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49화
데이지가 떠나고 우리는 남은 뮤직비디오 촬영을 마무리했다.
스탭들이 철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우리는 노을이 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와아.”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파도 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붉게 물든 바닷물이 멀찍이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옛 추억이 떠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였다.
“형.”
막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은 여전히 멀리 지평선에 둔 채 대답했다.
“왜?”
“나중에 우리 솔로 활동하면 노래 누구 줄 거예여?”
“그러게, 누구한테 주냐.”
“저인 거 다 알아여, 형. 다른 형들 기분 상할까 봐 대놓고 말을 안 하고 있는 거잖아여.”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막내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절대 안 줄 거다. 너한테는.”
“와, 너무해.”
“그러게, 왕지호 네가 말을 작작 잘 들었어야지. 역시 노래는 메인보컬이 제일 잘 소화할 수 있지 않겠어요?”
“넌 더 아니야.”
김칫국을 마시던 이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형, 전 랩을 쓸 줄 알아서 손이 덜 가요.”
“너도 아니야…….”
열심히 어필하던 래퍼가 시무룩한 바위처럼 변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녀석이 단아한 미소를 지었다.
“전 알고 있었어요, 형.”
“아니이… 다들 아니라고… 너네 나한테 왜 그러냐.”
괴로워하는 내 표정에 애들이 웃는다.
“아까 나윤이 누나가 한 말 때문에 그러져. 노래 잘될 거 같으니까 다른 그룹에서도 막 눈독 들인다고. 다른 사람들이 와서 사탕발림으로 형 뺏어 가면 어떡해여.”
“내가 무슨 물건이냐.”
“에이, 그건 아니져. 형은 그거예여. 뭐더라. 그… 울 아빠 표현으로 말하면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너한테는 진짜로 안 줄 거다, 내 노래.”
지호는 짐짓 울상을 짓는 척했고, 나와 멤버들은 웃었다.
당연히 농담이었다.
자칫하면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주제기에, 우리 모두 의도적으로 가볍게 말하고 있을 뿐.
“뭐, 하도 뜨고 나서 변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난 옛날부터 그런 거 싫어했어.”
그런 경험이라면 TJ 엔터에서도 차고 넘쳤다.
월말 평가 성적도 좋고 금방 데뷔할 거 같은 애가 있으면 가서 친한 척하고 알랑방귀 뀌고 그러는 거.
나는 그런 걸 몹시 싫어했다.
저럴 시간에 노래 연습이나 한 번 더 하지, 왜 저러나 싶었다고 할까.
“다 부질없다니까. 결국에는 자기가 열심히 해서 잘돼야 하는 건데. 나는 남을 이용해서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가더라고. 뭐, 전에 있던 회사에서도 볼꼴 못 볼꼴 다 보기도 했고.”
TNT 데뷔조에 뽑혔을 때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안부를 묻던 애들이 내가 떨어진 날부터 연락을 끊었다.
“그러고 보니까.”
비주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때 형이 한 말이 떠오르네요. 화이 엔터 복도에서 걸스온탑이랑 마주쳤을 때요.”
“아, 우리 연습생이라고 무시당했을 때?”
“그때 진짜 기분 나빴는데.”
“맞아여, 특히 길채경.”
“그때도 형이 그랬잖아요. 우린 저러지 말자고.”
나는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비주가 내가 하려는 이야기를 대신 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들을 안심시킬 겸 입술을 뗐다.
“그래, 뜨고 나서 변하고 그러는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솔직히 내가 우리 식구 챙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의 식구 챙길 정신머리가 있겠냐.”
“헐, 방금 들었어여? 우주 형이 우리 보고 식구래여.”
“저기, 지호야.”
마냥 해맑게 웃는 막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제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지 않을래? 그렇게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잠깐만, 야, 니들은 또 왜 그런 표정들인데.”
식구란 단어가 그렇게 좋았나.
겨울철에 뜨끈한 찐감자라도 들고 있는 듯한 표정의 동생들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혹시 잘되면 우리 버리는 거임?’ 이럴 때는 언제고.
