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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44)화 (44/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44화

그 말이 가슴에 확 다가온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보드게임 가지고 오늘이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할까.

늘 주변에 사람이 가득했던 나로서는 짐작이 어려웠다.

또래들과 뛰어다니면서 놀 수 없는 몸.

레고를 조립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지금처럼 누군가 와 주기를 기다리는 고독함은 무엇일까.

게임이 끝나고 민준이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엄마,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어머님이 일어나려고 하자, 아버님이 만류했다.

“여보, 좀 쉬어요. 내가 데려갈게.”

곧이어 일어난 아버님이 민준이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걸어간다.

불편해 보이는 민준이의 걸음에 내가 어머님에게 물었다.

“걷는 게 많이 힘든가 봐요.”

“요새 약을 바꿨더니 그래요. 어찌나 독한지 애가 발이 퉁퉁 부었어.”

“걱정도 되고, 많이 힘드시겠어요.”

“에이, 나는 괜찮아요. 그래도 우리 남편이랑 애들이 많이 도와줘서 할 만하니까.”

씩씩하게 말하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더 이어지려던 대화는 혈압을 주기적으로 체크하러 오는 간호사 때문에 끊겼다. 비주 어머님은 넉살 좋게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에게도 사과를 한 쪽 건넸다.

“이 친구들은 우리 아이랑 같이 활동하는 아이돌 그룹. 인사들 해요.”

“안녕하세요.”

본의 아니게 사인 타임을 잠시 가졌다.

가끔 나 연예인이었지 하고 깨닫는 순간 중 하나였다.

화기애애하게 간호사와 이야기를 하는 어머님을 보며 비주에게 물었다.

“되게 친하시네. 민준이 담당해 주는 선생님이야?”

“아뇨, 방금 만난 사이일걸요.”

“…친화력이 엄청 좋으시구나.”

두 막내가 보드게임을 치우고, 침대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동안 민준이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몸을 가누는 게 힘든지 꼬맹이가 벽에 손을 짚는다.

“아빠, 저 조금만 쉬었다 걸을게요.”

“걸을 수는 있겠니?”

“네.”

아버님이 차분히 기다리는 동안 중현이가 성큼성큼 민준이에게 다가갔다.

“제가 도와줄게요.”

그러곤 민준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침대까지 직행했다.

이불까지 씌워 올려 주자 민준이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감돈다.

“중현이가 진짜 잘해 주는구나.”

“민준이가 저보다 더 좋아한다니까요.”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더니 침대 맡에 중현이랑 같이 걸터앉아 동생의  뺨을 톡톡 두드린다.

마치 애를 재워 주는 부부처럼 보인다.

그걸 보면서 웃을 때, 비주 어머님이 사과를 찍은 포크를 건네주었다.

음. 오늘 몇 개를 먹었더라.

당분간 사과는 안 먹을 거 같다.

*   *   *

병원 복도.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걸어오는 간호사를 향해 동료가 물었다.

“김 쌤,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3호실 있잖아요. 그 되게 예쁘게 생긴 남자애 있는데요.”

“아, 거기?”

되게 곱게 생기긴 했더라, 하며 동료가 맞장구를 쳤다. 간호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걔가 알고 보니까 연예인이래요.”

“뭐? 진짜?”

“그렇다니까요. 저기 환자 보호자랑 얘기했는데 아이돌이래요! 그 썸씽 부른 애들이요.”

“썸씽? 처음 들어 보는데.”

“젊은 애들 사이에서 엄청 유행한 노래 있거든요. 얼마 전에 배 쌤이 노래방 가서 부른 그거요.”

“아아, 그거? 어머. 자주 마주쳤는데 그것도 몰랐네.”

“그리고 방송도 나왔대요.”

자기가 나온 것도 아니지만 으스대듯이 말한 그녀가 스마트폰을 검색해서 뮤직카페의 클립을 보여 주었다.

“다섯 명 전부 와 있다고?”

“그렇다니까요. 병문안 왔나 봐요.”

“나도 이따가 우리 딸내미 거 받아 줘야겠다. 애들은 어때? 연예인이라고 싸가지 없고 그러지는 않아?”

“엄청 귀엽던데요. 이거 사인지도 자기네가 꺼내서 해 준 거예요.”

간호사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 지나가던 레지던트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세요?”

“선생님, 이리로 와 봐요.”

그녀들의 이야기에 레지던트는 흥미를 보였다. 아이돌이라는 걸 알았다가 그게 보이그룹이란 걸 알기 전까지.

