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38화
바로 그때였다.
일주일 전, 강원도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쟤 표정이 딱 저랬다.
노래도 안 나오는 이어폰을 꼽고서 혼자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멍하니 창밖을 울적하게 바라봤었지.
그때는 별거 아니라 넘겼었다.
금세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니 아닌 모양이다.
그때보다 훨씬 더 심각해 보이는 표정.
얘가 왜 이러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내 눈에 문득 지호와 리혁이의 교복이 보였다.
청색 재킷에 붉은 넥타이.
아이돌들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예고 교복이 평소와는 달리 살짝 헤진 느낌이라고 할까.
뭐, 워낙에 우리 막내님이 강아지처럼 쏘다니는 탓에 지호 교복은 이해할 수 있다.
얘는 매일 먼지를 묻혀 오니까.
그런데 리혁이 교복이 오늘따라 지호랑 비슷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애들이 학교를 가는 날이 될 때마다 우리 메인댄서가 새벽부터 일어나 교복을 다려 주기 때문이다.
비주가 오늘 다림질을 안 했구나.
내가 늦게 일어나서 못 본 모양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막내뿐만 아니라 얌전한 리혁이 교복도 꾀죄죄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이상한 것들이 하나씩 눈에 보였다.
요새 비주가 보이는 이상 행동이라고 할까.
다들 있을 때는 괜찮다가 혼자 시간을 가질 때면 멍하니 있다.
뭔가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얘를 어떻게 하지?
다른 애라면 그냥 가서 목에 팔이라도 두르고 친한 척하면서 ‘요새 고민 있어? 형이 고민상담 해 줄까?’하면서 농담이라도 할 텐데.
얘는 왠지 그렇게 하기에는 애매하다.
착한 성격인데 분위기가 안 만만하다고 해야 하나.
함부로 하면 안 될 것 같은 아우라가 있다.
게다가 얘 감정선을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이유였다.
작년 12월부터 지금까지 5개월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애들을 지켜보면서 대강의 캐릭터는 파악했다.
특히 중현이나 리혁이, 지호는 파악이 쉬웠다.
그런데 비주는 아직도 어떤 앤지 잘 모르겠다.
저 작은 머리통 안에 든 생각은 많아 보이는데, 도통 말을 안 한단 말이지.
“아저씨, 뭐 해요. 안 먹고?”
맞은편에 있는 리혁이가 날 바라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들 식사를 하고 있다.
비주는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지호가 부리는 투정에 웃으며 맞장구도 쳐 주고, 위로도 해 주고.
내 착각이었나?
너무 멀쩡해 보여서 헛것이라도 본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지금 아무도 눈치 못 챈 건데, 비주가 젓가락을 반대로 집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냉장고 정리도 열 맞춰서 하는 애가 이런다는 건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뭐. 어쨌거나, 일단은 밥부터 먹자.
오늘은 갈 길이 머니까.
작업의 방향성을 결정할 날이기도 하고.
그런데 고기를 보니 평소보다 양이 적다. 뮤직카페 나간 뒤로 늘 1.5배 양은 나왔었는데.
범인은 누군지 찾을 필요도 없었다.
불백 접시에서 떨어진 양념 소스가 설탕을 쫓는 개미떼처럼 점점이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으니까.
“…….”
나와 눈이 마주친 지호가 볼에 음식을 가득 담은 채 움찔했다.
그러곤 당당하게 변명했다.
“저 아직 한창 성장기라구여, 형. 아아앗!”
나는 그 볼때기를 치즈처럼 잡아당겼다.
* * *
식사를 마치고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집어 든 우리는 노을을 보며 골목을 걸었다.
“형, 화는 풀렸어여?”
“조금.”
조금이 아니라 다 풀렸다.
하드를 하나씩 쥔 동생들과 달리 내 손에는 비싼 하겐다즈 바가 들려있다.
헤이즐넛의 오독오독한 느낌을 즐기며 걸었다.
내 기분이 풀린 거 같자, 막내가 금방 신이 난 강아지처럼 내 곁에 따라붙으며 조잘조잘 떠들었다.
“저 진짜 너무 힘들었어여. 놀려도 막 웃어 주니까 애들이 괜찮은 줄 알고 하루 종일 놀린다니까여.”
“그럼 웃지 마.”
“이제 연예인이잖아여, 형. 이미지 관리해야져.”
앳된 얼굴이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으니 웃음만 나온다.
그런 말할 거면 손에 든 쮸쮸바라도 빼고 하든가.
“그리고 길채경이 친한 척하면서 은근히 디스하는 것도 짱난다니까여, 그게 얼마나 교활한지…….”
