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50화
노트북 화면을 보는 우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작업실에 감도는 침묵.
모니터 안에선 스트릿 보이즈가 신나게 데뷔 무대를 펼치고 있었다.
“아, 열 받네.”
리혁이가 말했다.
“회사끼리 싸우는 건 그렇다 치는데 이건 아니지. 우리가 자기네한테 뭔 피해를 줬다고 디스를 해요?”
“저쪽도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잖아.”
비주가 차분한 목소리로 메인보컬을 달랬지만, 정작 본인도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막내는 입술을 깨물고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고, 중현이도 간식 먹던 걸 그만두고 모니터를 지그시 바라본다.
아무리 경쟁이 붙어도 그렇지. 선을 넘네.
우리가 화가 난 이유는 단순히 상대가 우리를 디스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일종의 배신감이라고 할까.
우리는 지금까지 DNS와 스트릿 보이즈를 별개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생각하려고 했었다.
저쪽 회사에서 하는 공작이 치졸한 거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스트릿 보이즈에게 뭔 잘못이 있겠냐고.
물론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나도 한몫했다.
그룹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선의의 경쟁은 도움이 되지만, 미움이나 질투 같은 부정적인 감정으로 이어지면 좋지 않으니까.
그래서 스트릿 보이즈도 연예계 동료로서 대하자고 말했었다.
다 같이 힘든 처지에 서로 미워하고 그러지 말자고.
애들도 납득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스트릿 보이즈의 무대를 보면서 잘한다고 칭찬하고 있었다.
한조의 랩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에겐 Something이 없어. 하지만 그게 뭐 별거라고.
솔직히 말해서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거 같다.
나는 쟤네를 그래도 선의의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쟤네는 지금까지 우리를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거니까.
“일단 쇼케이스 끝까지 지켜보자. 질의응답 시간에 분명히 기자들한테서 말 나올 거야.”
동생들을 달래며 일단은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랩에 대한 질문이 분명히 나올 것 같으니,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판단하기로.
데뷔 무대가 끝나고 쇼케이스는 무난하게 흘러갔다.
유명한 개그맨 MC가 진행을 하는 동안, 스트릿 보이즈는 신인답게 쭈뼛대고 어색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에 이르러 나온 Q&A 시간.
내 예상대로 첫 질문부터 랩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연예IN의 오소희 기자입니다. 먼저 데뷔 축하 드리고요. 일단, 데뷔 타이틀 Hunger의 가사에 대해 질문 드릴게요.
스트릿 보이즈가 긴장한 모습으로 마이크를 잡는 가운데, 기자의 목소리가 흘렀다.
-곡에서 한조 씨의 자작 랩이 나오는데요. 거기서 ‘Something이 없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하지만 그게 뭐 별거라고.’ 라고 되어 있잖아요? 저는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뉴블랙의 Something이 연상됐거든요.
내가 딱 듣고 싶은 질문이었다.
-지금 뉴블랙과 스트릿 보이즈가 경쟁 관계기도 하고, 아무래도 그걸 의도한 가사가 아닌가 싶은데. 곡을 직접 프로듀싱한 한조 씨가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가죽 재킷을 입은 멤버가 마이크를 든다.
키가 훤칠하고 선량하게 생긴 외모.
리더인 한조가 기자가 있는 쪽을 향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라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해당 랩이 나온 맥락은 저희 멤버들 개인사와 관련된 문제거든요. 워낙 주변에서 너흰 안 될 거야, 잘생기지 않았다, 연예인이 될 만한 끼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에겐 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우린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 하는 그런 의미에서 나온 가사입니다.
웃기고 있네.
한조의 대답을 들으면서 완전히 고의라는 걸 알아챘다.
보통 전혀 생각지도 못한 논란거리에 대해 물어보면 일단은 당황하고 생각에 잠긴다.
그런데 이렇게 예상했다는 듯 대답하는 건.
회사든 본인이든 이런 말이 나올 줄 알고 미리 준비했다는 거다.
“어처구니가 없네. 까려면 앞에서도 까든가.”
리혁이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동안, 한조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뉴블랙과 경쟁 관계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사실 저희는 그분들을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음?
-저희보다 데뷔도 빠르셔서 어떻게 보면 가요계 선배시기도 하고, 존경스럽다고 할까요.
-존경스럽다고요?
