙이긴 했지만 온몸의 신경 세포는 아직도 제발 쉬게 해 달라며 빌고 있었다.
‘찬혁이 앨범만 끝나면 푹 자야지.’
지하 주차장을 나와 계단으로 가려던 조규환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뭐지?’
연습실이 있는 복도 쪽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 밤이라도 샜나?’
문득 드는 호기심에 조규환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스칼렛이 데뷔했으니 남은 연습생들이라곤 다섯 명뿐이다.
그중에서 밤을 셀 만한 인물은 둘 정도.
‘비주인가? 아니면 리혁이인가?’
철없는 막내나 세상만사 태평한 중현이는 애초에 논외다.
그 둘의 얼굴을 기대하고 갔던 조규환은 연습실 창문 아래로 의외의 얼굴을 발견했다.
‘선우주?’
바로 자신이 섭외한 뉴 페이스였다.
‘얘는 왜 집에도 안 가고 밤을 샜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이내 특이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사방에 흩어진 이면지 더미.
조심스럽게 연습실 안으로 들어간 조규환은 음표처럼 생긴 점들이 그려진 종이를 발견했다.
보자마자 딱 감이 온다.
‘연말 평가 과제 때문인가 보네.’
잠시 눈썹을 찌푸렸던 그는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조규환은 오래 걸리지 않아 상대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종이를 사방에 배치해 놨는지 파악했다.
‘잠깐만.’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완성본, 완성본은 어디 있지?’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아기처럼 손에 완성본을 꼭 움켜쥔 선우주.
상대가 깰까 봐 걱정도 들었지만 지금은 음악인으로서 호기심이 먼저였기에 조규환은 종이를 상대의 손아귀에서 빼냈다.
‘어디 보자.’
새근새근한 숨소리를 배경으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울렸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완전히 녹을 때까지 조규환은 붙박이처럼 멈춰 서서 종이를 훑었다.
그러곤 미소를 지었다.
‘이것 봐라.’
자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는 조규환의 눈동자가 즐거운 빛을 머금었다.
* * *
꿈을 꿨다.
돼지들이랑 삼겹살 파티를 하러 관광버스를 타고 평양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기사님이 갑자기 운전대를 놓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놀라서 운전대를 가리켰다.
“어, 기사님! 운전대-”
“지금부터 여러분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EDM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꿀렁꿀렁.
기사님과 돼지들이 환호하고 춤을 추면서 버스가 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으허어……!”
식은땀과 함께 눈을 떠보니 연습실이다.
“허억…….”
완전 개꿈 아닌가.
어제 받았던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꿈의 여파에서 허우적대던 나는 손이 허전함을 느꼈다.
어라?
어디로 갔지?
내가 작성한 악보를 찾으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 내 몸에 덮여 있었던 뭔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캐시미어 코트.
척 보기에도 몇 백은 하겠다 싶은 코트였다.
‘이건 또 뭐야?’
어쩐지 제법 덥게 잤다 했더니.
정체불명의 코트와 사라진 종이의 미스터리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때, 타이밍 좋게 메시지가 왔다.
발신자는 조규환 이사였다.
-일어나면 2층 녹음실로.
-PS. 내 코트도 가지고 와.
“이사님이 가져갔구나.”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비싸 보이는 코트를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세종대왕님이 곤룡포를 덮어 줬을 때 신숙주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지 짐작 가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날 왜 부르는 거지?
* * *
레몬 엔터테인먼트의 2층은 녹음실과 복잡한 장비들로 가득했다.
이곳이 작업 공간인 듯했다.
조 이사가 말한 녹음실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On Air]
올라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연습실 ‘On Air’ 전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으니까.
똑똑-
내 노크에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
문을 열자 익숙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TJ 엔터에서도 지긋지긋하게 봤던 녹음실.
테이블에는 조규환 이사가 볼펜을 딸깍거리며 종이를 보고 있고, 녹음 부스 안에 있는 남자가 열창을 하고 있다.
어? 저 사람.
자세히 보니 윤찬혁이다.
K-Net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 출신의 가수.