“길채경?”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화이 엔터에 작업하러 간 날, 우리를 대놓고 무시하던 걸스온탑의 막내.
초등학생 시절 지호가 못생겼다고 고백을 깐 후로 철천지원수가 된 걸그룹 멤버였다.
“너 걔랑 또 같은 학교야?”
“이제는 보컬과라고 아예 같은 반 됐어여. 암튼 걔가 금요일 날 아침부터 반 톡방에 캡쳐 짤 올려서 놀리는 거 주도했다니까여.”
“중딩 때는 같은 학교에, 지금은 같은 반이면 거의 결혼해야 되는 급의 운명 아니냐.”
“형, 미쳤어여?”
지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상만 해도 싫어여. 제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건 안 됨.”
“흙이 들어가면 해야지.”
내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중현이가 팥 아이스크림을 내려놨다. 그러곤 진지하게 물었다.
“지호야, 만약에 걔 재산이 백억이야. 그럼 가능?”
“뭔 소리예여, 형. 백억은 우리 아빠도 있어여.”
“그럼 천억이면 어때?”
리혁이가 길거리 쓰레기통에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던지며 끼어들었다.
“중현이 형. 형 같으면 재산이 천억인데 왕지호 같은 애랑 결혼하겠어요? 차라리 저 아저씨라면 모를까.”
“우주 형이랑?”
“뭐, 집안일을 안 하긴 하는데 일단 비주얼이 괜찮잖아요. 얼굴 보는 재미는 쏠쏠할걸요.”
“그건 그렇네, 인정.”
듣고 있던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현아. 천억이면 내가 갈게.”
실없는 소리를 하는 고등학생들처럼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형들을 보며 막내의 눈꼬리가 세모꼴로 변했다.
한참을 키득거린 우리는 토라진 막내를 달랬다.
“그렇게 놀림당하는 게 싫어?”
“제가 누구를 놀려야지, 남이 절 놀리는 건 안 돼여.”
“뿌리부터 글러 먹은 마인드구나. 존경스러워.”
막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는 사실.
이번에도 오디오가 또 빈다.
고개를 돌리니 동떨어진 곳에서 비주가 혼자 걷고 있었다.
시선은 저 멀리 하늘.
붉게 변한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에 갈색 머리카락이 금색처럼 빛난다고 생각할 때였다. 리혁이가 내 곁에 붙으며 물었다.
“저 형 아까부터 왜 저래요? 젓가락도 반대로 집고.”
“너도 봤구나?”
“당연히 봤죠. 지적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는데 기분이 영 아닌 것 같아서.”
“저두여. 비주 형, 오늘 완전 이상했다니까여. 제 교복 다리는 것도 깜… 아앗!”
이러다가 얘 볼의 감촉에 중독될 것 같다.
어찌나 말랑말랑한지 찹쌀떡처럼 쭉 늘어나는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넌 철 좀 들어, 이것아. 비주가 네 식모냐.”
내 말에 리혁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며칠 전에 비주 형이 형 빨래 밀린 거 대신 해 주지 않았어요? 그때 작업 끝나고 피곤하다면서 소파에 누워서 자는 척했잖아요.”
“그런 기억이 없는 거 같은데.”
“진심으로요?”
“……비주한테는 언제나 미안한 마음이지. 그래서 내가 그만큼 열심히 작업을 하잖아.”
뻔뻔한 맏형을 성토하는 눈빛들을 애써 무시하며 화제를 돌렸다.
“중현아.”
“예?”
“넌 뭐 아는 거 없어? 너랑 비주랑 제일 친하잖아.”
“아.”
그런데 중현이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
컴퓨터 같다고 할까.
마치 [로딩 중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몇 퍼센트 진행됐는지 게이지가 뜰 것 같은 표정이다.
“그, 뭐. 누구한테나 말 못 할 고민은 있는 거잖아요.”
뜬금없는 말에 지호와 리혁이, 내가 시선을 교환했다.
“쟤 어디 아파?”
“아뇨. 그거 아닌데요.”
“그럼 뭔데?”
“어…….”
한 가지는 알겠다.
앞으로 내가 무슨 비밀이 생겨도 중현이한테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거라는 거.
어떻게 저렇게 표정을 못 숨길까.
“어…….”
“됐어요. 형. 그냥 여기서 끝내요. 반응 보니까 우리가 끼어들 일도 아닌 것 같고.”
“왜여? 전 궁금한데?”
눈치 없는 막내에게 눈을 흘긴 리혁이가 내게 의견을 구하듯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다음에 묻기로 하고.”
그제야 중현이가 눈에 띄게 안도한다.