-이번에 Hunger라는 자작곡을 타이틀로 만들면서, 노래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지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전문 작곡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뉴블랙의 리더인 분은 혼자 작곡을 하셨다고 들었거든요. 솔직히 저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인데.
뭔가 꺼림칙했다.
차곡차곡 우리를 칭찬하는 스택을 쌓아가는 게 어떤 걸 말하기 위한 빌드 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Something을 장소원 선배님과 단둘이 작곡하신 것도 그렇고, 뮤직카페에 나오셔서 말씀하시는 것도 들어 봤는데. 솔직히 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재능도 많고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면 속에서 한조가 미소를 지었다.
-진짜 천재를 바라보는 것 같다고 할까요.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아까 디스 가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똥이 던져졌음을 깨달았다.
* * *
-스트릿 보이즈 ‘한조’, “뉴블랙 우주는 천재”
-스트릿 보이즈 “뉴블랙은 경쟁자 아냐. 오히려 천재적인 선배님들”
-굶주림과 독기로 똘똘 뭉쳤다, 스트릿 보이즈 성황리에 쇼케이스 마쳐
쇼케이스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물론이고 끝난 뒤에도 기사가 한참이고 계속해서 올라왔다.
경쟁사 쇼케이스인데 바쁜 건 우리 회사였다.
라이브 중계가 끝나자마자, 윤석환은 프로듀서의 호출로 전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떠났다.
한조가 던진 똥 때문이었다.
물론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무려 나를 보고 ‘천재’라면서 추켜세운 것이니까.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속내가 따로 있다.
고단수의 견제.
솔직히 아이돌이 자작곡으로 타이틀을 내보낸다고 하면 대중은 일단 색안경을 끼고 본다.
아이돌이 작곡을 해 봤어야 얼마나 하나.
그래서 퀄리티가 조금만 좋아도 ‘어? 생각보다 들을 만 하네?’하면서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쟤 진짜 천재 같아’하고 누군가 치켜세운다면 어떨까.
자연히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체 얼마나 잘했길래 천재라고 치켜세우는 거야? 하는 식으로.
혹은 우와, 진짜 대단한가 보네, 할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본래 있던 기대치라는 게 지나치게 높아져서 노래가 엄청 좋지 않은 이상은 좋게 들리지 않으니까.
“팬들 반응 장난 아닌데요.”
중현이가 폰을 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가 봐도 저격인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고. 자기네만 좋은 평가 받고, 다음에 나올 뉴블랙은 엿 먹으라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다들 엄청 화내고 있어요.”
가장 열받은 건 몇 안 되는 우리 팬분들이다.
자기가 응원하는 가수가 데뷔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 엄한 놈이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디스를 했으니까.
그래서 너 얘 욕한 거냐고 물으니 ‘아니에요, 존경하죠’ 라면서 쏙 얄밉게 빠져나갔다.
“아이돌 좋아하는 사이트들에서는 별 얘기가 없나 봐여. 그냥 스트릿 보이즈 노래 좋다, 이러구.”
지호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쇼케 끝난 DNS 신인 그룹 스트릿 보이즈 단체 사진]
-의상 뭔 일이래;; 좀 촌스러운데
-드디어 데뷔했네 ㅊㅊ
-가운데랑 오른쪽에서 두 번째 취향이다
-가운데가 걔지? 이번에 타이틀 작곡한 애
-아이돌 자작곡이라고 해서 노래 기대 안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거 같더라
-인물이 없다.. 인물이..
-코디에 돈 안 씀? 노래에 돈 다 꼴아 박았나
-ㅇㅇ 노래는 좋더라
-식티 이후로 힙합 컨셉 잡는 애들 없어서 아쉬웠는데 흥했음 좋겠당
-센 컨셉인데 찰떡같이 소화했음 흥하자
반응은 평소 신인들이 데뷔할 때 그러하듯 덤덤하다.
노래에 대한 호평들도 많고.
-노래 괜찮던데 좀 가사 문제 있는 거 아닌가;;; 대놓고 뉴블랙 저격하던데
-?? 그런 게 있었어?
-썸씽 따윈 필요 없어 뭐 별거냐 이런 거 였을걸.. 아까 기사도 나오지 않았나?
