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2화
메모해 둬야지.
연습생에게 만병통치약은 방송국 카메라….
“중현이 형. 우리 카메라에 잘 나오는 거 같아요?”
“백퍼 잘 나올 듯.”
속닥거리는 우리 애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의욕을 어찌 고취시켜야 하나 고민하던 내가 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었다.
스트릿 보이즈고 뉴블랙이고 위 아 더 월드가 되는 순간.
스트릿 보이즈 쪽에서 분홍 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엄지를 들었다.
그 의미를 해석하면 이런 것이 아닐까.
‘카메라 좋아. 최고야. 짜릿해.’
우리 쪽에서도 김중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야, 그런 거 하지 마.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얘네 방금 전까지 신경전 하던 애들 아니었어?
하지만 뭔가 귀엽기도 해서 조용히 웃는 동안, 스트릿 보이즈의 리더와 내 눈이 문득 마주쳤다.
서로 똑같은 눈빛이었다.
카메라와 방송국 사람들의 관심에 히히 웃는 동생들을 보며 어이없어하는 느낌.
‘그쪽도 그렇군요.’
‘수고 많으십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에게 나도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뉴블랙이 연습을 하는 동안, 윤석환은 밖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사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인파 사이에서 그 인물을 발견했다.
밍크코트를 입은 70대 여성.
여성의 얼굴을 스마트폰에 있는 사진과 대조한 윤석환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우주네 할머님, 맞으시죠?”
“예, 맞긴 한데.”
상대가 미심쩍은 눈으로 위아래를 훑어본다.
“그쪽은 뉘시요?”
“저는 윤석환이라고 합니다. 우주 담당 매니저예요.”
“아아, 얘기 들었는데.”
김덕순 여사가 잇몸이 만개한 웃음을 보였다.
“그, 선생님이 우리 손자 보고 아이돌 하자고 매달렸담서요?”
“예?”
“얘가 그러던데, 아는 매니저가 있는데 제발 좀 같이해 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하게 됐다고.”
윤석환은 이야기의 전모를 깨달았다.
선우주, 이놈의 자식.
다시 아이돌 한다고 하면 혼날까 봐 할머니한테 나를 팔았구먼.
“아, 뭘 멀뚱멀뚱 정승처럼 있어요?”
“예?”
“길 안내해 주려고 온 거 아녀요?”
“그렇습니다만.”
“그럼 안내를 해 줘야지! 내가 길을 하나도 못 봐 가지고 이 동네를 다 헤집고 다녔다니까. 다리가 아파서 죽겄어.”
“예예, 할머님. 당연히 안내해 드려야죠.”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무릎이 아픈지 인상을 쓰는 김덕순 여사에 맞춰서 윤석환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강당을 향해 가는 동안, 선우주의 할머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실장님이면 높은 사람이신가?”
“높은 사람은 아닙니다. 그냥 애들 뒤치다꺼리하는 실무자예요.”
“아니, 내가 괜히 심술 부린 걸로 우리 손주한테 피해가 갈까 봐 그러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화를 버럭버럭 내던 사람이 손주가 걸리니 갑자기 조심스러워졌다.
윤석환이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정말로요.”
“미안혀요. 내가 아까는 다리가 너무 아파서 그랬어.”
“괜찮습니다. 하하.”
“그런데 걔가 정말로 잘혀요?”
“예?”
“아니, 예전에 그 다른 회사 들어갈 때 말이에요. 계약이고 뭐고 그런 것만 해 줬지, 얘가 노래 부르고 춤추는 거를 못 봤어서.”
“모르세요?”
“내가 시켜도 절대 안 해. 고것이 못되 처먹어 가지고, 내가 뭐 시키기만 하면 몸을 배배 꼬고 부끄러워함서 ‘할매, 나 못해요’, 그런다니까.”
“의외네요. 그런 성격이 아닌데.”
어느새 강당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져 있었다.
다섯 개 기획사에서 온 임직원들과 연습생들 가족까지 합치니 대략 100명이 넘었다.
