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60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댓글 창에 ‘???’ 같은 댓글이 올라왔다.
부스 안에 있는 사람들도 궁금한 표정이었다.
얘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가 하고.
“저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선 고민 상담에서 한조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선에서 당신의 의견을 똑바로 피력하세요’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앞으로 사회생활을 해 나갈 때 똑부러지게 처신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이런 일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한조 씨의 말처럼 속마음을 터놓는 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혼자 꿍하고 묵혀 놓는 것보다 친구분에게 솔직하게 ‘내가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기분이 상했다’라고 말하면, 서로를 전보다 더 이해해 주는 관계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바는 사태의 악화였다.
“작성자님 말씀을 들어 보면 굉장히 오래된 친구이고 또 소중한 친구이신 것 같아요. 친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 같고요. 그런데 만약 작성자님께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으셨을 때. 친구분께서는 또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뭐야, 지금 나한테 노트 하나 빌려주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거야?’라고요.”
사실, 작성자와 친구가 얼마나 돈독한 관계이든 솔직하게 말하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안함도 없이 노트를 빌려 가던 친구가 솔직한 말 한마디를 듣고 ‘아, 내가 그동안 잘못해 왔구나’라고 깨달을까.
오히려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더 섭섭해하고 자기합리화를 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친구분이 그럴 거라는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만일의 경우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신다고 해도, 두 분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같다면 언젠가 관계도 회복되겠죠.”
하지만, 관계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결국 힘든 건 작성자 자신이다.
“저는 관계가 틀어져 있을 동안 작성자님이 받으실 상처가 걱정돼요. 이제 2학년이시고 아직 학교생활도 많이 남으셨잖아요. 친한 친구분과 틀어진 것도 마음 아픈데, 좋든 싫든 그 친구를 매일 봐야 하고. 또 다른 친구분들과의 관계에서도 상처를 받으실 수도 있고요.”
말하기 전에는 고민으로 끙끙 앓고, 말하고 나서도 친구와의 사이 때문에 끙끙 앓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건 웃긴 일이지만 피해자인 작성자 입장에서는 결국 마음만 아프다 끝나는 거다.
솔직하게도 좋지만…….
조금 유연하게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무엇보다 평판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연습생 시절에도 느꼈지만 또래 집단에서 가장 무서운 건 그 안에서 내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이다.
“학교생활에서 평판이라는 거 무시 못 하잖아요. 저희야 작성자님의 속마음을 이해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그런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요. 자칫하면 속 좁은 사람으로 몰리는 것도 한순간이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물론 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가정이에요.”
어디선가 듣고 있을 작성자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잘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위험을 감수하라고 말씀드리진 못할 거 같아요.”
“현실적으로 생각하자는 거군요.”
“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속 시원하게 할 말 다 하는 그런 장면이 나오잖아요. 하지만 그런 매체에서 다루지 않는 건, 현실에서는 그 장면 다음에도 계속해서 상대와 마주쳐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스트레스를 감내하라고 말씀드리기는 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럼 우주 씨가 추천하는 해결책은 뭔가요?”
“두 가지가 있어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를 신중하게 골랐다.
“만약에 저였다면 그 친구분과 조용히 멀어지는 길을 택했을 거예요. 괜히 얘기를 잘못 꺼내서 빈축을 사는 것보다는 그 편이 더 낫기도 하고, 경험상 저런 관계는 오래 이어질수록 나만 상처를 입게 되더라고요.”
“노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고 서서히 멀어져라?”
“네, 만약에 저였다면요.”
혹여 오해를 할까 봐 덧붙였다.
“제가 저 상황이라면 그렇게 했을 거라는 거지, 꼭 저처럼 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니예요. 소중한 친구라고 하셨잖아요. 관계를 끊지 않는 방법도 있긴 해요. 음… 친구분에게 부탁을 하는 거예요.”
“부탁이요?”