-ㅋㅋㅋㅋ아니 그래서 아까 큐앤에이 때 기자가 물어봤잖아 그래서 아니라고 했는데
-ㅇㅇ 심지어 존경하느니 천재니 뭐니 하면서 추켜세워졌잖아. 솔직이 너무 궁예임
-222 칭찬까지 했는데 뭘 더 해명함
-존나 음습하네. 누가 봐도 디스인데??
-음습은 무슨 ㅋㅋㅋㅋ 벌써부터 신인 머리채 잡으려고 난리 났네
-걔 뉴블랙 컨셉 샷 올라온 뒤로 얼빠 확 늘은 듯ㅋㅋ
-야 나 두 그룹 다 관심 없는 사람인데 얘네 둘 만큼 데뷔 전부터 시끌시끌한 애들 처음 봤다. 적당히 좀 해 무슨 텐티나 식티급도 아니고 데뷔 막 한 애들끼리 그러고 있어
가사가 뉴블랙을 저격한 게 아니냐는 댓글들은 대부분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걔 뉴블랙 애가 작곡한 썸씽이 그렇게 대단한 거임? 뭘 천재까지;;
-그냥 립 서비스지
-천재는 무슨ㅋㅋ 자기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있네
-노래 근데 어떨지 진짜 궁금하네
-맞아ㅋㅋ 이러면 궁금해서 한 번씩 들어 볼 거 같긴 해ㅋㅋㅋ
-경쟁자 아니었나? 스트릿 보이즈가 뉴블랙도 잘되라고 홍보 낭낭하게 하는 듯.. 궁금해지자너
졸지에 천재 작곡가가 돼 버린 나에 대해서는 궁금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내 생각과 달리 마냥 부정적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대부분 ‘노래가 어떨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노래를 들어 보겠다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뭔가 상대가 의도한 바와 다르게 흘러간다고 할까.
잘하면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던 때, 회의를 마친 윤석환이 우리를 찾아왔다.
그가 회의 결과를 설명했다.
“여러 가지 대응 방안에 대해서 의논해 봤는데, 지금 상황에서 마땅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 같다. 천재가 아니라고 기사를 내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노래가 그만큼 좋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일단은 남은 시간 동안 쇼케이스에 집중하자.”
그가 말하는 바는 우리의 생각과 일치했다.
여기서 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감독과 코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기에 남은 일은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스트릿 보이즈의 이런 전략은 어떤 면에서 보면 내게 도움이 됐다.
일주일 남은 기간 동안 어떤 말로 애들을 독려해서 연습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다들 눈에서 불길이 이글이글거렸다.
“형, 우리 뼈 부서질 각오로 해요.”
내가 해야 할 말을 하는 동생들을 보며 나는 조용히 웃었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2014년 6월 18일, 수요일.
청담동의 미디어 아트홀.
[뉴블랙 1st 싱글앨범 ‘The New Black : First Chapter’ 쇼케이스]
하품을 하면서 노트북 전원을 키는 기자들.
아직 쇼케이스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꽤 남은 상황이라, 안면을 익힌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수다를 떨었다.
“어? 오 기자님? 스트릿 보이즈 쇼케 때 뵀었죠.”
“네, 안녕하세요.”
“이번 달에 뭔 놈의 쇼케이스가 이리도 많은지. 다음 주에는 어울림에서 내보내는 신인들도 쇼케한다면서요.”
대화 주제는 당연히 6월 달의 라이벌 싸움이었다.
“둘 중에 누가 잘될 거 같아요?”
“전 뉴블랙이요.”
“하긴, DNS가 보이그룹에는 영 소질이 없긴 하죠.”
“음? 스트릿 보이즈 음원 추이 보니까 괜찮던데요. 음방 첫날에 99위인가 바로 차트 인 했잖아요.”
아이돌 경쟁이 치열해진 요즘 시대에 데뷔를 막 한 신인이 첫날부터 차트에 들어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돌 팬덤들 사이에서 얘네 둘 싸움으로 시끌시끌했잖아요. 솔직히 관심이 몰리기도 했고.”
“근데 자작곡으로 차트 인 한 건 대단하죠.”
“글쎄요. 관계자들 통해서 듣기로는 랩만 거기 리더가 썼지, 사실상 멜로디 전반은 작곡가가 다 썼다는데요. 거의 이름만 빌려준 수준이라던데.”
“뭐, 요새 누가 곡을 혼자 쓰나요. 다들 협업하지.”
