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57)화 (57/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57화

나는 얼마 전에 리혁이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걔가 누군지 몰랐어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얼굴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예전에 만났을 때는 어렸어서 지금이랑은 얼굴이 좀 달랐거든요.”

레몬 엔터에 오기 전, 리혁이는 어울림 엔터의 연습생이었다고 했다.

어울림 엔터테인먼트.

DNS, 레몬과 함께 매년 연말 평가를 진행하는 5개의 중소 기획사 중 하나로 업계에서는 건실하다는 평을 듣는 회사다.

특징으로는 보컬 전문.

댄스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다른 기획사와 달리 어울림은 가수를 키우는 데 특화된 기획사다.

아이돌과 가수의 중간 폼이라고 할까.

어울림에서 나온 가수들을 보면 아이돌은 아니지만 아이돌스러운 느낌의 솔로 가수나 보컬 그룹이 많다.

예컨대 수려한 외모로 인기가 높은 4인조 보컬 그룹 ‘플레이리스트’라든가.

댄스에 취약한 리혁이가 어울림에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하죠? 나 화이 엔터에서 춤부터 춰 보라고 해서 떨어졌다고. 그 이후로 다른 기획사에 지원해 봤는데 그때마다 춤 때문에 줄줄이 탈락했거든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당연하게도 우리 괴물 보컬을 본 회사 관계자는 오디션이 끝나기도 전에 계약서를 출력해 왔다고 한다.

그렇게 리혁이는 연습생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잘 흘러갔다고 했다.

압도적인 보컬 실력 덕분에 단숨에 데뷔가 가능한 수준이었고, 회사 사람들도 그런 리혁이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문제는 리혁이가 그곳을 싫어했다는 거지만.

“뭐, 회사마다 분위기가 다르겠지만 거기는 연습생 관리하는 신인 개발팀 직원들이 애들 얼차려를 주고 그러는 분위기였어요.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리고.”

리혁이가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말했다.

“문제는 신인 개발팀 직원 중에 사또라는 인간이 있었거든요.”

“사또?”

“4층 또라이 해서 사또였는데, 아무튼 연습생들이랑 친목질이 좀 심한 인간이 하나 있었어요. 자기랑 친한 애들은 편의 봐 주고 좀만 사이 나쁘다 싶으면 험하게 굴리고.”

“너는 괜찮았고?”

“잘 지냈겠어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지. 그래도 대표님이 예뻐하니까 건드리지는 못하더라고요.”

전교 1등이 뭘 하든 내버려 두는 그런 느낌 같다.

“아무튼 진짜 심했어요. 눈치 빠른 애들은 그 인간한테 딱 붙어서 아부 떨고, 연습생끼리 파벌 갈리고. 거기서 혼자 다니는 사람은 나랑 걔 윤기원밖에 없었을걸요.”

“그럼 원래 알던 사이였어?”

“아뇨.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어요.”

리혁이는 그때 당시에도 마이 웨이였고, 윤기원은 딱히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감 희박한 연습생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떠오르는 이미지도 소심한 어린애 정도였다고.

“근데 보통 위에서 난리치면 밑에 애들이 스트레스는 쌓이는데 풀 데가 없잖아요.”

“걔한테 풀었구나.”

“그랬던 것 같아요. 나는 신경 끄고 다녀서 뭐가 뭔지도 잘 몰랐지만.”

어떤 분위기인지 짐작이 갔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 처했을 때, 대개 사람들은 화풀이 대상을 찾는다.

아마 거기서는 가장 어리고 연약한 연습생이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때가 데뷔조 정할 때였는데, 난 거의 확정이었거든요. 반쯤 데뷔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뭐, 신경 끄고 내 할 일이나 하자 그러고 있었는데…….”

그렇게 불만이 쌓여 가던 때.

사건이 일어난 것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방과 후 연습을 위해 연습실을 찾은 리혁이는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한다.

