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59화
새빨갛게 달아오른 누군가의 얼굴 때문에 스튜디오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필사적인 손부채질과 내가 건네준 생수에 힘입어 리혁이의 얼굴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물론 그동안 웃을 사람은 다 웃은 뒤였다.
“리혁 씨 덕분에 한참 웃었네요.”
DJ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러고 보면 썸씽 활동할 때도 이랬죠? 조금만 조명이 강하다 싶으면 얼굴이 사라져 버려서 매번 조명 감독님이 탄식하셨잖아요. 다음에는 얼굴 좀 태우고 나오라고.”
“예. 요즘도 음방 나가면 자주 들어요.”
장소원과 이야기를 나눌 때, 한조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지금 또 귀가 엄청 빨개지셨어요.”
“어머, 그러네요.”
“저희끼리 농담 삼아 진실의 귀라고 부르는 현상이에요. 리혁 씨가 안 그래 보여도 굉장히 부끄러움을 많이 타거든요.”
“알죠, 엄청 잘 알죠.”
“부끄러울 때마다 귀가 저렇게 불타올라요.”
“아니에요.”
술 취한 사람처럼 발그레한 홍조가 남아 있는 리혁이가 고개를 저었다.
“전 부끄러움 많이 안 타요.”
누가 봐도 턱도 없는 소리였다.
부스에 있는 이들은 물론이고, 바깥 유리 너머에서 지켜보던 제작진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특히 작가님들은 우리 애가 너무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표정이다.
난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ㅋㅋㅋㅋㅋㅋㅋ
-거짓말
-방금 얼굴 빨개진 거 다 봤는데ㅋㅋ
청취자 분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
석환 형이 모니터링 중이라면, 아마 높은 확률로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걸.
뮤직카페 때도 느꼈지만, 노린 것이든 얻어 걸린 것이든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하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달걀귀신이 된 장면 자체도 웃겼지만, 차갑게만 보였던 리혁이가 알고 보니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는 그런 반전이 청취자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다가간 것 같았다.
물론 당사자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리혁이는 피라루쿠…….”
“네?”
“방금 댓글을 달아 주신 아이디가 저희 그룹 막내인 지호 씨거든요.”
“아, 진짜요?”
리혁이의 말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
말릴까, 하다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아까 숙소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저 닉네임으로 댓글을 남길 거라고 계속 얘기했었어요. 정말 남길 줄은 몰랐는데.”
“이게 지호 씨였군요? 신기하네요.”
“네. 이따 숙소에 돌아가면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에요.”
“에고, 지호 씨 큰일 났네요.”
큰누나 같은 표정으로 웃던 장소원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닉네임에 피라루쿠라고 되어 있었잖아요.”
“엇.”
“애칭인가요?”
“어… 그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저래서 말하기 전에 말릴까 했던 거였는데. 방송 짬밥이 높은 장소원 선배가 이런 걸 놓칠 리 없지.
-피라루쿠?
-피라루쿠가 뭐지..
-누가 좀 설명해 주세여
맞은편에 있는 한조와 기원도 어느새 토크에 대한 생각은 까먹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다.
“어어? 우주 씨는 뭔가 알고 있는 표정인데요.”
“아, 그게요…….”
말하지 마, 진짜 말하지 마, 말하면 나랑 인연 끝이야, 하는 눈빛을 보내는 리혁이를 흘깃 바라보며 웃었다.
야. 그런다고 사람들이 안 찾아 보겠냐.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누군가 댓글 창에 백과사전을 붙여 넣기 해 댓글을 올렸다.
귀로만 듣고 있을 청취자들을 위해 장소원이 댓글을 읽었다.
“피라루쿠는 남미 최대의 담수어라고 하네요. 아마존 강에 서식하는 그런 물고기래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왜 지호 씨가 리혁 씨를 이런 별명으로 부르는 건가요?”
“별명은 아니구요.”
리혁이가 설명했다.
“예전에 한번 연습이 너무 힘들어서 쓰러져 있었는데, 지호 씨가 제 표정을 보더니 저 물고기랑 닮았다고…….”
“너무했네요. 우리 리혁 씨가 얼마나 귀여운데.”
