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32화
마지막 무대는 Something과 같은 전주로 시작했다.
관객들은 의아해했다.
첫 무대로 보았던 듀엣 곡을 작별 무대로도 한다고?
몇몇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골처럼 우려먹네.’
아무리 차트 1위를 하고 흥행했다고 한들 같은 곡으로 무대를 재탕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5초 구간을 기점으로 전주가 바뀌기 전까지는.
‘리허설 때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들어도 좋네.’
사이드에 물러나 있던 하승주가 미소를 지었다.
기존 도입부와 다른 전주였다.
어쿠스틱 기타가 들어간 원래 전주에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얹혀 있었다.
거기다 드럼까지.
잔잔하고 산뜻한 원곡과 다르게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였다.
바뀐 멜로디를 들으면서 하승주는 미소를 머금었다.
‘규환이가 좀 만져 줬네.’
확실히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선우주가 작곡을 할 줄 안다고 해도 출연이 확정되고 편곡까지 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자잘한 디테일에서 절친한 후배 작곡가의 냄새가 났다.
‘어쨌거나 좋긴 좋구먼.’
존경하던 피아니스트 선배의 아들이 만들어 낸 곡에 자신이 좋아하는 후배 작곡가의 편곡이 합쳐지니 근사했다.
오묘하게 섞인 맛이라고나 할까.
하승주는 눈을 감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느라 제작진의 카메라가 자신을 향한 것도 몰랐다.
“푸핫-!”
부조정실에 있던 스태프 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TV로 송출될 화면에서 하승주가 꽃받침을 한 채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깜찍한 표정이라고 할까.
“하 MC님 또 저러시는데요? 좋은 음악 들을 때 나오는 소녀 표정.”
“방송 나올 때쯤이면 짤방 하나 또 나오겠네.”
“분명 캡처본 뜰걸요.”
스태프들이 키득거렸다.
“이번 뉴블랙 편은 이래저래 많이 건지네요. 하 MC님 표정도 그렇고. 천재 피아니스트에 대한 스토리도 담고, 장소원의 언더 생활도 담고.”
“그렇지.”
PD가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야.”
그 말대로였다.
하승주의 뮤직카페는 어디까지나 음악 방송이다.
가수를 초청해서 음악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만 본질은 어디까지나 좋은 무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장소원과 뉴블랙의 토크는 훌륭했다.
그러나 무대는 아니었다.
첫 무대였던 썸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문제는 그 곡이 대중에게 너무 익숙하다는 것이다.
음원 차트를 한 달 넘게 독식한 만큼 이제 피로감도 쌓일 만큼 쌓인 터였다.
그러하기에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무언가 신선한 것.
선우주의 재즈 연주는 그런 새로움의 애피타이저와 같은 역할이었다.
본 요리는 지금부터였다.
‘리허설대로만 해 주길.’
PD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노래가 시작됐다.
본래의 노래에서는 장소원이 서리혁을 향해 다가가면서 시작하는 파트였다.
보컬이 나올 것이라 예상되는 부분.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은 멤버는 다름이 아니라 뉴블랙의 래퍼, 김중현이었다.
자신감 있게 걸어 나온 그가 세팅된 의자에 앉았다.
널 기다리는 내 시계는
오후 2시 30분
언제쯤 네 모습이 보일까
조마조마하는 내 모습이 보이니
노래를 부르는 듯한 랩이었다.
힘 있는 목소리와 잔잔한 선율이 관객들을 유혹했다.
예상을 깨고 난데없이 랩이 치고 들어오면서 관객들의 집중도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다음 순서는 장소원.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가 공개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많이 기다릴까 무슨 얼굴을 할까
버스 창가에 기대 상상했어
이 떨림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아마도 우리 사이 between
이제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정류장에 앉아 기다리는 남자.
버스를 타고 남자에게 가는 여자.
자연스럽게 그런 상상을 하는 동안 마이크는 선우주에게 넘어갔다.
사랑이 이런 걸까
기다리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야
봄바람 같은 너
조금 기다려 주지 않겠니
제3의 인물이 등장했다.
관객들은 선우주의 노래를 즐겁게 감상하면서도 머릿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삼각관계인가?’
어떤 사람들은 장소원의 토크를 떠올렸다.
“사실 Something은 원래 뉴블랙 친구들 각자 파트가 있는 노래였어요.”
“그래요? 그런데 왜 빠진 건가요?”