연습실 한 구석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는 아이 하나.

어찌나 힘들어하는지 팔다리를 바들바들 떠는 게 한눈에 보였다.

연습실 바닥에는 아이가 흘린 땀이 고여 있을 정도.

그런데 어이가 없는 건, 그 옆에서 회사 직원과 연습생들은 과자를 까먹으면서 놀고 있었다는 거다.

“너무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물어봤거든요. 쟤 왜 벌 서고 있냐고. 그런데 대답이 가관이었어요.”

“뭐라고 했는데?”

“그냥. 그냥이래요. 그거 보고 순간 열이 확 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싸웠구먼.”

“대판 싸웠죠.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열이 받았던 것 같아요.”

리혁이는 그날부로 계약을 해지당했다고 했다.

“그게 끝이에요. 솔직히 오래전 일이기도 하고, 나도 그쪽에서 먼저 말 안 해 줬으면 기억도 못 했을걸요.”

“그래도 걔는 고마워서 기억하고 있었나 보네.”

“이제 와서요? 그때 당시에 남들 다 나한테 불리한 증언하고 있을 때도, 혼자 입 꾹 다물고 있었는데.”

“야, 중학생한테 뭘 바라냐.”

“나도 그때 중2였거든요?”

눈을 가늘게 뜨는 리혁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머지 연습생들은? 어떻게 됐는데.”

“뭐, 그 직원은 얼마 안 가서 잘렸던 걸로 들었는데 나머지는 다 데뷔했을 거예요. 플레이리스트가 그때 그 과자 까 먹었던 인간들이거든요.”

플레이리스트.

그 이름을 주의해야겠다고 기억에 저장하고 있을 때, 리혁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남한테 호의를 베풀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에요. 결국에는 나만 손해거든요.”

담담하게 말하는 리혁이의 모습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   *   *

지난 일요일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는데, 리혁이가 작업실 바닥을 발로 툭툭 두드렸다.

“그래서 잘 모르겠어요. 누구를 의지한다거나 의지의 대상이 됐던 적이 없어서. 그게 어떤 기분인 건지 잘 모르겠고.”

하기야 그동안의 행적을 생각하면 리혁이가 누군가한테 하소연하거나 의지하는 모습을 못 보긴 했지.

“지호는 어때?”

“……진심으로 하는 얘기예요?”

“경멸하는 표정으로 보지 마. 나 상처 받는다.”

“솔직하게 물어보는 건데, 왕지호 걔가 나한테 의지하는 것처럼 보여요?”

답을 내리는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거봐요. 그 여우 같은 애가 나한테 의지를 한다니. 말도 안 되지.”

“지호가 여우라고? 걔 눈치 진짜 없지 않나.”

“내가 걔를 3년 가까이 봤어요. 그거 겉으로만 바보인 척하고 다니지 속으로는 다 꿍꿍이가 있다니까요.”

“그런가, 난 잘 모르겠던데.”

뭐.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호가 리혁이에게 의지하는 편은 아니라는 것.

그냥 같이 놀면 재밌는 형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 애들 성향 자체가 힘들고 위험할 때만 나한테 의지하지, 평소에는 상당히 독립적인 편이라서.

“흐음…….”

그나저나 이거 골치 아프구먼.

“리혁아.”

“왜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말을 해야지. 노래 다 만들고 3일 전에 와서 이러기냐.”

“뭐라고 하지 마요. 나도 그때는 될 줄 알았죠.”

귀를 붉히며 항변하는 녀석에게 눈을 한번 흘겨 주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를 어찌한다.

차라리 앨범 수록곡 홍보하는 셈치고 지금이라도 노래를 바꿀까?

아니, 아니.

그러려면 또 편곡을 해야 한다.

우리 싱글 앨범 수록곡 네 곡은 모두 5명이서 부르는 노래라서 파트 분배도 고민해야 하고, 중현이 랩 부분도 처리해야 했다.