탑 클래스 수준의 보컬로 현재 음원 시장에서 몹시 잘나가는 음원 강자 중 하나다.
음악 방송으로만 접한 사람을 실물로 보니 뭔가 신기하다.
조규환 이사가 나를 흘깃 보더니 토크 백 버튼을 눌렀다.
“찬혁아, 10분 쉬자.”
-왜?
“좀 쉬라면 쉬어. 이 자식아.”
조 이사의 농담 어린 면박에 윤찬혁은 아쉽다는 듯 부스를 나왔다.
우와, TV 화면과 똑같이 생겼네.
친근한 동네 형을 연상시키는 외모의 가수가 나에게 호기심을 보였다.
“형, 얘는 또 누구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연습생이야. 인사해.”
나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연습생, 선우주입니다.”
“아우, 부담스러. 그냥, 형이라고 불러. 선배는 무슨.”
너스레를 떨던 윤찬혁이 조 이사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얜 왜 불렀어?”
“뭐. 개인적으로 좀 할 얘기가 있어서. 미안한데 자리 좀 비켜 주라.”
“얼마나?”
“커피 한 잔 마시고 와.”
“10분?”
“그것보단 좀 더.”
“안 돼, 형.”
윤찬혁이 고개를 저었다.
“나 삘받을 때 녹음 가야 된다니까. 그런 걸로 알고. 10분 뒤에 돌아오는 걸로 알겠수다.”
“야.”
“음흠흠.”
“야, 윤찬혁!”
“I’m singing in the rain~ I’m singing in the rain~”
윤찬혁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얄밉게 손을 흔들었다.
조규환 이사가 혀를 찼다.
프로듀서와 가수가 아니라 친한 형, 동생 사이 같았다.
“두 분 엄청 친하신 것 같네요.”
“친하기는.”
조규환이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쟤 사람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내가 너 키우느라 힘들었어.’라고 말하는 할머니가 떠올랐던 까닭에 나는 조용히 웃었다.
“잠은 잘 잤니?”
“예, 코트 덮어 주셔서 덕분에 잘 잤어요.”
“그래, 다행이네.”
내가 소파에 앉자, 이사님은 테이블 서랍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바로 내가 만든 악보였다.
“이거 네가 한 거 맞지?”
“네.”
“그럼 몇 가지 좀 물어보자.”
“네.”
뭐지?
“혹시 음악 배운 적 있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지…….”
“그러니까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워 봤냐는 거야. 예를 들어 화성학이라든가, 음악 이론이라든가.”
“아, 네.”
기억을 더듬던 내가 대답했다.
“전에 있던 회사에서 좀 배웠어요.”
“TJ 엔터?”
“네. 거기 계시던 프로듀서님들이 좀 가르쳐 주셨거든요. 미디 다루는 법이나 비트 쓰는 법 같은 거요.”
“어쩐지 기본기가 탄탄하다 했네.”
조규환 이사가 턱을 쓰다듬었다.
“편곡한 거 보니까 악기도 좀 다룰 줄 아는 것 같고.”
“맞아요.”
“피아노?”
“네. 초등학교 때 콩쿠르 준비하느라 연습 많이 했거든요.”
“다른 거는?”
“기타 조금이요.”
프로듀서가 턱을 쓰다듬는다.
“하루 만에 한 거구나. 이 정도 수준의 편곡을.”
“네, 그런데 보다시피 날림으로 해서.”
“아냐, 아냐. 엄청 잘했어. 만약에 내가 대학 교수였으면 A는 줬을 거야.”
그 정도인가?
“작곡에 재능 있다는 얘기,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지?”
“전에 있던 회사에서 조금 듣긴 했어요.”
“이 정도면 조금이 아니라 많이 들었을 텐데. 겸손하기도 하네.”
유명 작곡가에게 받은 칭찬에 황송해하고 있을 때, 상대의 입에서 정말 예상치 못한 대사가 나왔다.
“우주야.”
“네.”
“너 나한테 작곡 배워 볼래?”
“네?”
멍한 기분에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조금 당황스럽지?”
“…….”