“이게 제가 여자 보컬인데, 남자 보컬이 다섯이나 되다 보니까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더라고요.”
“분위기가요?”
“예, 어장 관리녀처럼 보여서.”
정말 그 말대로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니 기존의 노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관객들이 호기심을 품을 때 메인보컬이 나타났다.
원래 버전보다 유쾌한 분위기.
그런 노래 속에서 서리혁의 풍부한 성량이 공개 홀을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 사이가 뭔지 묻는다면
난 말야-
우리 사이 달콤한 사탕이라고 생각해
서서히 녹아가는 우리 사이
그 벽을 넘어 너의 손을 잡을 거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네 손을 잡고
이젠 너에게 속삭일 거야
기존 버전이 산뜻하다면, 지금은 달달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였다.
뉴블랙의 표정이 그것을 증명했다.
진중했던 첫 무대와 달리 다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노래를 하고 있었으니까.
관객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처음에 뉴블랙은 심야 감성에 맞는 촉촉한 노래를 준비하려고 했다.
선우주가 반대하기 전까지는.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다녀간 무대야. 우리가 아이돌 중에서는 노래를 잘 부르는 축이어도 거기서 감동을 주기는 힘들어.”
괜히 감동을 주려고 어려운 노래를 하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무대를 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발랄한 버전의 Between.
기존 원곡을 개량한 노래로서 관객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특별하게 준비한 무대였다.
“잘하네.”
부조정실에 있는 PD가 미소를 지었다.
“토크할 때 치고 빠지는 센스도 있고, 무대도 어설픈 발라드 곡이 아니라 즐겁게 구성할 줄도 알고. 기억해야겠어. 저기 뉴블랙에서 그… 리더 이름이 뭐라고 했지? 까먹었네.”
“우주래요.”
“그래. 저 친구.”
나중에 다른 음악 프로를 담당하게 되면 한번 불러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PD가 말했다.
“이제 슬슬 나오겠네. 하이라이트 파트.”
“그러게요.”
관객들의 반응을 기대하면서 그들은 무대를 비추는 카메라를 비롯해 수십 개의 모니터에 집중했다.
이제 시작되는 2절에서 마이크를 든 것은 김비주였다.
다른 멤버들과는 확연히 다른 미성에 가까운 목소리가 노래를 시작했다.
네 얼굴이 보고 싶어
봄꽃을 꺾어 준비하고 있을게
달콤한 우리 사이
설렘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 말을 하며, 김비주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꽃을 꺼내든다.
근사한 모습이었다.
다섯 멤버가 하나씩 노래를 마치자 사람들은 기존에 뉴블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뉴블랙은 멤버 전원이 각각의 보컬 특색을 지닌 팀이었다.
아이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보컬 4인조라고 해도 믿을 정도.
노래 실력에 대한 감탄을 하던 관객들은 이내 가사를 음미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누군가를 기다리는 김중현.
버스를 타고 남자에게 가는 장소원.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선우주.
그리고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김비주.
‘사각관계인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요정 퍽처럼 서리혁과 왕지호는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일종의 해설자 역할이었다.
나머지 네 남녀.
그들의 사이가 얽히고 얽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노래의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시작되면서 무대에 서 있던 네 남녀는 서리혁과 왕지호를 가운데 두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네 손을 잡고
이젠 너에게 속삭일 거야
장소원은 마치 버스에 내린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다가간다.
예상대로 김중현.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것처럼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며 서로 마이크를 맞대고 화음을 맞춘다.
‘그럼 나머지 둘은?’
장소원이 김중현을 선택했다면 나머지 둘은 뭐지?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선우주가 김비주에게 다가갔다.
김비주가 웃으며 꽃다발을 건네주고 선우주는 그것을 받아든다.
작은 웃음이 나왔다.
선우주와 김비주는 서로를 향해서 화음을 맞추고, 관객들은 그것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일부 관객은 어떤 뮤직 비디오를 떠올렸다.
결혼하는 여인을 바라보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리워하는 남자. 그런데 마지막에 알고 보니 남자가 그리워하는 것은 여자가 아니라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였다는 그런 류의 반전이었다.
그리고 서리혁과 왕지호는 흩어져 각자의 커플을 축하하는 큐피드처럼 움직였다.
마침내 노래가 끝났을 때, 관객들은 자신들을 즐겁게 해준 여섯 명에게 답례를 보냈다.
홀을 쩌렁쩌렁 울리는 박수였다.
* * *
가수는 안다.
자기가 공연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굳이 박수 소리를 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다.