김덕순 여사를 의자로 안내한 윤석환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무대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정말, 손자분이 한 달 동안 피땀 흘려서 준비한 무대거든요.”
“그려요?”
“보시면 알 겁니다.”
윤석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 *
연습생 가족들과 회사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연말 평가가 드디어 막을 올렸다.
사회를 맡은 사람은 꽤 유명한 개그맨이었다.
“TV에 나오는 사람이야.”
“어머, 어머, 그 낚시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
덤덤한 관계자들과 달리 연습생 가족들은 연예인의 등장에 연신 신기하다는 듯 수다를 떨었다.
사회자가 입담을 펼칠 때마다 관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물론 모두가 그걸 즐기는 건 아니었다.
“빨리빨리 진행이나 하지, 좀.”
“참을성 좀 가져, 오빠.”
“넌 안 지루하냐. 난 얼른 끝내고 밥 먹으러 가고 싶은데.”
하품을 쩍쩍하는 발라드 가수 윤찬혁.
장소원은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오빠는 요새 행사도 안 뛰면서 뭐가 그렇게 피곤해?”
“너도 컴백 준비랑 콘서트 준비 동시에 해 봐.”
“아, 맞다. 언제 컴백한다고 했지?”
“다음 달.”
“다행이다. 겹치는 줄 알고 식겁했네.”
장소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발라드 강자와 음원 시기가 겹치면 괜히 피 보는 거다. 그런 상황은 피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윤찬혁이 시큰둥한 어조로 물었다.
“너는 언제 낼 건데?”
“회사랑 협의 중이야.”
“아직도?”
“요즘 회사 재정이 별로라잖아. 내년 2월쯤 내고 싶긴 한데 이것도 사정이 따라 줘야지.”
윤찬혁은 이내 상대가 최근 진행하고 있다는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너 콜라보한다고 했었나?”
“맞아.”
“같이 부를 가수는 구했어?”
“아니, 아직.”
장소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곡의 베이스는 만들었는데 같이 부를 가수를 못 찾겠어서 말이야. 좀 참신한 느낌이 나면 좋겠는데 요새 그런 가수가 있어야지.”
“나는 어때?”
“오빠가 참신한 느낌은 아니지 않나?”
“됐다, 이것아.”
윤찬혁이 투덜거렸다.
“어차피 나도 바빠서 못해.”
왠지 변명 같은 덧붙임에 장소원이 피식 웃었다.
평소 술자리에서 자주 만나는 술친구답게 격의 없는 대화였다.
자질구레한 대화를 만담처럼 주고받던 그들은 얼핏 보면 놀러온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공연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180도로 변신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눈빛.
프로다운 모습으로 변한 그들은 조용히 채점지 항목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연말 평가.
참가자가 많은 회사도 있었기에 총 무대는 10팀이었다.
연습생 가족이 참관하기 때문에 월말 평가처럼 무대가 끝나자마자 질책하거나 칭찬하는 시간은 없었다.
연말 평가는 가족들을 위한 행사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아들딸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그런 상황이니 가족들 다 보는 앞에서 ‘제 점수는요.’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 심사위원들이 매긴 점수를 토대로 1위부터 3위까지 순위는 발표하곤 했다.
무대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심사위원석에서 날카로운 평가들이 오갔다.
“어떠신 것 같아요?”
그중에는 혹평도 있었고.
“처음에는 얘네가 섹시함을 어필하려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하나도 섹시하지가 않아요. 표정도 작위적이고.”
“애들이 좀 긴장한 것 같은데?”
“연습생이라고 귀엽게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긴장은 해도 돼요. 하지만 그걸 무대에서 티 내면 안 되죠.”
한편으론 호평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다 좋네요. 목소리, 음정, 톤도 안정적이고.”
“얘네는 자신감이 더 있어도 될 것 같아요. 실력을 보면 저 정도로 겸손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리고 전반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된 의견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올해 수준이 높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심사위원들이 진행표를 바라보았다.
