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4화
보이그룹 TNT.
아이돌 명가라 불리는 TJ 엔터테인먼트가 야심차게 기획한 8인조.
2010년 데뷔한 이후로 지금까지 내는 앨범마다 대박을 치고 있는 원탑 보이그룹이다.
양대 산맥을 이뤘던 식스티 세컨즈가 어이없는 병크로 몰락하면서 TNT가 자연스럽게 옥좌를 차지하긴 했지만, 그 이전부터 대중적인 인기나 앨범 판매량 등 모든 지수에서 TNT의 압승이긴 했다.
한태현.
그런 TNT에서 한태현은 인기 상위권을 달리는 멤버다.
연차는 비슷해도 인기로 비교하면 걸스온탑도 태양 앞의 반딧불이었다.
“어? 어…….”
TNT의 험담을 하려던 상황에서 걸릴 뻔한 데다 내가 태현이와 친밀한 관계처럼 보이니 길채경으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우주 형?”
“잘 지냈어?”
“이게 얼마 만이야?”
녀석이 내게 덥석 안기자 길채경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이거 드라마에서 봤는데.
자기가 핍박하던 부하 직원이 오너 가문의 혈통인 것을 알게 된 부장님의 표정이다.
“어…….”
길채경이 어버버하며 말했다.
“둘이 무슨 사이야, 태현 오빠?”
“무슨 사이냐니.”
나한테 이야기할 때와는 180도 다른 표정으로 한태현이 말했다.
“보면 몰라? 친한 사이인 거.”
“아.”
“그리고 나 지금 너랑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분 아닌데. 우리끼리 얘기 나누게 좀 비켜줄래?”
대놓고 면박을 주는 모습에 길채경이 쭈그러들었다.
역시 이 바닥은 인기가 갑이다.
음료수 캔을 허둥지둥 떨어뜨릴 만큼 당황한 길채경은 도망치듯 사라졌고, 그 모습을 보며 물었다.
“안 좋은 사이야?”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고. 뭐, 쏘쏘. 솔직히 방금은 욕하다가 들킨 건데 이뻐 보일 리가.”
“들었구나.”
“아니, TNT만 들었어. 나머지는 대강 눈치 깐 거고.”
태현이가 말했다.
“켕기는 걸 보니까 분명 우리 욕을 한 건데, 분위기는 또 누구를 같이 험담할 만큼 친하지도 않고. 뉴블랙이랑 TNT의 접점은 1위 후보니까. 보나마나 1위 후보 신경전 쩐다 그런 말 했겠지.”
“너 눈치 엄청 늘었구나.”
“연예계 밥 한두 번 먹나. 벌써 5년차인데.”
연습생 시절에 거의 지호급으로 눈치 없던 녀석이었는데, 장족의 발전이었다.
연습실에서 형 하면서 따라다니던 녀석이 이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보이그룹 멤버가 되어 있었다.
뿌듯하다.
잘 자란 자식을 보는 듯한 기분.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야, 형. 우리 대기실 놀러 가자. 애들도 형 보면 진짜 반가워할걸.”
“글쎄, 너네 스태프분도 계시고 좀…….”
“지훈이 키 얼마나 컸는지 모르지? 일단 와 봐.”
한태현이 내 팔을 덥석 붙잡고 갈 때였다.
김비주 [우주 형]
김비주 [저 길 잃어버린 것 같은데 도와주세요]
톡을 읽은 내가 태현이의 손을 떼 내며 말했다.
“미안. 지금은 말고 다음에 인사하자.”
“왜?”
“우리 애가 길을 잃어버렸대. 데리러 가야 돼.”
“아, 우리 애…….”
순간 태현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아닌가? 방금 표정이 조금 굳었던 거 같은데.
태현이는 곧장 환하게 웃으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럼 셀카나 같이 찍자. 그건 오케이?”
