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5화
“뉴블랙?”
“왜.”
석환 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문제는 없었다.
다만 내 옷에 쓰였던 글씨를 보고 대강 만든 이름을 공식 팀명으로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러울 수도 있긴 한데 연말 평가 끝나고 대표님이 오랜만에 점집에 다녀오셨대.”
“점집이요?”
“거기서 이번에 새로 런칭하는 보이그룹 이름을 뭐로 할까요, 물어보니까 뉴블랙 그대로 하라고 했다더라. 느낌이 좋다고.”
세상에 누가 보이그룹 이름을 점집에서 결정하냐.
황당했다.
하지만 윤석환의 입에서 대표님과 회사 직원들이 생각했던 팀명이 나오자마자 우리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후보군이 여러 개 있긴 했어. 몇 개 읽어 줄게. 일단 가디언즈. 팬들을 지켜 준다는 의미라나 봐.”
“…….”
“플라잉 앤젤스. 줄여서 FAG.”
“…….”
“핫 보이스. Voice랑 Boys 인지 헷갈리게 마지막 음을 살리는 게 포인트라고 하던데. 아, 이건 중간에 기각됐구나.”
“…….”
“어디 보자. 블랙홀도 있었네. 이건 아마 매력에 빠지면 블랙홀처럼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스마트폰에 적은 그룹명을 읽어나갈 때마다 우리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갔다.
이 회사는 지금까지 어떻게 안 망하고 살아남은 걸까.
어쩐지 레몬 보이즈 때부터 범상치 않다 했어.
설명이 끝났을 때, 우린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뉴블랙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맞아여.”
“다시 보니까 주옥 같네.”
윤석환 실장이 피식 웃었다.
“거봐, 뉴블랙이 제일 좋지?”
“네.”
“그룹명이 조금 마음에 안 들 수는 있지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냐. 이름이 이상해도 유명해지면 문제가 안 되거든. 미국 애들 봐. 도스토예프스키가 발음 어렵다고 못 부르는 거 봤어?”
논리적인 언변에 우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뉴블랙은 공식적으로 우리가 데뷔할 팀명이 되었다.
윤석환이 재밌는 게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너희 그거 아니?”
“뭘요?”
“대표님이 복채를 푸짐하게 줬는지 그 역술인이 희한한 말을 하더라. 이건 그냥 재미로 들어.”
윤석환이 웃으며 말했다.
“그 점쟁이가 뉴블랙이란 이름을 써야 대성공한다고 그랬대. 그 이름을 쓰면 아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보이그룹이 될 거라는 거야.”
그 말에 우리는 웃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 * *
그 주 일요일.
나는 캐리어를 끌고 강남의 골목을 누볐다.
얼마 안 가서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4층 빌라.
이곳 301호가 우리의 새 숙소라고 들었다.
“요즘 세상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니.”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무거운 짐에 삭신이 쑤셨다.
아오! 진짜 내가 성공하면 내 돈으로 최고급 엘리베이터 있는 데로 숙소 옮긴다. 진짜.
겨우 도착한 3층.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생각보다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꽤 괜찮은데.
넓다고 생각하며 흡족하게 웃던 때였다.
뭔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잠깐만. 이건 넓은 게 아닌데…….
당황해서 숙소를 둘러보았지만 내가 본 그대로였다.
거실과 화장실.
그게 전부였다.
침실 하나가 딸려 있긴 했지만 그건 방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2층 침대 3개를 꽉 차도록 설치해 놓았는데, 대표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하.
우주야. 여기서 벗어나고 싶으면 성공하렴.
“…….”
말 그대로, 가구만 설치한 터라 방바닥 여기저기 톱밥들이 쌓여 있었다.
조금 찝찝한 느낌에 발을 들어보니 양말 바닥이 까맣게 변해 있다.
“청소해야 되겠네.”
애들한테 맡기고 빠질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대충하면 되지, 뭐.
스마트폰을 켜서 숙소 거실이 가장 잘 나오는 각도를 잡았다. 수년간 다져진 셀기꾼의 노하우로 나는 셀카를 찍었다.
그러곤 할머니에게 톡을 보냈다.
나 [할머니~ 우리 숙소야]
사진 중에서 거실이 예쁘게 나온 사진을 보냈다.
혹시 걱정하고 있을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최대한 잘 나온 A컷을 엄선한 터였다.
곧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킹갓김덕순 [좋은데갓네]
킹갓김덕순 [좀고생해야쓰는데]
나 [뭐야]
나 [손자 고생하라는 할머니가 어디 있어? 우리 할머니 아니지?]
