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4화
4장. 일상, 그리고 숙소
연말 평가가 끝나고 2주.
3일간 군산에서 보낸 황금 같은 휴가도 잠시, 어느덧 찾아온 새해를 맞아 나는 스물둘이 됐다.
2014년.
새해 벽두부터 연예계는 시끌시끌했다.
유명 걸그룹 멤버와 톱스타 배우의 열애 소식이 연예계 뉴스를 뒤덮었고, TV에서는 90년대를 추억하는 드라마가 연일 화제를 끄는 중이었다.
거기다 다가오는 빅 이벤트까지.
무슨 왕국이라고 했는데.
미튜브에서 예고편을 본 다음부터 지호가 맨날 ‘형! 형! 이거 진짜 꼭 봐야 돼여!’하며 난리를 친 애니메이션이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예매해 줘야 되나.
스마트폰으로 상영 시간표를 확인하던 나는 로그인을 하라는 알림에 창을 닫았다.
에이, 귀찮아.
비주나 리혁이 시키지, 뭐.
그러고는 패딩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치는 신사동 골목.
종종걸음으로 레몬 엔터 사옥으로 들어섰다.
얼른 히터가 나오는 연습실로 가려고 계단으로 갈 때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낯선 인물이 보였다.
검은 마스크에 패딩 잠바를 입은 여자.
엘리베이터 버튼을 몇 번 누르더니 <고장이니 양해 부탁드리겠읍니다>라는 종이를 발견하고 짜증을 부린다.
“아, 빡쳐!”
쩌렁쩌렁한 발성.
가수구나.
“왜 오늘 같은 날 고장 나냐고!”
짐을 들고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열이 오른 모양인 듯했다.
무거워 보이는 캐리어.
“도와 드….”
“왜 하필 오늘이냐구!“
다시 한번 터지는 고함에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나는야 이 회사의 최약체.
소시민인 나는 조용히 없는 사람처럼 지나갈 뿐이었다.
“저기요.”
그리고 실패로 끝나는 탈주.
“저기요?”
까만 마스크가 턱 아래로 내려가자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눈이 크고 개성 있게 예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바로 회사 선배인 스칼렛 멤버 중 하나였다.
“미안한데 이것 좀 도와 줄래요?”
“넵!”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도와 드려야죠.”
사회생활의 기본은 선배들에게 잘 보이고 예쁨 받는 것.
게다가 그래봐야 캐리어 하나 아니던가.
후딱 끝내자고 생각하며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거 엄청 무거우니까 조심-”
“걱정 마세요. 이 정도쯤은 뭐… 흐억!”
캐리어를 번쩍 들다 엎어지는 나.
“말했잖아요. 엄청 무겁다고.”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전역한 뒤로 매일 팔굽혀펴기를 100개씩 하는데도 근력에 무리가 오다니.
체감으론 쌀 한 가마니 같다.
몇 차례를 도전한 후에야 겨우 캐리어를 들자, 상대가 계단을 올라가 손을 내밀었다.
“뭐예요?”
“옮기는 거 도와 달라고 했잖아요.”
“네. 그랬죠.”
“같이 들고 가자는 뜻이었는데.”
냉큼 짐을 넘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략 150 남짓한 키와 호리호리한 팔다리를 보고는 생각을 접었다.
나 혼자 하는 게 마음이 편할 듯싶었다.
“그냥 제가 들게요, 선배님. 길만 안내해 주세요.”
내가 천천히 올라갈 때마다, 가위바위보 내기를 하듯 한 칸씩 올라가던 사람이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못 보던 얼굴인데. 그쪽이 새로 온 연습생이죠?”
“네.”
“내가 선배 가수예요.”
근엄한 얼굴로 선배미를 뿜뿜하는 상대의 모습에 웃었다.
“내가 누군지는 당연히 알 테고.”
“당연하죠.”
이름도 알고 있다.
“데이지 선배님 아니세요?”
“맞아요.”
스칼렛의 데이지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한 후배님이시네요.”
“잘 부탁 드립… 흐어어어.”
“엇, 괜찮아요?”
“괘, 괜찮습니다. 선배님.”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할아버지 표정이에요.”
“…….”
내 마음에 비가 주륵주륵 내렸다.
“휴.”
레몬 엔터 2층.
매주 조규환 이사에게 작곡을 배우는 녹음실을 지나서 깊숙이 들어가자 또 다른 작업실이 나왔다.
그곳에서 운반을 마쳤을 때 겨드랑이와 등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고생했어요.”
땀을 닦으라는 듯 티슈를 내미는 데이지.
눈가를 콕콕 찍으면서 그녀가 캐리어를 여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대체 뭐가 들었던 걸까.
어찌나 야무지게 포장했는지 홍삼 박스가 한가득이었다.
저러니까 무겁지.
거기에 또 다른 물건이 추가되면서 나는 당황했다.
“작업실에 아령을 들고 다니세요?”
“의자가 높아서 발 괘는 용도예요. 이렇게.”
작은 키의 선배 가수가 아령을 낑낑 들더니 작업실 의자 밑에 놓고는 앉아서 발로 톡톡 두드렸다.