“친구분이 노트를 빌려 가듯 작성자님도 부탁을 하나씩 하는 거예요. 분명히 베프에게도 도움을 받을 만한 분야가 있을 거잖아요. 옷을 잘 입는 친구라면 쇼핑을 가서 옷을 골라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고. 운동을 잘하는 친구라면 체육 수행 평가에 도움을 청할 수도 있겠죠.”
“저쪽에서 뭔가를 받아 가면 이쪽에서도 받아 가라?”
“네. 관계의 균형을 맞추게 되면 감정적으로도 균형이 맞춰질 수밖에 없어요. 내가 베푼 만큼, 저쪽도 나에게 베푼다는 생각이 들 때 균형이 맞춰지잖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고민이 주는 심적인 스트레스도 줄어들 테고요.”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였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속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니 이런 관계는 조용히 끊거나 아니면 서서히 변화시켜라.
마무리 발언을 하라는 DJ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에는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작성자님께서 적극적인 성격이라면 한조 씨의 해결책이 더 잘 맞을 거예요. 사실, 관계에서 생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저 방법이 더 적합하고요.”
가만히 듣던 한조가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작성자님이 저처럼 내향적이어서 ‘아, 나는 저렇게 못 하겠다’ 하신다면 이런 방법도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본인에게 잘 맞는다 싶은 해결책을 골라 주세요. 안 고르셔도 괜찮고요. 어쩌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실 수도 있잖아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쳤다.
“작성자님이 어떤 방법을 택하든 뒤에서 응원하겠습니다. 들어 주셔서 감사하고요. 지금까지 뉴블랙 우주였습니다.”
내가 신청한 ‘내가 네 편이 되어 줄게’가 흘러나오는 동안 채팅창의 반응을 빠르게 훑었다.
제법 나쁘지 않은 반응들.
심호흡을 하며 헤드폰을 벗었다.
이제 결과만 남은 터였다.
* * *
같은 시각. 뉴블랙 숙소.
비좁은 거실에 옹기종기 모인 멤버들이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막내의 입에서 와아- 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우와. 방금 우주 형 봤어여? 저화질인데 어떻게 이목구비가 저러지? 혼자만 화질이 달라여. 남들 다 480p인데, 우주 형 혼자만 풀HD에여.”
“480피? 그게 뭐야?”
“그… 우주 형이 잘생겼다는 거예여, 형.”
“아, 그런 거구나.”
김비주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르팍에 누운 동생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한편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 리혁이도 예쁜데 우주 형이 오늘 정말 곱다.”
이것도 저장해야지, 하며 김비주가 캡처 버튼을 눌렀다.
그 뿌듯한 미소에 왕지호가 눈을 깜빡였다.
“형, 저는여?”
“당연히 우리 지호도 잘생겼지.”
“너무 대답에 영혼이 없는 거 아니에여?”
“이거 캡처 누르면 저장되는 거 맞지, 중현아?”
“맞을걸.”
왕지호가 입술을 비죽이는 동안, 악력기를 쥐었다 폈다 하던 김중현의 시선이 화면에 향했다.
“우주 형, 상담 되게 잘한다.”
“나가기 전부터 엄청 자랑했잖아여. 자기가 TJ에 있을 때, 맨날 동생들 고민상담해 주고 그랬다구.”
“그랬나.”
댓글 창을 훑던 김중현이 말했다.
“반응이 반반이네. 근데 손질? 우주 형이 친구를 손질하자 그랬나. 왜 다들 손질하라 그러지.”
“중현아, 손질이 아니고 손절이야.”
“아, 잘못 읽었네. 어쨌든 의견이 반반으로 갈리네.”
“의견 갈릴 만하져. 둘 다 맞는 말이잖아여.”
“그래?”
김비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우주 형 말대로 조용히 관계를 끊을 것 같은데.”
“글쎄여. 저는 말할 거 같아여. 친구 사이잖아여. 속상한 거 말을 해야 상대편도 알아주지.”