나 [우리 할머니를 돌려내라 김덕순]
장난스럽게 보낸 톡에 대한 답장은 짧게 날아왔다.
킹갓김덕순 [미친놈.]
“와, 너무하네. 진짜.”
우리 할머니 맞아?
항의의 톡을 보냈지만 답장은 날아오지 않았다.
쿨한 읽씹이라고 할까.
그래도 이렇게 사진이라도 보내면 걱정은 덜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채팅창을 바꿔 단톡방에 들어갔다.
【 선우주와 그 졸개들 (5) 】
나 [도착함!]
나 [다들 어디야? 오고 있어?]
노란 메시지 앞에 떠올라 있던 4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김중현 [저 좀 늦을 것 같아요]
서리혁 [에쿵 리혁이는 지금 가는 중이에욤]
나 [뭐냐 그 이상한 말투는]
서리혁 [데헷..]
이건 뭐지, 하면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때 채팅창이 꽉 들어찼다.
서리혁 [왕지호 ㅣ마너이ᅡᆯ]
서리혁 [방금 내가 친 거 아님]
서리혁 [열받네 진짜]
왕지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왕지호 [저였어요 형]
왕지호 [우리 지금 버스 타고 가는 중 ㅋㅋㅋ]
지호가 리혁이 핸드폰으로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앞으로 30~40분 정도 걸린다는 답장을 본 나는 메시지 앞에 사라지지 않는 1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보통 비주가 제일 먼저 읽고 답장하는데.
그런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이 나타났다.
적당한 키와 날렵한 몸매.
소년 선비처럼 생긴 녀석이 양손에 짐을 든 채로 현관에 주저앉았다.
“와, 저 죽는 줄 알았어요. 형.”
어찌나 짐이 많은지 손이 벌겋게 변한 비주였다.
“힘들면 부르지 그랬어.”
“예? 뭐 하러요. 제가 들면 되지.”
“하여간 오느라 고생 많았다. 물이라도 한 잔… 아, 맞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구나.”
“제가 가져왔어요.”
비주가 마트 비닐봉지를 뒤적거리더니 생수 통을 꺼냈다.
“잠깐만, 부엌에서 컵 좀 찾아볼게.”
“괜찮아요.”
“그것도 가져왔어?”
이번에는 비닐봉지에서 종이컵 한 박스가 나온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너 준비성 대박이구나. 진짜.”
비주가 물을 천천히 마시는 동안, 나는 마트 봉지들을 바라보았다.
“뭘 이렇게 많이 사 들고 왔대?”
“실장님이 집에 침대랑 냉장고만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근처 마트 들렀다 왔어요.”
“이건 뭐야?”
“곰팡이 제거제요.”
“그럼 이거는?”
“탈취제예요. 옷장이랑 신발장에 넣을 거예요.”
마침 필요했던 청소 용품까지 다 가져온 것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살림 진짜 잘하는구나.
가지런히 청소 용품을 종류별로 정리하는 비주를 보다가 문득 깜빡 잊었던 부분을 떠올렸다.
“너 이거 무슨 돈으로 샀어?”
“이거요? 당연히 제 돈으로 샀죠.”
“영수증 줘 봐.”
“왜요?”
“왜기는. N분의 1로 나눠야지.”
“에이, 됐어요.”
비주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우리 다 같이 쓸 물건이잖아요.”
“다 같이 쓸 물건이니까 그렇지. 너 혼자 돈 쓰는 게 말이 되냐.”
“근데 형, 이거 제가 맘대로 산 건데 애들한테 돈 내라고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아요?”
“응. 안 그래.”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영수증이나 줘 봐.”
“……괜찮은데.”
“너 이렇게 손해 보는 거 습관 되면 큰일 나.”
이렇게 착해 빠져서 나중에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단톡방에 영수증 사진과 입금할 금액을 올렸다.
계좌는 네가 찍어서 올려, 라고 말하려던 나는 스마트폰을 내렸을 때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과 마주했다.
“왜 그래?”
“아, 신기해서요.”
“뭐가.”
“저희 누나가 매번 그런 말하거든요.”
“그래?”
웃으며 되묻고는 비주에게 숙소가 어떤지 대강 가이드를 해 주었다.
숙소 구경을 마친 비주는 나와 비슷한 감상을 내뱉었다.
“얼마 전에 중현이랑 본 영화가 떠오르는 것 같아요.”
“무슨 영화?”