갑자기 방긋방긋 웃고 있는 건 또 뭐야.
“리혁이 형, 비주 형 봐봐여. 완전 감동 먹었나 봐여.”
“비키니 때 탈덕한 거 아니었냐.”
“원래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는 거라구여.”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 동생 라인의 대화를 듣고 있을 때, 멀리서 민기 형이 외쳤다.
“얘들아! 슬슬 돌아갈 준비하자!”
“네-!”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갈까?”
주차장으로 다가가면서 우리는 연신 아쉽다는 듯 해수욕장을 돌아보았다.
“발도 못 담그고 아쉽네여.”
“뭐, 나중에 시간 되면 바다도 놀러 가고 그러자.”
“오, 좋아여. 그럼 우리 식구된 기념으로 여행 약속하는 거예여?”
막내가 까치발을 하며 내게 대롱대롱 매달렸다.
“형, 형. 그러면 우리 나중에 다 같이 놀러 가면 뭐 할까여?”
“그러게, 뭐 하지.”
중현이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고기 구워 먹고. 조개도 구워 먹어야지.”
“김중현, 넌 먹는 얘기만 하냐.”
“아, 그러게. 마시는 걸 깜빡했구나. 술도 한잔하면 좋을 것 같네. 우주 형은 못 마시니까 애들이랑 콜라 마시면 되고.”
“그럼 우리 운전은 누가 할 거예요? 다들 면허 없잖아.”
“나 있어.”
“중현이 형은 없는 걸로 칠게요.”
“나는 왜?”
여전히 까치발로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있던 막내가 대답했다.
“형은 힘두 세구 물건도 잘 부수잖아여. 만약에 운전하면 왠지 핸들 뽑아 버릴 거 같아여. 뽑고 어…? 막 이러면서 우리 쳐다보고.”
연기파 막내의 신들린 표정 연기에 모두 숨이 넘어갈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당사자인 중현이마저도.
뮤직비디오 촬영까지 완전히 끝나서 그런지, 우리는 간만에 여유로운 기분을 느끼며 주차장에 들어섰다.
그런 우리의 뒤로 노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뮤비를 끝으로 데뷔 앨범의 비주얼 작업이 끝이 났다.
앨범은 보통 3단계로 나뉜다.
첫째는 A&R팀이 기획한 것을 토대로 제작하는 작업.
둘째는 제작한 앨범을 콘셉트에 어울리게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시각적 매체로 보여 주는 비주얼 작업.
셋째는 앨범을 홍보하는 단계.
우리는 현재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더 이상 우리가 할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아니다.
“너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이야.”
뮤비 촬영이 끝난 다음 날, 윤석환은 엄청난 두께의 종이 뭉치들을 가지고 우리를 찾았다.
“형, 이건 또 뭐야?”
“이제 쇼케이스 준비해야 하잖아. 연습이야 너희가 알아서 할 부분이지만 기자 응대나 그런 부분은 아무래도 내가 교육을 해야 할 거 같아서. 뭐, 짧게 요약해 왔어.”
사악하게 웃는 매니저를 보면서 우리는 몸을 떨었다.
“쇼케이스는 중요한 무대야. 너희 지금 스트릿 보이즈 애들이랑 경쟁하는 중이잖아. 직접적인 승패야 노래를 들은 대중이 결정하겠지만 초반 흐름이라는 게 있거든.”
윤석환이 비교를 통해 설명했다.
“우리 회사 배우가 나온 영화 중에 <검은 꽃> 알지?”
“저 알아여. 조 이사님이 하자고 했던 그 영화잖아여.”
“그래. <검은 꽃>도 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없다가 입소문 타고 천만 영화가 된 케이스야. 뭐, 가요계와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어쨌든 이쪽은 초반 기자들 반응이 진짜 중요해.”
그가 강조하듯이 말했다.
