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53화
미디어 쇼케이스가 끝나고, 우리는 대기실로 돌아왔다.
다들 진이 빠진 기색이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해야 할 일을 잘 끝냈을 때 느끼는 후련함이라고 할까.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다들 수고했어.”
“고생했어요. 형.”
서로를 토닥토닥하면서 눈빛을 교환했다.
힘든 일을 치러서 그런지 간만에 전우애가 싹트는 분위기였다.
“포토타임도 무사히 잘 넘기고. 질의응답 시간도 잘 넘기고. 이 정도면 우리 역대급으로 잘한 거 같지 않아여?”
“야. 니가 잘했냐. 이 아저씨가 혼자서 하드 캐리한 거지.”
미니 선풍기로 바람을 쐬던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 그래, 리혁아. 지호도 잘했어.”
“우리가 한 게 뭐 있다고. 방금 사고 날 뻔한 거 혼자 수습한 것도 그렇고, 우리야 가만히 누워서 얻어 먹은 거잖아요.”
“음? 누워서 먹으면 큰일 나지 않나.”
“중현이 형, 우리 제발 맥락에 맞는 얘기를 좀 해요.”
메인보컬의 타박에도 래퍼는 연신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평소의 태평한 무드와 달리 기분이 업 되어 보인다고 할까.
“고마워요. 형.”
중현이의 하이 파이브를 얼떨결에 받았다.
짝!
어우, 아파.
살살 친 거 같은데 배구 선수랑 손뼉을 마주 댄 것 같다.
중현이가 씩 웃으며 말했다.
“형 덕분에 제 징크스가 드디어 끝났어요.”
“징크스? 아.”
워낙 쇼케이스가 정신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네.
“제가 예감이 좋다고 말할 때마다 이상한 일 터지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형 덕분에 이번에 깨졌네요. 아, 후련해.”
“그래. 내가 미신이라고 했잖아, 그거.”
“…라고 하기에는 중현이 형이 말하자마자 바로 음향 사고 난 거 알죠?”
“솔직히 우주 형 운 빨로 극복한 거예여. 그건.”
두 막내의 반박에도 중현이는 흡족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앞으로는 하루에 한 번씩 예감이 좋다는 말을 할 거라는 농담과 함께.
리혁이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아까 무반주로 나간 거요.”
“어, 왜?”
“우리가 무대 끝나고 물어봤을 때 무의식적으로 지른 거라고 했잖아요.”
“그랬지.”
불꽃놀이의 무대가 끝나고 상기된 얼굴로 이것저것 묻는 동생들에게 난 대충 얼버무렸었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지른 거 맞아요?”
“어느 정도는.”
“아니, 평소에 뭐 할 때마다 계획 엄청 세우고 하잖아요. 불꽃놀이 작곡할 때도 음악 성향 파악하겠다고 우리를 감금시키기도 하고.”
“야. 그게 무슨 감금이야.”
…라고 말하면서 둘러봤지만 지호와 중현이가 친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여간 저 도움 안 되는 바보 놈들.
“나라고 꼭 뭐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건 아냐. 나도 무대에서 음향 사고 처음으로 겪어서 얼마나 당황했는데.”
“그래요? 처음이라기엔 너무 능숙하던데. 보면서 되게 멋…….”
“멋?”
리혁이가 말을 얼버무렸다.
“머, 멀어 보였어요. 나는 그런 거 못 했을 거 같으니까.”
“그냥 멋있었다고 해여. 형.”
“인정. 저 아까 되게 신기했어요. 형이 무반주로 안무하는데 막 후광이 비춰서.”
“그거 조명이에여, 중현이 형.”
“아, 그런 거야?”
“저저 봐. 저 아저씨 입가 씰룩거리는 거.”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 관리를 하는데, 동생들의 칭찬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복합적인 웃음이었다.
하나는 멤버들의 감사와 칭찬에 대한 뿌듯함.
또 하나는 이게 나의 센스가 아니라 능력 덕분에 생긴 일이라는 것을 아는 데서 느끼는 민망함.
뭐.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잖아.
본능적으로 몸이 나갔다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알겠다.
나름의 성과라고 할까.
이번 일로 능력에 대한 비밀을 한 꺼풀 벗겨낸 것 같다.
능력의 본질.
나는 그간 이 능력을 동작 모방 능력이라고 부르면서 어떤 초능력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오늘의 일을 겪고 보니, 마냥 초능력은 아닌 것 같았다.
처음 능력에 대해 자료를 모을 때 인터넷 블로그에서 참고한 글이 있다.
[기억에는 서술 기억과 절차 기억이 있다.]
서술 기억은 일기를 쓰면서 하루 일과를 떠올리거나 영단어 암기를 할 때 쓰이는 의식적 기억이다.
절차 기억은 자전거를 타거나 젓가락을 사용할 때처럼 무의식적인 작업에 쓰이는 기억.