“쇼생크 탈출이라고….”
“감옥 나오는 거?”
“네…….”
한참 동안 웃음이 이어졌지만 막판에 가서는 이게 울음인지 웃음인지 분간이 안 가는 소리로 변했다.
웃기면서도 슬픈 상황.
좁아터진 숙소를 살피면서 우리는 청소해야 될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바로 시작할 거야?”
“아뇨. 애들 기다려야죠.”
차분한 미소에 나 역시 따스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런 건 다 같이 해야지.
작성된 청소 목록을 훑어보면서 누구에게 뭘 분배해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노예들이 속속 도착했다.
“저희 왔어여!”
언제나 발랄한 우리 막내.
“와, 무슨 계단이 이렇게…….”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들어온 리혁이가 짐을 내려놓고는 주저앉았다.
비주가 건넨 생수 통을 받아든 리혁이가 생명수라도 되는 양 벌컥거리는 동안 막내는 숙소를 둘러보았다.
그러곤 놀랍도록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숙소가 이게 다예여?”
“그래.”
“…….”
“그래도 둘러보면 꽤 괜찮아.”
얘가 말문이 막히는 건 처음 보는데.
나라 잃은 사람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는 막내를 토닥였다.
할 말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성공하자.”
* * *
사람의 적응력이란 참으로 위대하다.
절대 적응할 수 없을 것 같던 뉴블랙 교도소도 며칠이 지나고 나니 내 집처럼 적응이 됐다.
밤마다 들리는 중현이의 코골이와 그에 맞춰 자진모리장단으로 ‘돌겠네’를 중얼거리며 뒤척이는 리혁이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잘 때마다 옆자리에서 ‘형, 자여? 안 자면 저랑 놀아여.’하면서 남 잠을 다 깨운 뒤에 자기 혼자 꿀잠을 자 버리는 막내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모두 숙소에 적응해갔다.
그리하여 며칠이 지난 뒤에는 나름대로 이 교도… 아니, 숙소에서 아침 일과의 규칙성이 생겼다.
“흐아암.”
새벽녘.
언제나처럼 하품을 하고 나오면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린다.
매일 아침이 되면 누구보다 제일 먼저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하는 비주.
“잘 잤어요, 형?”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중현이 어제 코 엄청 골더라.”
“장난 아니던데요.”
“잠 하나도 못 잤어. 진짜.”
“저도요.”
“내가 어제 꿈에서 폭탄 해체하다가 줄을 잘못 잘랐거든. 터져서 깼는데 보니까 2층에서 중현이가 코 고는 소리더라.”
비주가 키득거렸다.
생수병을 냉장고에 다시 집어넣은 나는 한창 요리 삼매경이 펼쳐진 곳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하는 거야?”
“토스트 만들어요.”
대부분 간단한 요리긴 했지만, 매일 5인분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보면 엄청 힘든 일이긴 하다.
“뭐 도와줄 거 있어?”
“접시만 세팅해 주세요.”
“오케이.”
비좁은 거실에 상을 펴고 접시를 놓으면 그쯤 되어 또 다른 멤버가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저 일어났어여.”
눈을 부스스하게 뜨고는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 막내.
차라리 자는 게 낫지.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를 반복하면서 고개를 꾸벅꾸벅한다.
멤버 중에 잠이 제일 많은 이 녀석이 이렇게 잘 일어나는 까닭은 바로 아침 식사 때문이다.
“지호야.”
“…흠? 네?”
“그냥 자.”
“안 돼여. 토스트 큰 거 먹어야 돼여.”
이쯤 되면 대단한 집념 아닌가.
비주가 프라이팬을 가져와 요리를 나눠 줄 때면 훑어보고 있다가 가장 큰 걸 자기 쪽으로 가져가는 녀석이었다.
“먹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요. 애들 깨우고 올 테니까.”
막내와 내가 토스트를 보며 군침을 삼키는 동안, 비주는 멤버들을 깨우러 갔다.
누가 먼저 일어날지는 뻔하다.
“저 안 먹어요, 형.”
입이 짧아서 늘 아침식사를 건너뛰는 메인보컬 서모 씨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쉬워하는 비주의 표정.
이내 겨우 일어난 중현이까지 합세하면 넷이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일과였다.
콰르르-
중현이가 천장을 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윗집 화장실에서 물 내리나 보네요.”
“그러게.”
윗집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방음이 안 되는 숙소.
이 또한 우리의 일상적인 일이었다.
-앗, 뜨거!
아, 저것까지 포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