“에이, 걸그룹도 아니고. 전 남자 관심 없습니다. 그나저나 걔네 그룹 이름이 뭐라고요?”

“뉴… 잠깐만요. 아, 여기 써 있네. 뉴블랙이래요.”

“뉴블랙?”

레지던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알 수 없는 반응에 그녀들이 궁금해할 때, 레지던트가 아! 하고 말했다.

“뉴블랙이면 걔네 아니에요?”

“걔네?”

“최 교수님이 예전에 얘기하던 애들이요.”

선배 간호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똑같은 표정으로 아! 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교수님 오늘 출근하셨어요?”

“하셨을걸요.”

“이따가 선생님이 넌지시 말씀드려 봐요. 바로 달려오실 거 같은데.”

그 와중에 사인을 받아 온 간호사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최 교수님이 아이돌 좋아하세요?”

“자기는 모르는구나.”

선배 간호사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 그룹에 특별한 사람이 하나 있거든.”

*   *   *

민준이가 잠든 이후, 우리 다섯은 비주네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사과가 거의 다 떨어졌네.”

어머님의 말에 우리 모두가 안도할 때였다.

아버님이 웃으며 물었다.

“여보, 가서 더 사 올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비주한테 사 오라고 하면 되지. 비주야, 엄마가 돈 줄 테니까 병원 마트에서 친구들 간식거리랑 사과 좀 부탁할게. 오는 김에 약국 들러서 민준이 이마에 붙일 쿨링 시트도 사 오고.”

“네, 그럴게요.”

“저도 따라갈게요.”

내가 선수를 치자,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두 막내가 좌절했다. 먹성 좋게 사과를 받아 드는 중현이와 달리 둘은 다시 이어지는 사과 공세에 거절도 못하고 괴로워했다.

병실을 나오면서 말했다.

“어머님이 사과 되게 좋아하시는구나.”

“우리 엄마 최상의 애정 표현이에요.”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과수원 집 딸로 자랐는데,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외삼촌한테만 과일을 주셨대요. 할머니나 이모들이 사과를 먹을라 치면 그거 가지고 엄청나게 호통을 치시는 바람에 생일날에만 겨우 먹었다고.”

“진짜 애정표현이구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하에 있는 마트에 도착했다.

“비주야,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네. 뭐든지요.”

냉장 보관대의 사과를 살피는 비주에게 뜸을 들이다 물었다.

“민준이가 겪고 있는 문제 말이야.”

“문제요?”

“투병 기간이 5년 가까이 됐다고 했잖아. 그런데 네 안색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 건 최근이고.”

“아니에요. 저 멀쩡했어요.”

모르는 척 잡아떼는 비주를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메모장 어플을 켜고 내용을 읽어 줬다.

“4월 27일. 비주가 요일을 헷갈려서 쉬는 날 애들 교복을 다려 줬다. 지호가 좋아했다. 5월 3일. 오늘도 비주가 멍 때리고 있다. 같은 동작만 열 번 가까이 실수해서, 트레이너 쌤한테 혼났다. 리혁이가 안도했다.”

“그게 뭐예요?”

“일기 겸 리더의 관찰일지, 정도라고 해 두자.”

내가 핸드폰을 내리며 말했다.

“내가 본 것만 이 정도야. 얼마 전에 음식 태운 것까지 생각하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너 요새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잖아. 지호까지 눈치챌 정도면 말 다 한 거지.”

“지호가요? 그럴 애가 아닌데…….”

“그만큼 최근의 네 행동이 이상했다는 거야.”

비주가 사과를 내려 두고 다른 걸 집어 들었고, 나는 리혁이가 요구한 건빵과 보리차를 집으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 거야?”

“…민준이가 다시 수술을 해야 한대요.”

“뭐?”

대수롭지 않은 말투는 멀리 집어던져 버렸다.

“그게 무슨 얘기야?”

“민준이 상태가 얼마 전부터 굉장히 안 좋아졌거든요. 그래서 수술을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른대요.”

비주가 한숨을 짧게 쉬었다.

“여러 가지로 복잡해요. 수술비랑 항암 치료비 마련하는 것도 그렇고. 형은 모르시겠지만 저희 집 형편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요. 아빠랑 누나가 돈을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예요. 죄다 민준이 치료비로 빠지거든요.”

“…….”

“그리고 수술도 저희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래요. 교수님들 스케줄이 다 밀려 있고요. 빚을 져서라도 유명하고 좋은 교수님한테 받고 싶지만, 솔직히 지금 민준이 상태 보면 그때까지 버틸지도 의문이고.”