“높이가 딱이죠?”
뭔가 ‘짠, 대단하지?’ 하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멍할 뿐이었다.
“선배님.”
“네?”
“혹시 발받침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21세기에 발명된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데.”
“…….”
“선배님?”
제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으시군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업실 냉장고에 홍삼 음료를 채우던 데이지가 여러 봉을 품에 가득 담아 건네주었다.
“고생했는데 많이 먹어요.”
“감사합니다.”
홍삼 즙을 받아 들자마자 나는 곧바로 마셨다.
씁쓸하고 건강한 맛.
역시 공짜가 최고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물었다.
“여기가 스칼렛 선배님들 작업실인가 보네요.”
“넵.”
부럽다.
우리도 나중에 작업실 하나는 얻을 수 있으려나.
“인테리어는 누가 한 거예요?”
“누구일 것 같아요?”
기대하는 듯 되묻는 모습에 나는 모르는 척해 주었다.
“혹시 선배님이 하셨나요?”
“맞아요. 엄청 잘했죠?”
핑크 소파에 얼룩말 쿠션.
인테리어 관계자가 본다면 무료로 바꿔 줄 인테리어였다.
“참.”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데이지가 물었다.
“얼마 전에 들었는데 장소원 선배랑 콜라보 한다면서요?”
“네.”
“회사에 소문 엄청 돌았어요.”
“무슨 소문이요?”
“새로 들어온 연습생이 제대로 해냈다고 홍보팀 직원들이 한참 수다 떨던데요? 공짜로 홍보하게 생겼다고 팀장님 입이 귀에 걸렸대요.”
상대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지금 어떻게 되고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화이 엔터랑 협상 진행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데이지가 ‘흐으음’ 하고는 입을 열었다.
“뭐, 잘됐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슬슬 레슨 시작할 시간이네요. 가 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나가려는 나를 그녀가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패딩에서 꺼낸 지갑을 열어서 뭔가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수고비에요. 애들이랑 과자라도 사먹어요.”
신사임당이 2명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아, 괜찮은데…….”
“입꼬리라도 내리고 말하던가요.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받아 가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선배님. 애들이랑 식사 맛있게 사 먹을게요.”
“선배는 무슨.”
다음에는 편하게 부르라는 말이 이어질 차례였다.
“다음에는 누나라고 불러요.”
“예?”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라고요.”
“아, 원하신다면 불러 드릴 수 있기는 한데…….”
내 말에 상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고등학생 아니예요?”
“저 스물둘인데요.”
갑자기 말이 없어진 상대가 눈을 깜빡거렸다.
“……진짜요?”
“네.”
“어, 되게 동안이네요. 고생했고 다음에 봐요.”
민망하게 말을 얼버무리는 데이지를 보며 나는 조용히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왔다.
문을 닫자 ‘쪽팔려!’ 같은 외침이 어렴풋이 들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창에 ‘데이지’를 입력하자 프로필이 나타난다.
-Day-Z (김나윤)
-가수
-출생 : 1996.03.27
-소속 그룹 : SCARLET
-소속사 : 레몬 엔터테인먼트
나보다 3살이나 어리구나.
이 흐뭇한 기분은 뭘까.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이십 대가 되니까 어리다는 말만 들어도 흐뭇하다.
얼른 동생들한테 얘기해 줘야지.
* * *
점심시간.
오전 일과를 끝내고 우리는 근처 맛집에 와 있었다.
흑돼지 정육 식당.
값싸고 맛이 좋아 점심때마다 찾는 우리만의 명소였다.
평소처럼 불백 정식을 시킨 우리는 내가 아침에 겪은 일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여?”
“저 스물둘인데요, 하니까 순간 동공이 막 흔들리시던데.”
멤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 종일 연습실에 있다 보니 별것 아닌 것으로도 웃음이 나오는 우리였다.
비주가 덧붙였다.
“저는 나윤이가 이해 가요.”
“응?”
“저도 처음에 형 만났을 때 그랬거든요. 저보다 어린 줄 알았어요.”
“나도,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니까.”
“맞아요. 처음부터 나이 안 말했으면 우리도 실수했지.”
“흐음.”
이 만족스러운 기분은 뭘까.
“하긴, 내가 좀 동안이지?”
“에이, 그 정돈 아니에요.”
중현이가 웃으며 말했다.
“형은 보면 볼수록 그 늙은 끼가 있어요.”
“맞아여.”
“이 형 그런 거 있지 않아? 틈만 나면 아이고~ 하면서 허리 두드리고.”
‘ㅋㅋㅋ’ 비슷한 웃음이 아이들 사이에서 번졌다.
많이 친해져서 그런 걸까.
조곤조곤 팩폭을 날리는데 망설임이 없다.
나는 가스버너 위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오리 전골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누군가 투척한 5만 원으로 먹는 특식이었다.
그 맛 좋은 냄새를 음미하던 중현이가 말했다.
“근데 나윤이 돈 엄청 벌었나 보네. 5만 원짜리도 바로 꺼내서 쾌척하고.”
“당연히 많죠. 솔직히 10만 원 무리 없을걸요.”
뜨끔.