“물론 너희가 음악 방송도 한 달이나 뛰고 뮤직카페도 나갔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은 너희가 누군지도 모르거든. 사전 정보가 없는 만큼 기자들이 너희에 대해서 뭐라고 써 주는지가 승패를 좌우할 거야.”
“홍보비 더 주는 쪽을 유리하게 써 주는 거 아니었어?”
“뭐, 그런 경우도 있다만. 너희도 보면 알잖아. 기사 보면 이게 회사에서 받은 보도 자료를 열심히 베껴 쓴 건지, 아니면 기자가 진심으로 우러나온 마음으로 기사를 쓰는지.”
결국 스트릿 보이즈와의 승부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선 쇼케이스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거였다.
바꿔 말하면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고.
“특히 너희는 라이벌 구도가 있기 때문에, 상대편에 대해서 말실수하면 바로 날아가는 거야. 미국이라면 모를까 우리나라 사람들, 햇병아리들끼리 헐뜯고 그러는 거 안 좋아하거든.”
“그럼 우리는 뭘 하면 되는데?”
“열심히 연습해야지. 당분간 내가 직접 질의응답에 관한 교육을 할 거야.”
그렇게 우리는 퍼포먼스 연습과 함께 기자들이 할 만한 질문에 대한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난처한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때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그렇지 않아도 Something 활동을 할 때, 인터뷰 등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에겐 반가운 기회였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해도 되는 말은 어떤 건지, 하면 안 되는 말이 뭔지 하나도 몰랐으니까.
음방이나 행사가 잡혔을 때보다 기자랑 인터뷰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더 떨릴 지경이었으니까.
그래서 윤석환이 질의응답에 대한 교육을 할 때마다 우리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수업이었다.
“되게 걱정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이렇게 알려 줘서 다행이에요.”
비주가 말을 하다 말고 낯빛을 흐렸다.
“그런데 실장님이 준 예상 질문들이요. 설마 이런 걸 정말 물어볼까요? 좀 너무한 것들이 많은데.”
“형, 세상 사람이 다 형처럼 착한 게 아니에요.”
“맞아여. 울 아빠가 그러는데 세상에서 상종 못 할 직업들이 여러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기자래여.”
“야, 너희 아버지는…….”
“뭐가여?”
“아니다.”
악명 높기로 유명한 지호네 아버지의 프랜차이즈를 떠올렸는지 뭐라고 말하려던 리혁이가 말을 그만둔다.
“그래도…….”
걱정하는 비주에게 내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연습 엄청 했잖아. 이제는 면전에서 욕해도 웃어 줄 수 있다니까. 석환 형이 쓰레기 같은 질문이란 질문은 다 가져와서 단련시켜 주기도 했고.”
“맞아여. 실장님, 악플러 짬바 있던데.”
비주가 그게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아니, 나는 다들 상처받을까 봐 그러지.”
“뭐 그런 것까지 걱정을 하냐.”
동갑내기 친구인 중현이가 태평하게 웃었다.
“그냥 부딪치면 되지. 데뷔 엎어지면서 멘탈 나갈 뻔한 적 한두 번 아니었잖아. 그런 거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그… 차가운 죽 먹기지. 앨범도 잘 만들었고, 재킷이랑 뮤비도 잘 찍었고.”
“어어, 중현이 형 또 그 말 할라 그래여.”
“다 느낌이 좋잖아.”
중현이가 꼭 예감이 좋다고 말하면 불행한 일이 벌어지는 징크스 때문인지 애들이 또 기겁을 한다.
우리 팀 래퍼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이번엔 예감이 아니고 느낌이라고 했잖아.”
“아무튼 안 돼요.”
“그래여. 예감 말고 느낌도 금지어에 추가할게여.”
호들갑을 떨어 대는 이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꼭 우리 할머니 보는 거 같다니까.
매월 초하루에는 계란을 깨면 안 된다, 절에 가는 날에는 뭐 하면 안 된다,
그런 미신은 이미 익숙했다.
그런데 얘네는 나이도 어린 애들이 그러고 있으니 뭔가 귀엽다.