“다름이 아니라, 네가 한 편곡에서 잠재력이 보이거든. 물론,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이기는 한데… 충분히 손길만 거치면 예쁜 보석이 탄생할 것 같거든.”
그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때? 나한테 잘 배워 두면 나중에 홍보할 때 작곡돌, 그런 이름으로 나갈 수도 있는데.”
“할게요.”
“응?”
“작곡 배울게요.”
이게 웬 떡이야.
업계 레전드가 초특급 스킬을 전수해 준다는 제안을 하고 있었다.
이걸 누가 거절할까.
생각이 바뀌기 전에 얼른 받아들여야지.
내가 심사숙고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지 조규환 이사는 살짝 멈칫했다.
“……아, 잘됐네. 그러면.”
그가 USB를 건네주었다.
“일단 이것부터 받아.”
“이게…….”
“네가 편곡한 걸 컴퓨터로 옮긴 거야. 중간에 약간 손 좀 봤지.”
“우와, 감사합니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나 혼자 했으면 아마 오늘 저녁이나 돼야 끝났을 텐데, 할 일이 순식간에 끝나 버린 것이다.
“그럼, 보자. 작곡을 가르치려면 내 스케줄이…….”
불경처럼 빼곡히 글자가 쓰인 달력을 보면서 언제 작곡을 배울지 스케줄을 협의하는 것도 잠시,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우리의 대화는 파이팅 넘치는 발라드 가수에 의해 중단됐다.
“뭐야. 아직도 안 끝났어?”
‘녹음! 그리고 또 녹음!’하는 듯한 발라드 가수의 불타오르는 눈동자에 우리 둘은 웃음을 터뜨렸다.
* * *
널 사랑한 게 내 흉터가 될까 봐
녹음 부스에서 노래에 몰입한 윤찬혁.
조규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간중간 디렉팅을 건넸다.
“찬혁아, 이거 스타일리쉬한 노래니까 조금 섬세하게 불러 줘야 돼.”
-알겠습니다요.
디렉팅을 알아들었는지 금세 노래 부르는 법이 바뀐다.
역시 프로다.
하지만 지금 조규환이 진짜 집중하는 건 윤찬혁이 아니었다.
조규환은 오늘 아침 윤석환 실장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우주요?’
회사 휴게실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윤석환 실장이 물었다.
‘왜 우주 이야기를 갑자기…….’
‘오늘 새벽에 이걸 봤거든요.’
‘악보?’
‘보아하니 연말 평가에 나갈 노래를 본인 딴에 잘 편곡한 것 같은데.’
조규환이 오선지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아이돌 작곡은 봤어도 편곡은 처음 보거든요. 실장님도 아시겠지만 편곡이 훨씬 어려운 겁니다. 음악을 모르면 할 수 없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윤석환이 말했다.
‘애가 원래부터 그쪽에 감이 좀 있었어요. TJ에서도 그걸 알아서 특별하게 관리했죠. 잘나가는 프로듀서도 붙여 주고.’
‘유망주였나 보네요.’
‘춤이 안 되는 애가 어떻게 거기서 버텼겠어요.’
‘춤? 잘 추던데요.’
‘이사님이 걔를 이번에 봐서 그래요. 옛날에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통나무가 절구 찧는 것 같았어요.’
뭔가 기괴한 장면이 떠오른다.
‘뭐. 그래서 우주가 나간다고 했을 때도 회사에서도 아까워했어요. 정 안 되면 A&R 쪽으로 들여 볼까 생각도 했거든요. 악기도 잘 다루고, 워낙 재능이 많은 친구니까.’
‘그런데요?’
‘싫대요. 자기는 아이돌이 아니면.’
‘특이한 친구네요.’
조용히 웃던 조규환은 상대의 말에서 뭔가를 포착했다.
‘잠깐만요. 악기도 다룰 줄 알아요?’
‘다 유전의 힘이죠.’
‘유전이라니요?’
‘아, 이사님은 모르시구나. 우주 아버님이 누군지.’
호기심을 드러내는 조규환에게 윤석환은 어떤 이름 석 자를 말했다.
그리고 조규환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