“지금 스칼렛이면 잘나가는 1군 걸그룹이잖아요. 1~2년 정도 더 하면 이 동네 건물도 현금으로 살 것 같은데.”
“그 정도야?”
내 물음에 리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출만 따지면 더 큰 그룹도 많긴 한데 우리 회사가 정산이 좋아요.”
“오호.”
“우주 형, 그것도 모르고 들어온 거예여?”
막내가 설명해 주었다.
중소 기획사 중에서 레몬 엔터테인먼트는 소속 연예인 복지에 있어서 4대 기획사와 맞먹는 몇 안 되는 회사라나.
오.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인터넷을 보여주면서 다른 회사 정산은 어떤지 설명하던 막내는 문득 뭔가 떠올랐다는 듯 주제를 바꿨다.
“맞다. 형들, 그거 알아여? 얼마 전에 우리 관련 글 올라왔는데요.”
“뭐?”
“잠시만여.”
‘진짜? 진짜?’ 하면서 모두가 우르르 지호 곁으로 모였다.
“어제 스트릿 보이즈 리얼리티 첫 방 했거든여. 그래서 반응이 몇 개 올라왔는데, 그중에 저희도 껴 있어여.”
[케이넷 신규 리얼리티 본 사람?]
나덕은 주로 리얼리티로 돌덕질 시작함
TV 틀었는데 스트릿 보이즈? 걔네 리얼리티 나오더라
별로 재미없어서 보다가 끄려고 했는데 그 연말 평가인지 뭔지 하는 장면만 재밌게 봤어 ㅋㅋ
오히려 레몬 엔터에서 나온 애들이 더 잘하는 듯
[댓글 37개]
-난 어지간하면 리얼리티나 예능으로 입덕 안함
-리얼리티 노잼이더라.. 아직 1화라서 애매하지만 별로 더 보고 싶진 않음
┖솔직히 데뷔 리얼리티 재밌는 돌이 어딨어? 풋풋한 맛에 보는 거지
-본문 짤에 나온 갈색 머리 이름 아는 사람! 급해!
┖뭘 또 급해 ㅋㅋㅋㅋ
┖알아서 뭐 하게 데뷔도 안 한 애들인데
┖데뷔도 안 한 연생 프로필을 어떻게 아냐
-잠깐 나왔는데 잘하더라.. 오히려 얘네한테 시선이 감
-다 기획사 직원들이냐 개별로더만. 그냥 잘생겨서 뿅뿅대는 건 아니고?
┖아 존나 눈새 남덕 냄새난다 ㄲㅈ
갑자기 중간 부분부터 싸움이 시작된 까닭에 40개 되는 댓글 가운데 70퍼센트가 싸움이었다.
“뭐야?”
리혁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우리 반응이라면서 이게 다야?”
“우주 형에 대한 반응이니까 엄밀히 말하면 우리 반응이져.”
“그래, 리혁아.”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언급된 것 자체만 해도 기분 좋잖아.”
멤버들은 자신들에 대한 언급은 없는지 댓글을 샅샅이 훑어 내려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용해진다.
이윽고 어떤 링크를 타고 동영상을 재생하더니 단체로 날 바라보았다.
“왜들 그래?”
“우주 형.”
멤버들의 눈동자에 감탄이 어렸다.
“할아버지 구하려고 수능도 포기했어요?”
다들 바라보는 눈빛이 뭔가 제대로 오해한 듯싶었다.
* * *
“어!”
쉬는 시간.
내가 물을 마시고 연습실로 돌아오자, 지호가 외친다.
“의인이다! 의인!”
그걸 필두로 이어지는 각종 드립.
너네 이거에 맛들렸구나.
의인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을 들을 때마다 창피해하는 내 모습이 재밌는지 동생들이 한마디씩 던진다.
그런 식으로 말장난을 하며 쉬고 있을 때, 우리의 매니저 윤석환 씨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뭐야, 너희 연습 안 해?”
꼭 쉴 때마다 온다니까.
시험 기간 때마다 방에 들어와 잔소리를 하는 우리 할머니마냥 잔소리를 하려는 조짐에 선수를 쳤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예요?”
“아, 참.”
석환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한테 알려 줄 게 있어서 왔어. 좋은 소식이 세 가지 있는데 뭐부터 들을래?”
“가장 좋은 것부터여.”
“지금 막 화이 엔터랑 수익 분배 협상 끝났어. 계약했으니까 장소원 씨랑 너희 콜라보레이션 곧바로 진행하게 될 거야.”
드디어 일정 픽스가 됐구나.
“다른 소식은요?”
“두 번째로는 너희 숙소 계약도 끝났어. 이번 주말부터 입주 가능하니까 각자 일정 조절해서 들어오도록 해. 되도록 빨리 들어올수록 좋고.”
숙소도 생기는구나.
다들 시선을 교환하면서 입 모양으로 대박을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좋은 소식이 뭘지 기대하던 우리는 상대의 입에서 나온 말에 당황했다.
“마지막으로 그룹 이름도 확정됐어. 너희가 지은 뉴블랙으로.”
……잠깐.
내 맨투맨 로고에서 따온 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