“맞아요. 오늘 데뷔하는 그 누구지, 우주? 걔가 특이한 거죠. 보통은 전문 작곡가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관여하니까.”
그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DNS 쪽 통해서 귀띔 들으니까 초동 판매량도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모르긴 몰라도 제법 인상적인가 봐요.”
“잘됐네요. 식스티 이후로 힙합 컨셉은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아직은 지켜봐야죠. 막 1주차 됐으니까.”
“그래도 노래도 좋고. Hunger는 올라갈 일만 남은 거 같아요.”
이윽고 기자들의 화제는 뉴블랙으로 옮겨 갔다.
“뉴블랙 애들은 어떨까요? 혹시 소스 있는 분 있어요?”
“며칠 전에 거기 홍보팀 직원들이랑 술 한잔했는데, 슬쩍 떠보니까 노래 좋다고. 기대하셔도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레몬 쪽이 어지간하면 확신이 있다는 소리 잘 안 하는데 그만큼 노래가 좋나 봐요.”
“블러핑 아니에요? 아이돌 자작곡이 그렇게 좋다는 거 처음 들어 보는데.”
“진짜 재능이 있나 보죠. 걔 아버지도 그렇고, 뮤카 때도 피아노 치는 거 보니까 견적 나오던데요.”
누군가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 레몬에서 돈 쓰는 거 보니까, 정말 이 악물고 뛰어든 거 같더라고요. 재킷 촬영도 그 황태선한테 부탁하고.”
“황태선이요? 톱스타들만 작업하는 사람 아닌가.”
“뮤비 감독도 정성문 감독이래요. 독립 영화계에서 활동하다가 작년에 TNT 대박 뮤비 찍은 사람 있잖아요. 작업한 사람들 면면을 들어 보니까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대단하네요. 그렇게 투자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만큼 이번 앨범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기자 하나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프로듀서도 프로듀서지만, 박규호 대표가 어디 보통 사람인가요. 시작할 때만 해도 1인 기획사였는데 지금은 배우 방면에서 레몬이 세 손가락 안에 들잖아요. 얼마 전에 FA 나온 배우들도 대규모로 영입하기도 하고.”
“하긴, 지금까지 행적을 보면 확신이 없는 일에는 안 뛰어들긴 했죠.”
“맞아요. 스칼렛도 처음에는 다들 외모만으로 어필하는 애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실력파였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나눌수록 기자들에게는 묘한 기대감이 감돌았다.
중소기획사에서 신인 그룹 하나를 데뷔시키는 것치고는 과도한 투자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앞으로 나올 노래가 어떻기에 그런 투자를 한 걸까.
“어? 이제 슬슬 시작하려나 본데요?”
장내에 앉아주시면 좋겠다는 안내 말과 함께 이윽고 홀에 있는 조명이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암전되고 나서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오늘 쇼케이스의 첫 순서로 예정된 뮤직비디오였다.
팔짱을 낀 그들의 앞으로 오프닝 장면이 흘러나왔다.
-똑.
어둠 속에서 들리는 물소리.
-똑.
물방울 소리가 이어지면서 화면이 밝아진다.
이윽고 등장한 소녀.
카메오로 출연한 스칼렛의 래퍼, 데이지가 물에 잠긴 바닥을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띄운 채.
어딘가 오묘한 분위기였다.
어두운 듯하면서도 밝은 조명 처리, 그 아래서 암흑만이 가득한 공간을 데이지가 걸어간다.
여유롭게 걷던 소녀는 이윽고 걸음을 멈춰 선다.
그녀를 가로막은 투명한 유리벽 때문이었다.
유리 벽을 매만지던 데이지가 입가에 손을 올리며 우아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곤 손을 올려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그래픽의 힘을 빌려, 입김이 하얀빛처럼 반짝이며 빛 무리를 흩뿌린다.
그 빛은 유리벽을 통과하면서 다섯 색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보라.
프리즘처럼 다섯 갈래 무지개로 갈라진 빛은 이내 우주처럼 별이 반짝이는 공간을 질주했다.
그리고 다시 섞인다.
다섯 갈래의 빛이 서로 얼키설키하면서 빛은 이제 검은색이 되었다.
마침내 떠오르는 로고.
[The New Black]
그와 함께 암전된 화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화창한 하늘.
어딘가 이국적인 바다에서 다섯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시작되는 노래.
귀가 탁 트이는 청량한 전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