“이제 두 개만 남았죠? 레몬이랑 DNS.”
“DNS면 이번에 데뷔하는 친구들 아닌가? 스트릿 파이터.”
“스트릿 보이즈에요, 선생님.”
“아, 그렇구먼.”
“어디가 먼저 해요? 아, 레몬인가 보네. 지금 나오네요.”
“어머, 다들 잘생겼다.”
다섯 명의 연습생이 각자 무대 의상을 입고 나타났다.
학예회에서 그러하듯 의례적인 박수가 나오는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갈색 머리의 미남이 마이크를 잡았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뉴블랙입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저는 이제 스물두 살이 되는 연습생 선우주라고 합니다.
뒤이어 각자 한마디씩 자신을 소개했다.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이크를 잡고 무대 대형으로 서는 아이들.
“이야, 풋풋하네.”
“애들이 다 내 스타일이다. 귀엽네.”
그런 말을 주고받던 윤찬혁과 장소원은 반주가 나왔을 때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은 트로트였다.
그들만 그런 반응을 보인 게 아니었다.
자리에 있던 심사위원은 물론이고 관계자들은 갑작스러운 사운드에 고개를 들었다.
저마다 호기심 가득한 반응을 보였지만 이중에서 가장 극적인 반응을 보인 이들은 바로 관객들이었다.
지금까지 대놓고 하품을 하던 중년 관객들.
그나마 자기 아들딸이 나올 때나 집중하는 거지, 남의 자식들이 하는 공연에 솔직히 관심이나 가던가.
아이돌 노래는 부모 세대가 이해할 수 없는 문화였다.
이해할 수도 없는 영어 가사가 난무하고 퍼포먼스는 정신만 사나울 뿐 그윽한 맛이나 재미가 없다.
마지막 2팀을 남겼을 때, 부모들은 연신 손목시계를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지루한 공연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때.
바로 그때, 스피커에서 트로트 반주가 나왔을 때 그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무대를 바라보았다.
중년 세대에게 익숙한 명곡 ‘그대 나와 함께하세요.’였다.
살짝 현대적으로 바꾼 편곡이 뒷받침됐지만 주된 멜로디는 모두가 알고 있는 트로트였다.
무대 대형으로 움직인 연습생들.
긴 반주가 지속되는 동안 어느새 객석에서는 단체 박수가 시작됐다.
박자에 맞춰서 짝짝거리는 소리.
이전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서 있던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곤 동시에 한 명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들에게 선우주는 ‘거봐, 내가 말했지.’라는 미소를 보였다.
* * *
“트로트로 시작을 하자고요?”
4주 전, 연습실.
서리혁은 눈썹을 찡그렸다.
납득할 수 없었다.
트로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 세대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뿐, 윗세대 트로트 선배들의 역량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
그러나 그것과 연습생 퍼포먼스는 별개였다.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신선하고 좋잖아.”
“신선한 것도 정도가 있죠. 무대가 장난도 아니고, 옷차림처럼 퍼포먼스도 엄연히 때와 장소가 있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트로트를 하자는 거지.”
선우주가 미소를 지었다.
“첫째, 공연 시간을 생각해 봐. 우리 무대는 9번 아니면 10번이라며? 마지막 순서쯤 되면 심사위원부터 관객까지 모두 지쳐 있을 거 아냐. 우리 가족들이야 우리가 뭘 해도 좋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논리적인 어조였다.
“너희 말대로 안전하게 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연습생들이 고르는 곡이라고 해 봐야 팝송 아니면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빵빵한 노래들뿐이야. 우리 귀에는 다르게 들려도 관객들 입장에서는 비슷비슷한 노래일걸. 그에 반해 트로트로 시작하면 일단 반은 먹고 가는 거지.”
선우주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실제로 비슷한 전략으로 과거 전설적인 가수가 가요제 대상을 거머쥔 적도 있으니까.