썸씽으로 때울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부정적이었다.

사람들이 질리게 듣기도 했고, 무엇보다 DJ인 장소원이 걸렸다.

듣자마자 자기 노래를 얼마나 대충 준비했는지 알걸.

프로 의식이 투철한 장소원 선배 성격상 자칫했다간 스케줄 끝나고 제대로 한 소리 들을 수도 있었다.

우릴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건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결국에는 지금 노래 ‘밤바다’로 밀어 붙여야 한다는 게 결론이었다.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내 표정을 오해했는지, 리혁이가 말했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아냐. 이걸 네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경험 하나 없었다는데, 너는 왜 그런 환경에서 자랐냐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비슷한 감성을 다룬 영화라도 보면 도움이 되려나.”

“영화는 좀, 보면 눈이 아파요.”

“너 책 많이 읽잖아. 그러면 소설 중에…….”

“주로 비문학 읽거든요. 문학은 읽어도 월든 같은 에세이 정도? 감성이 과한 거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

심호흡을 한 후.

리혁이를 향해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 나 싫어하지?”

“아뇨. 싫다기보다는 조…….”

“조?”

“조, 좋은 느낌으로 보고 있죠.”

뭔가 엉성한 것 같지만 넘어가자.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은 미운 18살짜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나는 결국 대안을 찾아냈다.

“그러면 따스한 거고 뭐고 다 떠나서, 최대한 비슷하게 느껴지는 감정으로 대체해 보자. 내가 밤바다 쓸 때 느꼈던 감정에는 고마움도 있었거든. 그걸 중심으로 가는 거야.”

“고마움이요?”

“응, 너한테도 고마운 사람은 있을 거 아니야.”

“음…….”

설마 그것도 없는 건 아니겠지.

상대가 앉은 의자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사고의 흐름을 반영하듯 새하얀 운동화가 바닥을 톡톡 두드린다.

누구를 생각하는 걸까.

문득 궁금해진다.

무표정이었던 창백한 얼굴 위로 이내 이런저런 감정이 스쳐간다.

잠깐 동안이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어렴풋한 미소까지 입가에 머문 것 같다고 할까.

리혁이가 선뜻 대답했다.

“있어요, 고마운 사람.”

“누구?”

“그것까지 말해야 돼요? 프라이버시 아닌가?”

“됐다. 치사해서 안 물어보고 말지.”

피식 웃으며 노트북 화면에 떠오른 밤바다의 악보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걸 베이스로 삼아서 연습해 볼까?”

“좋아요.”

간만에 미소를 짓는 녀석을 향해 나도 마주 웃어 주었다.

*   *   *

마침내 대망의 날이 밝았다.

7월 6일.

낮 최고기온 33도를 찍어 후덥지근한 여름밤, 숙소 앞 차량에 타려는 우리를 동생들이 배웅했다.

“잘 다녀와요.”

비주가 양손으로 나와 리혁이 손을 모아서 잡았다. 따스한 기운과 함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둘이 싸우지 말고요.”

“우리가 언제 싸웠다고.”

“영상 제작 담당하는 직원분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둘이 연습 영상 찍은 거에서 70프로가 싸움이었다면서요.”

“…….”

잔소리를 하던 비주가 락앤락 통을 건넸다.

라디오는 말을 많이 하는 방송이니, 수분 보충을 위해 방송국으로 가는 동안 챙겨먹으라는 우리 주부님의 배려였다.

“잘하고 와요, 형.”

중현이가 주먹을 부딪치자는 듯 내밀었다.

왠지 아파 보인다.

부딪치는 대신 보자기처럼 덥석 잡아 장난치듯 흔들었다.

중현이가 씩 웃었다.

훈훈한 분위기가 오갈 때, 지호가 덥다는 듯 손 부채질을 하며 보챘다.

“끝났으면 들어가도 돼여? 넘 더운데.”

“야.”