“그러니까요. 저는 전혀 피라루쿠와 닮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해 주세요. 전 피라루쿠가 아니에요.”
그 필사적인 항변에 사람들이 미소를 짓는다.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을 사람들의 표정은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좋은 표정일 거라는 건 확실하다.
기특하다.
얼마 전에 오 기자님이랑 한 인터뷰 때도 그랬지만, 뮤직카페 때 제 분량도 못 챙겨서 내가 떠먹여 줬던 걸 생각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었다.
문득 이런 기회를 만들어 낸 지호에게도 고마움을 느꼈다.
잘했다. 우리 막둥이.
비록 리혁이를 제물로 삼긴 했지만 그 덕분에 유의미한 방송 분량을 챙겼다고 해야 하나.
어느 순간부터 방송의 흐름이 바뀌었다.
분명 처음에 소개할 때만 해도 비등비등한 비중이었던 스트릿 보이즈는 어느새 한 편으로 밀려났고, 나와 리혁이가 장소원과 함께 방송을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막내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고마움은 채 5분도 가지 못했다.
청취자들에게 각 멤버들을 소개하며 토크를 이끌어 내던 장소원이 앨범으로 화제를 돌렸을 때였다.
“뉴블랙 같은 경우는 지금 노래가 굉장히 핫하죠? 아까 방송국에 오기 전에 제가 다시 한번 확인했는데 불꽃놀이가 일간 차트 39위에 진입을 했더라고요.”
“네. 정말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어요.”
“여태까지 데뷔 타이틀부터 주목을 받은 그룹은 있었지만, 이렇게 멤버 본인이 작곡한 타이틀곡으로 이 정도 성과를 거둔 건 처음이잖아요. 요즘 기분이 어떠세요?”
“말로 설명이 힘든 것 같아요.”
정말 꿈과 같은 일이었으니까.
“차트 볼 때마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아요.”
“그 기분 잘 알죠.”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미소를 짓던 DJ가 청취자들이 쓴 댓글들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청춘이다 님, ‘노래 너무 좋아요!!!!!!!’ 느낌표가 많네요. 그리고 금사빠 님 ‘음방 1위 후보 노려도 될 듯.’ 오, 정말로 이대로 가면 음방 1위 후보도 노려볼 만하겠는데요?”
“어우, 큰일 날 말씀이세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희는 지금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너무 과분한 성과기도 하고 이만큼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거든요.”
“너무 방송용 멘트 아닌가요?”
“저 신인이에요. 선배님.”
장난스럽게 던진 내 말에 그녀가 웃을 때였다.
잠잠했던 수면 위로 상어가 나타나듯 다시 한번 채팅창에 ‘리혁이는 피라루쿠’가 등장했다.
피디님이 메모장에 뭔가를 입력했다.
‘뉴블랙 멤버분 댓글!!’이라는 메시지에 DJ가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뭐야. 또 뭔데.
“1위 후보 얘기가 나오니까 댓글이 막 올라오네요. 몇몇 분들이 농담으로 앞으로 1위 공약 같은 거 없냐고 물어보고 계세요.”
“공약이요?”
“네, 그중에 하나가 또 리혁이는 피라루쿠 님이 남겨주신 건데요. ‘뉴블랙 리더분이 군대 다녀오셨거든요! 공약으로 재입대는 어떠세용?ㅋㅋ’라고 하시… 흐하핫!”
멘트를 치던 장소원이 현실 웃음을 터뜨렸다.
내 표정 때문이었다.
* * *
“진짜 음방에서 매번 뵐 때마다 너무 동안이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군대 나오셨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그래. 나 군필자다.
-군필?????
-방금 표정 ㅋㅋㅋㅋㅋㅋㅋ
-진짜로 군대 나온 거???
네. 군필자 맞다니까요.
“아, 눈물 나. 표정이 정말… 제가 최근에 방송하면서 이렇게 웃었던 건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렇군요. 저 때문에 웃으셨다니 다행이에요…….
리혁이 때 웃었던 건 진짜 웃음도 아니었다는 듯 사람들이 현실 웃음을 터뜨렸다.
DJ의 눈치만 살피며 긴장하던 한조와 기원도 빵 터졌을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
아주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다.
왕지호, 이놈의 자식.