모두 납득한 가운데 선우주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건 공연 장소에 관한 건데, 너희 지난번에 태화고등학교에서 공연했어?”
“아뇨. 찬영고등학교에서 했어요.”
“너희가 토론하는 동안 태화고등학교 강당 사진을 검색해 봤거든. 여기 봐봐. 보다시피 연단이 생각보다 협소하지?”
그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었다.
서리혁이 미묘한 감탄을 보내고 있을 때 선우주가 스마트폰에 사진을 띄우며 말했다.
“트로트를 하면 기본적으로 안무 동선을 작게 만드는 게 가능해. 내가 봤을 때, 다른 팀들은 이걸 고려 못해서 버벅거릴걸.”
그 말대로였다.
지금까지 퍼포먼스를 펼친 팀들은 자잘한 실수를 연발했다.
협소한 무대 탓이었다.
화려하고 멋진 안무를 잔뜩 만들었지만 막상 그걸 펼칠 공간이 부족했다.
리허설을 끝마치고 곧바로 동선을 수정해도 한 달 동안 연습한 동작을 당일 바꾸면 버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표정부터 달라지게 된다.
동선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무대에 집중을 못하는 것이다.
퍼포먼스를 펼치는 가수가 집중을 못 하는데 관객이 어찌 집중할 수 있을까.
하지만 뉴블랙은 달랐다.
미리 동선을 정확하게 맞췄기에 무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고 그런 것이 표정의 여유로움으로 드러났다.
관객들이 몸에 긴장을 풀었다.
잘하는데 뭔가 불안한 앞선 무대와 달리 비로소 보는 사람의 마음이 편해지는 무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얘네 봐라?”
당돌한 후배를 바라보듯 장소원이 미소를 지었다.
“오빠네 애들, 안무 담당이 누군지는 몰라도 보통이 아닌데?”
“뭐가?”
“동선을 봐.”
“그게 뭐가 어쨌… 아.”
프로 가수답게 윤찬혁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버벅거리지 않네.”
“공간을 쓰는 솜씨가 제법이네. 팀원 중에 똘똘한 애가 있나 본데? 미리 사전 조사 안 했으면 나올 수가 없는 안무야.”
장소원이 턱을 괴고는 눈을 반짝였다.
“어쩌면 재미있는 무대가 나올 수도 있겠어.”
이윽고 반주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노래가 시작됐다.
첫 타자로 나선 멤버는 왕지호였다.
앳된 얼굴의 중학생이 마이크를 쥐고 등장하자 이목이 집중됐다.
그대 어디에 있나요
여기 있나요 저기 있네요
왜 나를 멀리 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걸
맛깔난 트로트에 어른들이 귀엽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다.
과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소위 말하는 그 나이대 또래의 끼 부림에 사람들이 호감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 반응에 왕지호는 미소를 지었다.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에 올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무대는 가수와 관객이 감정을 교류하는 곳.
관객들이 내비치는 호의가 느껴지자, 가슴이 찌릿하면서 목에 솜털이 솟았다.
트로트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첫 소절은 무조건 지호, 네가 해야 돼.’
‘왜여?’
‘트로트를 하는 이유가 뭐겠어? 관심을 집중시키려고 하는 건데 당연히 가장 시선을 끌 수 있는 멤버가 나가야지.’
그때, 선우주는 말했다.
‘내가 봤을 때 네 강점은 표정 연기야. 끼를 부려서 보는 사람이 시선을 집중시키게 만드는 힘이 있어. 그걸 적극 활용해야 돼.’
자기 파트를 마무리하면서 왕지호는 객석에 윙크와 손가락 하트를 보냈다.
신체 건강한 남성들을 제외한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사이드로 빠지면서 왕지호는 무대로 나오는 선우주와 눈빛 교환을 했다.
고맙다는 눈빛에 부드러운 미소가 화답한다.
선우주가 센터로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 지호를 보며 엄마 미소를 짓고 있던 관객들 사이에서 다른 미소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