“잘들 다녀오세용~”

우리의 험악한 시선에 지호가 중현이 뒤에서 숨더니 까치발을 들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돌담 위에 올라간 시골 똥개 같은 모습이다.

“오늘 보이는 라디오라고 들었는데, 제가 이따가 채팅창에 댓글 왕창 남길 테니까 기대해여. 닉넴 ‘리혁이는 피라루쿠’로.”

“저게 죽을라고.”

“그리고 제가 선물도 보내 놨으니까 기대해여.”

선물?

뭐라고 더 묻고 싶었지만 출발해야 한다는 민기 형의 보챔에 우리는 카니발에 탑승했다.

썬팅된 유리창을 내리며 동생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누가 보면 전쟁터 나가는 줄 알겠지만, 뭐.

따지고 보면 스트릿 보이즈와 경쟁하는 상황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잘하자.

손바닥에 배어 나오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목동 HBS 사옥.

꼭대기가 뻥 뚫려 있고 사방이 유리로 뒤덮여 있는 로비, 그곳에서 나는 열심히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나 [할머니. 손자 9시에 라디오 나오는 거 알쥬?]

곧바로 1이 사라졌지만 답장은 5분 후 왔다.

할머니 [틀어놓고있어]

할머니 [이처자 너랑 노래 부른 처자아니냐,?]

나 [맞아. 좋은 선배님이야]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자 리혁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랑 톡해요?”

“우리 할머니.”

“내 안부도 전해주세요.”

“잠깐만.”

자판을 두드렸다.

나 [리혁이가 안부 전해달래]

할머니 [누구?]

나 [리혁이]

나 [그 노래 잘 부르고 눈 살작 찢어졌는데 성격이 몹시 더ㅁㄷㅎㅁㅈㄷ]

폰을 빼앗으려는 훼방에 오타가 난무했다.

나 [알잖아. 노래 잘하는 동생]

그제야 고개를 까딱이는 리혁이였다.

뒷내용을 궁금해하는 녀석에게 할머니에게 돌아온 답장을 읽어 줬다.

“할머니가 고맙대. 그리고 앞에 있는 형한테 잘해 주래.”

“지어낸 거죠?”

“당연하지. 우리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하겠냐. 너한테 폐 끼치지 말라고 잘하라고 그러지.”

“내가 손주분 잘 키우고 있다고 전해 주세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따 노래도 부를 테니 꼭 들으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나는 핸드폰을 집어 넣었다.

역시 스트릿 보이즈 얘기는 안 하길 잘했어.

데뷔 쇼케이스 때까지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만, 할머니는 그중에서 좋은 일들만 알고 있었다.

지금 반응을 보니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얘기했다면 지금도 ‘그 옘병할 것들이랑 같이 나가는데 괜찮은 거 맞냐’ 이러면서 난리났을걸.

“가자, 얘들아.”

카페에서 커피 박스를 들고 돌아온 민기 형을 따라 우리는 걸음을 옮겼다.

제작진분들에게 주기 위해 산 아메리카노와 조각 케이크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분주하게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는 리혁이에게 물었다.

“누구야?”

“왕지호요. 아까 선물 보내 놨다고 했잖아요. 그거 뭐냐고 물어보는데 계속 안 알려 준다니까요.”

“뭐, 이따 알게 되겠지.”

듣자하니 석환 형은 알고 있다는 것 같은데. 그럼 문제도 없는 것일 테고.

어차피 올라가면 알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솔직히 리혁이도 그닥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봤을 때는 잔뜩 예민해진 신경을 돌릴 곳을 찾는 것 같다고 할까.

어색한 상황을 앞두고, 사람들이 갑자기 친구에게 톡을 보내 탈출구를 찾는 것처럼.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띵-

하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내 미소도 사라져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엘리베이터에 탄 스트릿 보이즈와 매니저들을 본 순간, 굉장히 어색한 상황이 될 거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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