방금 전까지는 딱딱하게 굳은 화강암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푹신한 플라스틱 덩어리 같다.
“일단 작업부터 생각하자. 그게 급하니까.”
“아,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리혁이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 우리한테 한다는 방법이 뭔데요?”
* * *
회사 2층의 뉴블랙 작업실.
작업실을 받은 지 불과 몇 주도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 팀 주부의 인테리어 덕에 멀끔하게 변해 있었다.
칫솔이나 생활 품 통도 생기고.
수납장도 깔끔하게 정리됐고.
옆방의 스칼렛 작업실에 비교하면 굉장히 모던한 느낌이다. 저쪽은 핑크색 소파에 얼룩무늬 쿠션이 있거든.
소파 앞에 서 있는 나와 중현이에게 리혁이가 대표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하는 건데요?”
“그냥 별건 없어.”
내 시선에 중현이가 말을 대신했다.
“지금부터 음악을 들려줄 거야. 그냥 들으면 돼. 뭘 특별히 할 필요도 없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듣는 거야.”
“그러니까 얼마 동안요?”
“형, 우리 몇 곡이죠?”
내가 노트북 화면에 있는 폴더 아이콘을 클릭했다.
그리고 대강 한 곡당 3분이라 쳤을 때 시간을 계산했다.
“뭐, 얼마 안 되네. 한 다섯 시간 정도.”
“잠깐만, 뭐라구여? 다섯 시간?”
출입구를 곁눈질하는 막내에게 웃어 주었다. 우리 매니저에게 배운 사악한 미소를 그대로 써먹었다.
그렇게 문을 딱 막고는 손뼉을 쳤다.
“또 질문 있는 사람?”
눈을 감으며 자신들의 운명을 체념하는 동생들을 보며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 * *
나와 중현이가 하는 실험의 전제는 간단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적 컬러가 바로 우리의 색깔이자 그룹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뮤직카페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비트윈을 보는 동생들의 표정처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악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음악적 색깔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 그룹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저마다 취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음악을 찾다 보면 교집합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파동에 따라 여러 가지 색으로 갈라진다.
빛을 한 장르의 노래라고 한다면,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우리의 색을 모두 담을 수 있는 노래가 있을 거다.
지금은 프리즘에 빛을 통과시키는 과정이고.
각자의 차이점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음악적인 기반을 알고 있다면 나머지를 조율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
예를 들어, 중현이가 힙합을 좋아한다 치면 전체적인 방향성 아래서 중현이 중심으로 곡을 만들면 되는 거다.
우리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 음악에 힙합 요소를 추가하면 되니까.
그랬기에 중현이와 나는 빌보드 차트와 우리나라 음원 사이트 곳곳을 뒤져서 음악들을 엄선했다.
대략 장르와 분위기, 그리고 떠오르는 감정 별로 300곡 정도.
그걸 분류하는 것도 일이어서 A&R팀 직원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거기서는 왜 이딴 걸 하냐는 투였지만, 뭐.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지 않는가.
“자, 이제 시작할게.”
카메라 한 대를 설치해 둔 채, 우리는 모두 옹기종기 소파에 모여 앉았다.
그리고 노래를 재생했다.
한 곡, 두 곡, 세 곡.
노래가 점점 이어지고, 전주에서부터 모두의 반응이 영 아니다 싶은 노래는 바로 스킵했다.
대부분 ‘우어어어’하는 소리를 내는 헤비메탈 곡이었다.
원래는 다섯 시간을 예상했지만, 두 시간쯤부터 환청이 들린다는 지호의 투정에 잠시 쉬었다가 진행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됐을까.
우리는 실험을 끝내고 녹초가 된 몸으로 소파에 널브러졌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젖은 솜처럼 가라앉은 리혁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마찬가지로 옆에 널브러진 비주에게 물었다.
“넌 괜찮아?”
“예, 저는 괜찮아요오…….”
“저는 안 물어봤지만 안 괜찮아여, 형.”
파김치가 된 동생들을 보며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막상 생각하기 전에는 괜찮은 아이디어였는데, 실행하고 보니 왠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의논으로 음악적 색깔을 정할 걸 그랬나.
“……내가 미안하다. 얘들아.”
그렇게 말을 하면서 작업실 테이블에 앉았다.
중현이가 바나나를 우적거리며 의자에 앉은 채로 바퀴를 굴려 왔다.
“지금 모니터링하게요?”
“빨리할수록 좋잖아. 너도 도와줄 거지?”
“…….”
“바나나 먹는 척하면서 대답 뭉개냐.”
“어우, 왜 목이 메이지.”