“얘가 좀 심하게 길치거든. 나 얼른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한 장만 찍자. 말하는 동안 벌써 사진 다 찍었겠다.”
대강 몇 장을 찍은 후에 내게 컨펌을 받으며 녀석이 웃었다.
“일등 축하해.”
“아직 결과 발표도 안 났잖아.”
“믿어 봐, 형.”
한태현이 씩 웃었다.
“내가 이래 봬도 방송국 밥은 더 많이 먹었다니까.”
* * *
군부대에 잘못 들어온 사슴처럼 멀뚱멀뚱 서 있던 비주를 데리고 대기실로 돌아갔을 때, 모두 깨어나 있었다.
“음료수 왔습니다.”
‘잘 마실게요’, ‘고마워’ 같은 인사를 받으며 돌리는 동안 리혁이가 콜라 캔을 잡고는 비죽한 표정을 지었다.
“어우, 미지근해. 뭐가 이리 오래 걸렸어요?”
“미안.”
비주가 소심하게 말했다.
“내가 화장실 갔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다음에는 날 불러요. 저 형 말고.”
듣고 있던 막내가 놀림거리를 찾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리혁이 형, 설마 안 불러 줬다고 질투하는 거예여?”
“뭐래. 너는 음료수나 마셔.”
“역시 서운하면 서리혁이죠.”
리혁이가 주먹으로 지호의 어깨를 때리자, 지호가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인 듯 연기를 시작했다.
장소원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평소에도 이러고 놀아?”
“쟤네 둘만 그래요.”
동생들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는 왕언니의 입가에는 연신 엄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생방송 앞두니까 어때? 떨리지?”
“어제 3시간도 못 잤어요.”
“나도.”
“선배님이요?”
“솔로 1위는 처음이거든. 여태까지 1위는 모두 그룹 활동으로 한 거고.”
장소원이 말했다.
“그 사건 이후로 음방 다시는 못 나올 줄 알았거든. 솔직히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다른 노래 다 밀어 버리고 우리 노래가 1위를 차지할 줄은.”
“맞아요.”
“신기하지?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다 같이 작은 작업실에서 있었는데.”
벌써 옛일처럼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 참 즐거웠었지.
과자랑 음료수 먹으면서 녹음실에서 밤도 새 보고.
“꿈만 같아.”
그녀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옆에 와서 톡! 하고 바늘로 찌르면 깨질 것만 같고. 꿈이라고 해도 안 깨어나고 싶고. 정말 상상도 못한 일들이 벌어졌잖아. 방송이나 행사 섭외 전화가 쏟아지고… 다시 일어서지 못할 줄 알았거든.”
최정상을 넘보다가 멤버들의 스캔들로 고꾸라진 아이돌 가수.
인기에 따라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연예계에서 그녀가 어떤 무시와 멸시를 받아 왔을지는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다시 처음부터 힘겹게 시작한 솔로 활동.
그러던 장소원이 자작곡을 통해서 차트 1위와 함께 무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이제는 음악 방송 1위 후보로 다시 지상파 무대에 선다.
제2의 전성기라 해도 무방한 상황.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장소원의 눈가가 살짝 촉촉해진 것을 본 내가 조용히 티슈를 뽑아 건넸다.
그녀가 ‘고마워’하면서 눈가를 콕콕 찍었다.
말하다가 살짝 감정이 복받친 모양이었다.
“너희가 아니었다면 이런 근사한 일도 없었을 거야. 고마워, 얘들아. 정말로.”
“저희도요.”
내가 대답했다.
“저희도 선배님이 없었다면 지금 받는 관심의 10분의 1도 못 받았을 거예요. 사실 저희야말로 선배님 인기에 무임승차한 거기도 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리더, 네가 없었으면 이 곡은 완성도 못했어.”
“아니에요.”
“겸손 떨기는.”
“선배님이 다 만든 멜로디에 몇 가지 추가한 게 전부니까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저희 힘만으로는 올 수 없는 길이잖아요.”