숙소 가면 진짜 가만 안 둬.
막내도 막내지만 내 옆에서 앉아 파르르 떨리는 뺨을 매만지는 녀석도 얄밉다.
얘뿐이겠어.
숙소에 있을 우리 애들도 깔깔거리며 캡처를 누르고 있겠지.
비주는 아예 실시간으로 gif 파일을 만들고 있을 거다.
이거 웃어야 되나, 울어야 되나.
개인적으로는 수플레 이후로 다시 느끼는 치사량급의 수치스러움이었지만, 신인 그룹 뉴블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라이벌 구도로 나왔는데 방송 분량은 우리가 다 먹어 버렸으니까.
지금쯤 방송을 듣고 있을 스트릿 보이즈의 박 실장은 울화통이 터져서 씩씩거릴 거다.
우리한테 자랑하던 걸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지.
그만큼 방송 분위기가 신인 보이그룹 특집이 아니라 뉴블랙 단독 특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다들 좋게 봐주기도 하고.
제작진의 표정이나 채팅창의 댓글들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특히 엔지니어님과 피디님은 같은 군필자라 그런지 나한테 내적 친근감을 잔뜩 느끼는 표정이다.
그래. 좋게 좋게 넘어가자.
근데 이거 백 퍼센트 인터넷에 올라갈 삘인데.
내 표정 변화가 어땠는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건데 분명 움짤로 떠돌아다닐 것 같다.
수플레 때는 완전 무명이라 바로 묻혔는데.
이번에는 데뷔하고 나름 인지도도 쌓아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모르겠다.
뭐.
일단은 그게 불꽃놀이의 흥행에 도움이 되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3부를 여는 스몰 토크부터 이렇게 웃을 줄은 몰랐어요. 즐거우셨죠, 여러분? 우리 모두 큰 웃음을 준 우주 씨에게 박수 한번 보내 볼까요?”
“와아아-”
“네에… 고마워요, 여러분…….”
저 선배가 오늘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죽이려는 모양이다.
이따 주려고 선물까지 챙겨왔는데 진심으로 고민이 된다.
다시 넣어야 할지.
괜히 키득거리는 리혁이에게 눈을 흘겼지만, 뭐가 재미있는지 혼자서 한참 웃고 있다.
그래.
평소 표정 변화도 적은 애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도 오랜만이니, 기분 좋게 넘겨 버리자고.
물론 넌 아니다. 왕지호.
* * *
우리가 오늘 소화할 원더풀 나잇의 스케줄은 크게 3가지 단계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스몰 토크.
DJ가 게스트들을 소개하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다.
다행히 동생들의 하드 캐리 덕분에 우리는 오늘 압도적인 분량과 좋은 이미지를 챙겼다.
하지만, 말 그대로 ‘스몰 토크’인 만큼 여기서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오늘 방송 끝! 이라고 하긴 힘들었다.
더 중요한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남아 있었으니까.
라이브는 이따 9시 반에 시작하는 4부에 있을 예정이라 지금은 3부의 메인 코너를 진행할 시간이었다.
“자, 그럼 3부 메인 코너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자, 이름하야 ‘너의 고민을~’”
“들려줘!”
DJ의 선창에 우리가 호응하자 빠밤! 하는 BGM이 울렸다.
‘너의 고민을 들려줘.’
라이브 무대 다음으로 중요한 코너다.
방식은 간단하다.
제작진이 선정한 ‘이번 주의 고민’을 들려주고 각 팀이 그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것이다.
승패는 문자 투표로 가리게 된다.
단순한 포맷이었지만 이 코너가 시작되자 게스트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나와 리혁이뿐만 아니라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까지.
라디오 방송의 코너일 뿐인데도 모두가 결전을 앞둔 선수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방송에 임했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었다.
꼭 얻어내야 하는 보상이 있으니까.
이 코너에서 이기면 승리 팀은 다음 주 원더풀 나잇 선곡표에 3번이나 이름을 올리게 된다.
군인, 아이돌 팬덤으로 이루어진 음악 방송의 고정 시청층을 벗어나 일반 대중에게도 노래를 알릴 수 있는 기회.
홍보에 목마른 신인들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기회였다.