“남 일인 것처럼 웃지 마요.”
리혁이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번 경험해 봤으면서 무서운 걸 모른다니까.”
“난 미신 안 믿어.”
“…….”
“왜 그런 표정으로 봐?”
“왠지 내 옛날 모습이 떠올라서요. 나도 한때는 아무 미신도 안 믿고 논리적이었는데.”
뭐, 여전히 논리적이지만, 하면서 중얼거리는 리혁이를 보면서 나는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처음에 중현이가 예감이 좋다고 하고, 바로 스트릿 보이즈의 기사가 나왔을 때도 난 아무렇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니까.
징크스는 징크스일 뿐, 아무런 효과가 없는 거다.
말도 안 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무슨 일이 생기겠어?
그리고 얼마 후.
말도 안 되게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 * *
우리 쇼케이스를 일주일 앞둔 6월 11일.
DNS 미디어에서 내보내는 9인조 보이그룹 스트릿 보이즈가 마침내 데뷔 쇼케이스를 했다.
K-Net에서 인터넷으로 라이브 중계를 한다나.
우리는 작업실 테이블에 노트북을 켜 두고 옹기종기 모였다. 경쟁 상대를 모니터링하기 위함이었다.
“와, 여긴 무슨 K-Net에서 라이브를 해 준데여? 우린 저런 거 없는데.”
“원래 DNS랑 거기 방송국이랑 친하잖아.”
“지난번에 나윤이가 그랬는데 스칼렛도 데뷔할 때 거기서 찬밥 신세였다고 그랬어.”
음악 전문 채널 K-Net은 보통 목요일에 음방을 진행하는데, 일반적으로 가수들이 금요일부터 있는 지상파에 나가기 전에 먼저 나가는 방송이었다.
아이돌에 한해서라면 지상파보다 영향력이 강한 부분도 있다고 할까.
애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거기 국장님이랑 DNS 대표랑 절친한 사이란다.
반면에 레몬이랑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는데 영 껄끄럽고 안 좋은 사이라고 하고.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K-Net에서 스트릿 보이즈를 밀어주는 건 사실 같다.
데뷔 전부터 리얼리티를 찍기도 했고, 지금 데뷔 전날 인터넷으로 생중계를 해 주고 있었으니까.
“어? 나온다.”
“우와, 작년에 봤을 때보다 다들 살 엄청 빠졌다.”
카메라 셔터가 번쩍번쩍하는 가운데, 저화질 화면 위로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이 나타났다.
힙합적인 특색이 느껴지는 의상들이었다.
“오오, 느낌 있다.”
“스웩 있는데? 우리도 나중에 힙합 도전할까?”
“쉿, 조용히 해여. 노래 시작할라나 봐여.”
조명이 암전되면서 첫 무대가 시작됐다.
우리는 기대감을 품고 화면을 바라봤다. 경쟁자라고 해도 같은 음악인으로서 궁금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노래일까.
이윽고 강렬한 기타 리프 사운드와 함께 9명의 멤버들이 가장자리부터 안무를 시작했다.
마침내 중앙에 있는 리더까지 손동작이 도달했을 때.
모든 조명이 일시에 켜지면서 본격적인 노래가 시작됐다.
“오오, 좋은데?”
노래가 좋다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을 때, 미소를 짓고 있던 우리의 표정은 얼마 가지 못했다.
1절 중간 부분에 나온 리더, 한조의 자작 랩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말하지
You don’t have Something cool
Something nice
But 내 생각은 달라 (달라)
그게 뭐 별거라고 우리에겐
모자람이 없어
굶주림과 독기가 있지
We all have a hunger
그다음부터 단체 군무와 함께 We all have a hunger라는 후렴구가 Hunger의 무대에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우린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조가 내뱉은 랩에 있던 Something의 뉘앙스 때문이었다. 미묘하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누구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저거 지금…….”
말을 잇지 못하는 리혁이의 말을 내가 받았다.
“맞아. 쟤네 지금 우리 디스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