뭔가 건배라도 해야 될 것 같은 찐한 분위기였다.
윤 실장이나 장소원 선배 쪽 스태프들도 어느새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통 이럴 때 누군가 눈물을 뽁! 하고 터뜨리던데.
그러나 눈물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민기야, 왜 니가 울어?”
우리를 데려다준 로드 매니저가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왜 저 사람이 울지?
눈시울이 벌건 이가 뭐라고 소곤거리듯 말했고 그걸 들은 윤석환이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전했다.
“원조 슈가피쉬 팬이래요. 음? 뭐라고?”
“저 흑설탕이었어요.”
“팬클럽?”
“네, 1기…… 으흐흑…….”
오열하는 이를 보며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로드 매니저님 슈가피쉬 팬클럽이었구나.
바닥을 치던 최애가 다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건가.
“팬이었어요? 진작 말하지.”
장소원이 반색하면서 일어났다.
“이리 와 봐요. 누구 제일 좋아했어요?”
“저 리사…….”
“안아 줄라고 했는데 손만 잡아 줄게요.”
그러면서도 장소원이 로드 매니저를 안아 주었다.
토닥토닥.
감동적이긴 한데 뭐지.
죽 쒀서 엄한 사람만 계 타는 듯한 풍경이다.
* * *
레몬 엔터테인먼트 홍보팀.
아침부터 숨 가쁘게 움직여 온 홍보팀은 뉴블랙이 출연할 음악 방송에 대한 기사를 뿌리고, 홍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힘들지는 않았다.
소속 연예인이 사고를 치거나 스캔들에 휘말려서 수습할 때가 힘들지, 지금처럼 호재가 터졌을 때는 뭘 해도 즐거웠다.
어느덧 5시 반.
뮤직온이 시작할 시간대가 되자 홍보팀 직원들은 숨을 돌리고 자연스레 TV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우, 내가 다 떨리네.”
“그니까요. 무대 서는 건 애들인데 우리가 조마조마하다니까.”
“1위 누구 줄까요?”
“글쎄. 우리 애들이 제일 유력하긴 하지. 그런데 TNT가 음반 점수 먹을 거 생각하면 안심은 못 하고.”
“그래도 방송에 불렀다는 건 줄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두고 봐야 알지. 방송국이 중소 기획사 엿 멕이는 거 한두 번이에요? 작년 연말 무대도 PD 호언장담에 속아서 나갔다가 스칼렛 애들 분량 피 봤잖아요.”
“그땐 진짜 너무했지.”
“아직도 치가 떨린다니까. 이름도 모르는 대형 애들 챙겨 준답시고 우리 애들 분량에…….”
“어! 시작한다.”
화면 상단에 ‘뮤직ON’ 로고가 사라지면서 생방송이 시작됐다.
남자 배우 강현민과 걸그룹 라비앙로즈의 멤버 전유빈이 마이크를 들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K-POP! 그 인기의 중심, 생방송 뮤직~온!
이어서 각자 소개를 한다.
-안녕하세요, 강현민입니다.
-안녕하세요, 전유빈입니다. 엇! 현민 씨, 지금 얼굴에 뭐가 붙으셨어요!
-예, 뭐가요?
-김이요. 잘생김.
-유빈 씨도 참~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주고받던 남녀 MC가 오늘 있을 무대에 대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장소원X뉴블랙 콜라보의 썸씽 무대도 있는데요.
-그럼 3월 둘째 주 차트 순위를 보실까요?
역순으로 순위를 거슬러가는 노래들을 보며 직원들이 말을 이었다.
“걸스온탑 애들은 부진하네.”
“지난번에 1위하지 않았어요?”
“그랬지.”
“주하나 논란 때문에 조금 주춤한 것도 있어요.”
“걔가 뭔 잘못이 있다고?”