내 이론에 의하면 이 능력은 절차 기억이 극대화되면서 발현된 현상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영상 속의 움직임을 무의식적으로 터득해 버리는 것.
여태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 겪은 두 가지 사건은 절차 기억이 아니라, 앞서 말한 서술 기억이 극대화된 것이었다.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일들을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리는 능력.
돌이켜보면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발현된 것 같다.
시험이 5분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머리에 잊고 있던 공식이 번뜩 떠올라 문제를 푸는 수험생처럼.
이 능력도 내가 어떤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번뜩이며 나타났다.
굳이 말하자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낄 때 자극이 된다고 할까.
대학 병원에서는 민준이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방금 전 음향 사고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내 뇌가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기억 속의 데이터베이스를 자기가 알아서 촤르륵 훑은 다음에 ‘봐! 주인 놈아!’ 하면서 보여 준 거지.
물론 아직까지는 내 가설일 뿐이다.
어쨌든 이 모든 걸 종합하면 내 능력은 단순히 동작 모방 능력에 그치지 않고 보다 더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절차 기억뿐만 아니라 서술 기억도 포괄하는 기억 능력.
애초에 동작을 모방하는 행위가 그 동작을 기억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걸 생각하면 꽤 논리적이지 않은가.
“형. 무슨 생각해요?”
“어?”
“혼자서 웃고 있길래요.”
“아,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별일 아냐.”
갑자기 무슨 초능력자라도 된 것 같다는 생각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던 터였다.
정신을 차린 나는 주변을 살폈다.
“참, 매니저 형들이랑 비주는?”
“민기 형은 윤 실장님이랑 차에서 뭐 좀 가져온다고 그랬구여. 비주 형은 화장실에서 세수하고 온대여.”
“혼자 갔어?”
“넹.”
“얘 또 길 잃어버리고 그러진 않겠지?”
리혁이가 웃었다.
“비주 형이 애도 아니고. 나가면 바로 화장실이 있는데 어떻게 길을 잃어버려요?”
“비주잖아.”
“맞아여. 비주 형 가끔 숙소에서도 방향 헷갈린다니까여. 제가 지난번에 봤어여. 음식물 쓰레기 들고 베란다로 가다가 멈칫했다니까여.”
“걱정하지 마요. 형. 언젠가 오겠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동생들을 보며 혀를 찼다.
“와. 이 정 없는 것들. 어떻게 걱정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냐.”
“자기는 화장실 간 것도 몰랐으면서.”
“…….”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비주와 두 매니저.
각자 품에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오더니 대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소리가 날 만큼 무거운 짐들.
“음? 이건 또 뭐야?”
상자에 든 내용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팬분들에게 드릴 선물이래요.”
* * *
팬 쇼케이스.
오늘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행사였다.
미디어 쇼케이스가 기자들을 불러서 하는 비즈니스 미팅이라면 팬 쇼케이스는 일종의 팬 미팅이다.
사실 데뷔 때부터 팬 쇼케이스를 여는 경우는 드물다.
팬 쇼케이스는 말 그대로 팬들을 대상으로 하는 쇼케이스인데 막 데뷔하는 신인에게 팬들이 어디 있나.
물론 데뷔 전부터 팬덤을 보유한 팀들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다.
그에 반해 우리는 데뷔 전부터 음악 방송, 행사 등을 통해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케이스였다.
팬카페에도 어느 정도 인원수가 확보된 상황.
그랬기에 회사에서도 팬들의 성원에 보답할 겸 쇼케이스를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스트릿 보이즈도 했는데 당연히 우리도 해야지. 그런 거에서 밀릴 수는 없잖아?”
…라는 우리 매니저의 설명이 본심이지 않을까 싶긴 하다.
“우와. 이게 다 뭐예여?”
“너희 포토카드랑 과자랑, 뭐 열쇠고리 같은 선물들.”
“우와아.”
한 무리의 미어캣처럼 우리는 상자 앞에서 기웃거렸다.
꽤 무거워 보이는 상자들.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석환 형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아프다.
“허리 디스크인데 이런 거 들어도 돼? 나나 중현이 부르지.”
“그러려고 했는데, 여기 네 동생이 길 잃어버렸다고 문자를 보내서 말이지.”
“죄송합니다아….”
민망해하는 비주를 보며 모두 웃었다.
“또 길 잃어버렸어?”
“아, 그게 세수하고 나오다가 다들 고생하기도 해서 음료수 사려고 했거든요. 자판기 찾다가 그만…….”
“얘 혼자 기자재 사이에서 혼비백산하고 있는 거, 겨우 찾은 거야.”
윤석환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비주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자판기에서 뽑아 왔다는 음료수를 돌렸다.