비주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문제가 뭐냐고 물었죠, 형?”

“어? …어.”

“모든 게 문제예요. 5년 넘게 아파서 매일 지옥 속에 사는 동생도 문제고. 동생 수발하느라 흔한 모임 한번 못 나가는 엄마도 문제고. 퇴근하고 나면 대리 기사 뛰는 아빠도 문제고. 본인 꿈도 포기하면서 동생들 위한답시고 적성에도 안 맞는 일을 하는 누나도 문제고.”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던 것이 서서히 풀려 나오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있는 비주가 낯설다.

늘 미소 짓고, 늘 차분하던 비주의 내면에 들어 있는 것은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익숙한 거라면 속마음을 털어놓는 와중에도 조곤조곤한 목소리 정도.

“가끔은 민준이가 소름 끼치게 미워요. 심할 때는 애가 열이 나서 형, 나 살려 줘 하면서 손을 뻗을 때도 그게 징그러워 보일 만큼요.”

“…….”

“모르겠어요. 이제는 지긋지긋해요.”

지긋지긋이란 단어에 형체가 있다면 방금 비주의 입에서 형체를 못 알아볼 만큼 짓이겨졌을 거다.

“5년 동안 견뎠어요. 내년에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완치해서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그 뒤로도 비주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했다.

민준이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사업에 실패한 후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엄마의 머리에 흰 머리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로스쿨을 가고 싶어했던 누나가 왜 학원 강사가 됐는지.

그리고 그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차분한 목소리가 자신의 고통을 풀어내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형. 진짜 이러다가 민준이 떠나면 저 어떡하죠?”

눈망울이 물감처럼 얼룩진다.

비주와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길 잃은 아이처럼 겁에 질린 눈빛을 보면서 나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다.

괜찮아 잘될 거야 같은 낙관적인 말.

네 잘못이 아니야 같은 위로. 네 심정에 공감해 같은 상투적인 말. 하지만 그 무엇도 내가 가슴에 담고 있는 진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정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라.”

일곱 살 생일, 엄마아빠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처럼.

“가끔은 일들이 그냥 벌어지고는 해. 정말 분에 넘치게 행운인 일일 때도 있고, 끔찍하게 괴로운 일일 수도 있고. 그런 상황에 ‘왜?’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래서도 안 되고.”

“…….”

“왜냐하면 네 잘못이 아니거든.”

조용히 듣고 있는 비주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나도 모든 게 다 잘될 거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그건 거짓말일 거야. 무슨 일이 닥쳐올지는 모르지. 바닷가에 서 있는 거랑 비슷한 거야. 가벼운 미풍이 불 때도 있고. 갑자기 파도가 몰아칠 때도 있고.”

“그런가요.”

비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말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네가 무슨 일을 겪든 간에 우리가 같이 있어 줄 거라는 거야. …뭐, 좀 오글거리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넌 혼자가 아니잖아. 우리는 앞으로 계속 함께 가야 할 사이기도 하고.”

우리가 같이 있어 줄게.

파도가 들이닥치든, 미풍이 귓가를 간질이든 곁에서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해 줄 거라는 게 내 얘기였다.

얄팍한 위로이긴 했지만 다행히도 효과가 있는 듯했다.

“고마워요.”

비주가 찡그리듯이 웃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이라 안심한 나는 웃으며 고갯짓을 했다.

“이제 갈까? 다 골랐지?”

“아, 사과를 아직 못 골랐어요.”

“음… 어디 보자. 이걸로 사.”

“이거요?”

“할머니랑 맨날 시장 가봐서 내가 사과는 잘 알아.”

“여기 벌레 먹었는데요.”

“…주로 할머니가 골랐지. 네가 원래 골랐던 거 사자.”

이제야 제대로 웃는 비주를 보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가면서 티슈나 하나 사 가야겠다.

*   *   *

어색한 침묵.

“형.”

“어?”

“그… 아까 마트에서 했던 얘기들 말이에요. 혹시 잊어 주실 수 있어요?”

“글쎄다. 맨인블랙에 나오는 기계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게 뭐예요? 웹툰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다른 동생들한테는 모르는 일로 할게.”

“고마워요.”

다시 어색한 침묵.

괴롭다.

대화 주제를 골몰하던 내가 입술을 뗐다.

“참, 해결 방안을 한번 생각해 보자.”

“해결 방안이요?”

“아까 우리가 같이 있어 준다고 그랬잖아.”

“아….”

잠시 침묵.