“원래 연예계가 그렇잖아요. 똥이랑 사귀면 이미지가 똥이 되는 거.”
“저기 봐요! Something이 1위야.”
차트 순위 1위에 Something이 나오자 현장 함성 소리가 들린다.
2위인 TNT의 Blink보다는 덜하지만 확실히 대중적인 인기가 느껴졌다.
노래 소개가 끝나고 나서 TV 화면은 곧바로 무대로 옮겨갔다.
이름도 생소한 걸그룹이 오프닝 무대를 하는 동안, 홍보팀 직원들은 수다를 떨었다.
“음악 방송 보기는 간만이네.”
“역사적인 순간이잖아요. 데뷔 전부터 콜라보 곡이 차트 1위를 휩쓸면서 음악 방송에 강제 진출당한 아이돌. 기사 쓰기도 좋죠.”
“참, 장소원이랑 같이 우주 개인 인터뷰 요청 들어온 거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해야지.”
“하긴 공동 작곡이니까 작곡돌 이미지 메이킹도 괜찮고.”
“부럽다.”
“장소원이랑 반띵이긴 해도 우주 개인 저작권료로 매달 차 한 대씩은 나올 걸요. 연말까지 가면 서울에 집도 사겠어요.”
누군가가 한 말에 모두 입맛을 다실 때였다.
“누구 우주 연락처 아는 사람 없어요?”
“왜요?”
“그게 아니라 이것 좀 봐요.”
직원 하나가 스마트폰을 들어보였다.
“TNT 태현이 방금 개인 트위터에 올린 게시글이거든요.”
[TNT_태현]
@RealHanTH
오랜만에 만난 좋은 형
#7년지기_베프
#1위_후보_축하해
#얼굴에_묻은_잘생김
사진 속에는 선우주와 한태현이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주가 잘생기긴 했구나. 태현 옆에 있어도 안 꿇리네.”
“우리야 맨날 보니까 그런 거지. 애들이 그러던데 편의점 알바가 바뀔 때마다 우주한테 번호를 딴대요.”
“아, 얼마 전에 남자한테 번호 따인 거요?”
“푸하하!”
“왜들 그래요? 사랑은 숭고한 거야.”
“다들 그만 좀 떠들지? 이거 SNS 관련해서 기사 좀 퍼뜨려.”
TV를 보고 있던 이들이 저마다 노트북을 들고 일에 착수했다.
“한류 스타는 한류 스타네. RT 수 봐요.”
“그런데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래요?”
“TJ에서 만난 사이 아닐까요?”
“아, 물어보고 싶다. 생방 직전만 아니면 전화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거 기삿거리로 딱이잖아요.”
“그나저나 부럽지 않아요?”
“뭐가요?”
“TNT면 황금 인맥이잖아요.”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수긍했다.
“그나저나, 알고 올려준 거면 고맙네요.”
“무슨 뜻이예요?”
“TNT 팬덤 극성맞기로 유명하잖아요. 얼마 전부터 커뮤에 썸씽 음원 조작 아니냐고 도배하던 애들이 얘들이에요.”
“밉기는 하겠지. 웬 듣보가 자기 가수 밀어내고 1위하면.”
“그런데 태현이 이런 트윗을 올리면 걔네도 잠잠해지겠죠. TNT 멤버가 직접 뉴블랙 멤버랑 절친 인증하면서 1위 후보 축하한다고 올렸는데.”
“기특하네. 알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만약 이 자리에 선우주가 있었다면 ‘알고 그랬네’라고 생각했겠지만 홍보팀은 그저 고맙다고 여길 뿐이었다.
이윽고 그들이 일에 열중한 동안 마침내 무대가 시작됐다.
“시작한다.”
“음소거 끄고 볼륨 좀 키워 봐.”
잔잔한 전주가 나오면서 무대가 화면에 나타났다.
홍보팀 직원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TV를 바라보았다.
Something의 무대를 처음으로 선보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