다들 천 원짜리인데 내 것만 천이백 원이다. 왠지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상자 앞에 둘러앉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뭘 해야 할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팬들에게 줄 포토카드에 사인과 인삿말을 써 주고, 다른 선물을 열심히 포장하는 것.
순식간에 대기실이 가내 수공업 현장으로 탈바꿈했다.
비닐봉지에 초콜릿을 한웅큼 담던 지호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와, 진짜 많다. 근데 저희 몇 명이나 오는 거예여, 실장님? 포토카드도 엄청 많은 거 같은데.”
“너희 몰라? 얼마 전에 티켓팅도 했잖아.”
“우린 연습하느라 바빠서 못 봤지. 쉬려고 할 때마다 꼭 누가 내려와서 연습 안 하냐고 닦달하는 바람에 말야.”
내 말에 석환 형이 헛기침을 하다가 말을 돌렸다.
“너희 생각에는 몇 명 정도 올 거 같은데?”
“글쎄…….”
“저여, 저여! 포토카드 제가 다 세 봤는데 우리 개인 컷 담긴 게 50장 정도 되거든여. 그럼 250명 아니에여?”
“뭔 기적의 계산법이냐. 그건.”
내가 눈을 깜빡거리자 지호가 설명했다.
“1개씩 나눠 주면 250개잖아여. 그럼 250명.”
“오. 그럴싸한데.”
“뭐가 그럴싸해요, 중현이 형.”
바보처럼 히죽대는 둘을 보며 리혁이가 타박했다. 그리고 나는 리혁이의 의견에 공감했다.
“250은 아무리 봐도 오버 같은데.”
“형, 꿈은 크게 갖는 거예요.”
“맞아여. 모름지기 리더라면 크게 해먹어야 하는 거라고 울 아빠가 그랬어여.”
중간에 이상한 말이 하나 끼어 있는 거 같지만 무시하자.
“솔직히 50명 정도 와 주시지 않으려나.”
“왜요?”
“아니, 평일이기도 하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 얼굴 보겠다고 200명이나 온다는 게 난 상상이 안 가.”
“스트릿 보이즈도 100명 넘게 오지 않았어여?”
하긴.
일주일 전에 했던 스트릿 보이즈의 팬 쇼케이스도 거의 100명에 가까운 팬이 찾아온 걸로 알고 있다.
잠시 동안 몇 분이나 올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나 역시도 그 이야기에 동참하다가, 이내 뭔가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팬분들이 얼마나 와 주시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와 주시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할 일이지.”
“맞아요.”
포스트잇에 메시지를 정성스럽게 적던 비주가 말했다.
“우리 얼굴 보고, 우리가 만든 노래 듣겠다고 여기까지 오는 분들이 있다는 것만 해도 저는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한 명이 오든, 백 명이 오든 다 똑같은 팬분들이잖아요.”
“우와…….”
감탄하던 막내가 말했다.
“보통 저런 느끼한 대사는 우주 형 몫인데, 오늘은 비주 형이 대신 해 줬네여. 신기방기.”
“야.”
“저 아저씨에게 옮은 거지. 뭐.”
“역시 좋아하면 닮는다는 말이 맞나 봐여.”
“아깝다. 기왕 닮는 거 김비주가 키도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악!”
“넌 조용히 있어, 김중현.”
중현이가 한마디를 하다가 비주에게 옆구리를 꼬집혔다.
나는 동생들을 보며 웃다가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저희 열심히 할게요!’ 라는 메시지를 포스트잇에 썼다.
정말로, 몇 분이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객석에 한 명만 있더라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를걸.
애초에 내가 아이돌이 된 이유도 내 무대를 바라봐 주면서 좋아해 주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 무대를 좋아해 줄 사람들과 만나 노래를 들려주고 교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 깊은 일이었다.
상상만 해도 설레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
얼른 팬들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 * *
저녁 7시.
새롭게 의상을 갈아입은 우리는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했다.
팬들과 만난다는 생각에 들뜨는 한편 모두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러게요.”
“진짜 한 분 오고 그런 거 아니겠지.”
객석을 보고 싶은데 조명이 꺼져 있어서 안 보인다.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몇 명이나 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올라갈게요.”
현장 스탭의 신호에 맞춰 우리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긴장된다.
미디어 쇼케이스가 연예계 관계자들에게 우리를 소개하는 일이라면, 이번 팬 쇼케이스는 팬들에게 우리를 소개하는 행사였다.
어떤 면에서 보면 미디어 쇼케이스보다 훨씬 더 중요한 행사.
침을 꿀꺽 삼키며 무대 위에 섰다.
“…….”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어둠.
고요한 침묵이 날 괴롭혔다.
얼른 어둠에 적응해서 관객석 쪽을 가늠하려고 할 때, 탁! 소리와 함께 조명이 환하게 비췄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찡그리는 것도 잠시.
객석을 보는 순간, 나는 당황해 버렸다.
……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와아아아아!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풍경에 우리는 말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