지난 주 승리 팀이었던 가을소녀의 ‘끝나지 않는 계절’이 흘러나온 뒤, DJ가 이번 주의 고민을 들려줬다.
“안녕하세요. 원더풀 나잇. 저는 올해 열여덟이 된 고등학생입니다. 평소 원더풀 나잇 애청자라 이렇게 사연을 보내게 되었는데요. 얼마 전부터 제게 고민이 하나 생겼어요.”
사연의 내용은 이랬다.
작성자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베프인 친구가 하나 있었다.
매일 밥 먹을 때마다 같이 다니고 시험이 끝났을 때나 평소 때도 줄곧 같이 놀러 다니곤 하는 친구.
서로의 부모님까지 알고 지낼 정도로 친한 사이라나.
문제가 생긴 것은 작년 2학기 중간고사로 거슬러 올라갔다.
‘와. 니 진짜 필기의 신이다. 나 이번에 그 과목 많이 잤는데, 노트 한 번만 빌려주면 안 돼?’
노트를 빌려 달라는 부탁에 작성자는 흔쾌히 응했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는 밝은 얼굴로 찾아왔다.
‘대박. 나 이번에 니 덕분에 90점 나옴.’
그때까지만 해도 오! 잘됐네 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년 기말고사와 올해 1학기 중간고사로 오면서 그것이 문제가 되어 버렸다.
점점 노트를 빌려 가는 과목의 숫자가 늘어나더니.
중간고사 때는 잠만 자던 친구가 작성자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다.
“이건 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부터였어요.”
작성자의 고민은 이랬다.
이런 상황에서 5년 지기 베프에 대해 자기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곧 기말고사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냐고 묻는 고민이었다.
“어려운 고민이네요.”
내가 사연을 듣자마자 들었던 생각이 한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비뽑기로 앞 순서가 걸린 스트릿 보이즈가 고민을 맡았다.
발언자는 당연히 한조였다.
“개인적으로 공감이 됐던 사연이었어요. 저도 학교를 다닐 때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작성자님이 현재 어떤 심정일지도 알 거 같아요.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자신의 노력에 무임승차한다면 화가 나죠.”
그가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작성자님이 목소리를 내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혼자 가슴으로 삭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친구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건가요?”
“네. 그래서 몇 가지 추천 드리고 싶은 방법이 있는데…….”
한조의 답변은 정석 그 자체였다.
누구나 이 고민을 들으면 할 법한 ‘왜 바보같이 당하고 있어? 똑부러지게 처신해야지!’를 순화한 답변이라고 할까.
적당히 공감도 해 주고.
거기다 구체적인 해결 방안까지 더해 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지만 말이야.
언행일치가 안 된다고 해야 하나.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가 파악한 한조의 성격은 저런 조언과는 거리가 멀었다.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하고, 분란을 만드느니 혼자 삭이려는 타입이라고 할까.
그런 애가 ‘왜 당하고 있어? 네 의견을 속 시원하게 말해!’라고 하니 나한테는 와닿지 않을 수밖에.
게다가 나랑은 생각이 다르기도 했다.
광고가 흘러나오는 동안 나는 작성자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해 줘야 할지 떠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을 무렵.
볼펜을 거머쥔 손이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내 대본 위로 슥슥 움직인다.
처음에 ‘ㅎ’과 ‘ㅈ’이 초성만 올라왔다가 찍찍 그어져 사라진다.
왠지 ‘힘내요’나 ‘잘해요’를 쓰려다 만 것 같은데.
뭐라고 써야 하는지 고민을 하듯 꼼지락거리던 하얀 손이 이윽고 정갈한 글씨를 뽑아냈다.
-편하게 해요.
픽 웃으며 바라보니 리혁이가 고개를 까딱였다.
방송 시작하기 전에 잔뜩 떨고 있던 자기한테 해 준 말을 나한테 다시 돌려준 모양이었다.
아마 나도 긴장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그 정도로 떨리진 않았다.
생방송에 어느 정도 적응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연을 쓴 작성자에게 해 줄 말을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광고가 끝나고,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됐을 때.
고민 상담을 시작하라는 DJ의 눈짓에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을 들려줬다.
“저는 작성자님이 베프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