잘되는 공연은 뭔가 다르다.
뭐든 잘되는 판은 처음부터 아귀가 맞아 딱딱 완벽하게 흘러가듯이, 좋은 공연은 시작할 때부터 착착 흘러간다.
우리가 연말 평가로 트로트를 불렀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좋은 공연을 펼쳤음을 아는 것과 직접 박수와 환호로 관객의 반응을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랬기에 나는 지금 박수를 받으며 웃고 있었다.
장소원.
비주. 중현. 리혁. 지호.
공연을 함께한 멤버들과 소원 선배는 미소를 교환하고 관객들을 향해 마이크를 잡고 공손히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홀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박수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부모님이 나를 보고 지었던 표정이 관객들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었다.
바로 내가 아이돌이 되고자 한 이유였다.
* * *
숙소로 돌아가는 차 안.
조용하네.
다들 피곤해서 그런지 자동차 시트에 몸을 파묻고 있다.
아침부터 음방 사전 녹화를 진행한 데다가 지금까지 대기하고 또 라이브 방송을 하자니 진이 빠진다.
그래도 뿌듯하긴 했다.
오늘 하루를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하나.
“다들 고생했어.”
내가 활짝 웃어 보였다.
“드디어 활동 종료네.”
“후아, 이게 끝이라니…….”
“후련해?”
“후련하기보다는 아쉽져. 한 달 동안 구름 위를 떠다녔잖아여.”
막내의 말에 우리도 동의했다.
“그래도 마무리를 잘한 것 같지?”
“사람들이 박수 쳐 줄 때는 진짜 소름이었어여. 연말 평가 때보다 열 배는 컸던 것 같은데.”
“열 배냐. 백 배 같던데.”
“저희 어땠어요, 실장님?”
비주의 질문에 조수석에서 조용히 있던 석환 형이 빙긋 웃었다.
“반응 좋더라. 인터넷에서 너희 가창력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말이 더 이상 안 나올 만큼.”
“오오.”
“정말 잘했다, 얘들아.”
연예계 전문가의 확언에 우리는 서로의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우리가 원했던 결과물이었다.
노래 실력을 보여 주는 게 우리의 목표였으니까.
“민기 형, 형은 어땠어여?”
“예쁘시더라.”
“민기야, 내가 화이 쪽으로 보내 줘?”
“앗, 실장님. 죄송합니다. 운전대를 잡고 있다 보니까 정신이 없네요.”
어설픈 우리 로드 매니저 덕분에 웃음바다가 터졌다.
비주가 내게도 확인하듯 물었다.
“형, 방송에서도 우리 반응 좋겠죠?”
“현장 반응도 좋았잖아.”
“그렇긴 했죠. 마지막에 제가 형한테 꽃 줬을 때 환호하던 여자분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난 그거 반응 별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다행이지.”
리혁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조용히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멤버를 불렀다.
“중현이는 괜찮았어?”
“좋았어요.”
“오늘 제일 고마웠어. 말 안 해도 알지?”
대기실에서 자기들을 그렇게 챙길 필요 없다며, 나를 위한 선택을 하라고 했던 녀석이 고마웠다.
중현이가 말없이 웃었다.
왠지 모르게 멜랑콜리한 분위기였다.
밤 10시를 넘긴 시각.
도로의 가로등 불빛만이 쏟아지는 어두운 자동차 안에서 우리는 평소와는 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허전하다고 해야 되나.
지호 말대로 꿈같은 시간은 끝이 났다.
음악 방송 활동도 끝났고 화보 촬영과 같은 연예인스러운 활동은 조만간 없을 것이다.
아직 데뷔를 못 한 신분.
이제 숙소로 돌아가면 다시 연습생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나긴 터널.
어두운 터널을 달리다가 중간에 옆길로 새어 아름다운 정원에서 꽃향기를 맡고, 즐거움을 노래했다.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끝을 맺었다.
우리는 다시 터널로 돌아가 빛을 향해 달려야 한다.
하지만 그 터널을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샛길에서 맛보았던 그 달콤한 시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말은 안 해도 다들 나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걱정 마.’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무슨 연예계의 신도 아니고, 무조건적인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랬기에 다른 말을 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얘들아.”
우리 모두 차창 너머로 멀어지는 여의도를 바라보았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우리 열심히 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2014년 3월.
하승주의 뮤직카페 녹화를 마지막으로 뉴블랙은 프로젝트 음원 Something의 활동을 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