“말로만 그럴 게 아니고 우리가 도와줄까 해서.”

“아뇨, 아뇨. 그러면 부담스러워요. 오늘처럼 이렇게 시간을 내준 것만 해도 감사한데요. 뭘.”

“처음에는 이제 들어오는 저작권료로 수술비라도 보태 줄까 했… 비주야. 그런 표정 지으면 나 상처 받아. 그렇지 않아도 안 하려고 했다고.”

“다행이네요.”

방금 어떤 표정이었는지 설명하자면, 소개팅에서 다짜고짜 프러포즈를 받은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별건 아니고. 자잘한 거 말하는 거야. 너가 숙소에서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잖아. 가벼운 청소나 빨래 개는 건 리혁이가 하지만, 나머지 일에서 분담을 하자는 거지.”

“아.”

“무슨 문제가 있어?”

“그게.”

비주가 그러더니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형, 이게 이상하게 들리실 수도 있는데요…. 저 사실 집안일 좋아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저는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누가 제가 정성스럽게 만든 요리 보고 칭찬하거나 맛있다고 하거나, 청소할 때 그 말끔해지는 게 기분이 좋아요.”

실시간으로 변하는 내 표정을 봤는지 비주가 덧붙였다.

“그, 뭐지, 그거랑 같은 거예요. 형이 뮤직카페에서 아이돌 되려고 한 게 관객들 관심을 받는 게 좋아서라고 했잖아요. 저도 같은 거예요. 대신 주제가 집안일일 뿐이… 역시 이상하죠?”

중간에 말하다가 비주가 체념하듯이 말했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이상해.”

“형도 대표님을 메다꽂으셨잖아요.”

“야, 그거는… 이상하긴 하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한편으론 좀 당황스러웠다.

나는 여태까지 얘가 아침밥을 하고 집안일을 하는 게 일종의 강박이라고 생각했었다.

예컨대 어렸을 때부터 동생을 보살피면서 습관이 됐다거나.

아니면 모종의 심리적 이유가 있는.

그냥 좋아서 하는 줄은 몰랐지….

“너 혹시 도비 알아? 집요정?”

“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됐다, 이 머글아.”

“머글은 알아요. 아이돌 팬 아닌 사람 부르는 거 맞죠? 지호가 알려 줬는데.”

자기 아는 거 나왔다고 좋아하는 비주를 보면서 웃었다. 그거 아닌데.

집요정 같은 녀석.

생일선물로 양말 세트나 선사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장래 희망이 주부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래서 예전에 누나랑 장난으로 얘기한 게 있어요. 아이돌이 안 풀리면 돈 많은 집에 장가가는 게 어떠냐고. 집안일도 취미니까.”

“오히려 그쪽이 더 전망이 좋을지도…….”

“네?”

“아니야. 아무것도.”

비주가 리혁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다가 이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희한하게도 얘랑 훌쩍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아까 나눴던 대화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연말 평가 이후로 다시 한번 느끼는 거리의 좁혀짐이라고 할까.

정확히 표현은 어렵지만 담장이 한 단계 내려간 거 같았다.

울타리 위로 얼굴만 보던 사이에서 이제는 악수도 할 수 있는.

“그러면 우리가 뭘 해 줄 수 있는 게….”

“그럴 필요 없어요. 병원비 문제는 형이 이미 해결해 줬거든요.”

“내가?”

“이사님이랑 면담했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얼마 전에 A&R팀이랑 휴게실에 있을 때, 비주가 세상 다 산 표정으로 이사님 방에 들어갔었다.

“사정을 말씀 드리면서 썸씽 활동한 거 미리 정산받고 싶다고 부탁을 드리니까 허락하셨거든요.”

그날 이사님 방에 갔던 게 그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잘됐네. 금액은 충분해?”

“가족끼리 다 모여서 통장 열어 봤다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생각보다 돈 많이 벌었더라고요. 당분간 민준이 병원비 걱정은 덜었을 만큼요. 엄마고 아빠고, 다 부끄러워서 말은 못 하고 있지만 형한테 고마워하고 있어요.”

“어쩐지 사과 많이 주시더라….”

“기대해요. 이것도 다 형 거니까.”

으. 당분간 사과의 ‘사’ 자도 안 쓸 거다.

할머니 사랑해만 빼고.

어찌하면 합법적으로 과일 먹기를 피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동안 우리는 다시 병동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때.

비주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동안 한 남자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멀찍이서 걷고 있는 중년의 남자.

음?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어어?”

모든 게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들리면서 눈앞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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