그러면서 물을 마시는데 애들이 널브러진 소파와 내 쪽을 번갈아 보더니 내 곁으로 체념하듯 다가왔다.
“틀어 보세요, 형.”
그 말과 함께 분석 작업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중현이와 내가 테이블에 앉아 동영상을 빠르게 휘휘 넘기며 O, X 등을 체크했다.
이거는 4명이 좋아하는데 한 명이 별로고.
요건 둘이 좋아하고 셋이 별로고.
그런 식으로 체크 리스트를 작성하는 동안, 우리는 뭔가 묘하게 규칙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야, 이거…….”
“되네요?”
다섯 명 모두 선호하고 좋아하는 노래들이라고 할까.
그런 노래들이 하나둘씩 생기면서 뭔가 규칙성이 보였다. 그 노래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감정이나 분위기, 그리고 서사.
우리가 좋아하는 공통 주제는 사랑.
흔히 너 죽고 나 사는 그런 이성 간의 사랑에 국한되기보다는 포괄적인 인류애라고 할까.
굳이 성별에 구애되는 개념이 아니라 자식과 부모 간의, 친구와 친구 간의 그런 애정이 우리가 선호하는 주제였다.
좋아하는 분위기는 따뜻함.
차가운 분위기를 선호할 것 같은 리혁이마저도 따스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마냥 산뜻한 노래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곡의 어조라고 할까. 따뜻한 관점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노래가 우리의 취향이었다.
폭 넓은 사랑을 주제로 하는, 따뜻한 노래.
마지막으로, 좋아하는 감정은 즐거움.
이건 딱히 국한되는 게 없었다.
신명나는 탈춤 같은 그런 즐거움도 좋아하고, 잔잔한 즐거움도 좋아하고.
“서서히 윤곽이 잡히는 것 같은데. 너도 그려지지 않아?”
“예, 저도 그래요.”
중현이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둘은 그동안 작업했던 Untitled와 지금 분석한 결과물을 머릿속에 결합시키고 있었다.
우리가 목표한 컨셉은 여름의 청량한 분위기.
하고 싶어 하는 음악적인 방향은 포괄적인 사랑을 주제로 한, 따스하면서 즐거운 노래였다.
대강 이제 그림이 그려진다.
하루 종일 즐겁게 놀다가, 밤이 되어 바닷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신나게 노래하고 떠드는 다섯 소년.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가 떠오르는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무대 또한 구상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그동안 막혔던 게 이해가 안 될 만큼 완벽하게 구상된다고 할까. 이전까지만 해도 이걸 가지고 무대에 서는 모습이 상상이 안 갔는데.
지금은 관객 표정까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중현아, 이거 봐 봐.”
A4 용지를 빠르게 꺼내 들고, 작곡 프로그램을 켰다. 그러면서 나는 신나게 도형을 그리며 설명했다.
“이 부분을 조금 뒤쪽으로 빼고, 여기 거는 앞으로 빼는 거야. 사비는 지금보다 좀 더 길게 가고.”
“오.”
“그럼 딱 되지 않아?”
그렇게 10분 동안 고민했을 때, 중현이와 나는 종이에 쓰인 걸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봤다.
“된 건가? 된 거 같지?”
“된 거 같은데요.”
우리는 멀뚱멀뚱 눈을 떴다.
그러다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중현이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인다.
대략 0.3 김덕순 정도.
모든 고민이 해결되면서 주변의 모든 게 아름다워 보였다. 중현이와 내가 감격할 때였다.
“뭐예요? 다 된 거예요?”
뒤돌아보니 비주가 우리 뒤에 서서 눈을 비비고 있다. 리혁이와 지호도 잠에서 깨어난 금붕어처럼 눈을 끔뻑거리며 다가왔다.
중현이와 내가 신이 나서 설명했다.
우리가 그동안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디가 막혔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횡설수설했는지 동생들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제야 나는 실험의 요지부터 지금까지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동생들의 표정이 점차 이상하게 변했다.
왜들 그러지.
내가 의문을 품던 차에 리혁이가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듯이 웃었다.
“저기요, 형들. 그러면 이딴 걸 할 게 아니고. 그냥 각자 좋아하는 음악 리스트 뽑아서 달라고 하면 됐을 거 아니에요.”
“어?”
“그거 보고 공통점을 뽑았으면 되는 거 아닌가?”
나와 중현이가 서로 쳐다보았다.
“아, 그렇네.”
“그렇네요.”
리혁이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아, 그렇네? 이 인간들이 진짜!”
‘Untitled’에 제목을 붙일 수 있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
그날 나와 중현이는 1시간 가까이 동생들에게 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