“나는 잘 모르겠네.”
“좀 어려운 고민이긴 해.”
멤버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가운데 채팅창에서도 누구 말이 맞네 하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
김비주가 인터넷 포털에서 480p를 검색하는 동안 막내가 눈치를 슥 살폈다.
“형.”
“안 돼.”
“제가 뭐라고 말할 줄 알구여.”
“댓글 달고 싶다고 말하려는 거 아니었어?”
뜨끔해하는 막내의 모습에 김비주가 웃었다.
아까는 부엌에서 간식을 만드느라 말리지 못했었다.
프렌치 토스트를 담은 쟁반을 들고 왔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뒤였다고 할까.
운 좋게 방송 분량을 건졌지만.
닉네임의 정체가 공개된 이상, 더 댓글을 달아서 좋을 게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아마 선우주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동의해 주었을 것이다.
“지호야.”
김비주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딱 한마디만여.”
“다음에 또 이런 스케줄 생기면 그때 달게 해 줄게. 알았지?”
“……알았어여.”
시무룩한 얼굴로 왕지호가 수긍했다.
하지만 이윽고 DJ가 문자 투표의 시작을 알리면서 그 표정도 사라졌다.
그들 모두 손가락을 분주히 움직였다.
“다들 보냈어?”
“넹. 저는 학교 애들한테도 문자 보내라구 재촉하고 있어여.”
“중현아, 너는?”
“어, 우리 몇 번이었냐.”
“2번이잖아. 너 2번으로 보냈어?”
“어… 아마도.”
확신이 없는 목소리에 김비주가 눈썹을 모았다.
“너 지갑도 그렇고 정말, 이…….”
부정적인 어휘가 잘 안 떠오르는 듯 머뭇하던 김비주가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줘 봐. 바보야.”
“바보 아니거든.”
김중현에게 핸드폰을 넘겨받은 이가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야. 너 내 비번도 알아?”
“0000을 모르기는 어렵지 않을까?”
“…….”
다행히 보낸 문자함에 2번이 적혀 있었다.
김비주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다시 건넸다.
민망한 듯 뺨을 긁적이던 김중현이 화제를 돌렸다.
“근데 희한하게, 걱정이 안 되네.”
“뭐가?”
“결과 말이야. 질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둘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러네.”
“저두여. 우주 형이 남한테 지고 다니는 건 상상이 안 가지 않아여?”
막내의 말에 나머지 둘이 웃었다.
말 그대로였다.
선우주가 누구한테 지고 그러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안 간다고 할까.
지금까지 쌓아 온 이미지 때문인지, 최근에 있었던 무반주 라이브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리더는 그랬다.
어딜 가든 자신에게 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알래스카에 가면 냉장고를 팔아먹고, 사막에 가면 핫팩을 팔아먹을 사람이 바로 선우주였다.
그랬기에 지켜보는 그들의 마음도 편안했다.
“리혁이 형 봐 봐여. 저 형 다른 때 같았으면 막 초조해서 달달 떨었을 텐데, 지금 되게 여유롭게 얘기하고 있잖아여.”
어쩐지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메인보컬의 모습에 그들이 웃었다.
왜 그러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네, 3부를 마무리할 시간이네요. 이제 문자 투표 결과를 발표할 시간인데요.
마침내 광고가 끝나고 장소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지호가 벌떡 일어서서 귀를 기울였고, 김비주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김중현은 쥐었다 폈다 하기를 반복하던 악력기를 슬며시 내려 놓았다.
말로는 안심이 된다고 했지만 막상 결과를 기다리자니 왠지 모르게 초조한 것도 사실이었다.
비록 음악방송 1위 같은 엄청난 보상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꼭 이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이기도 했고.
그렇게 세 멤버가 노트북 앞에 모였을 때.
-정말 팽팽한 접전이었다고 하네요. 예? 몇 표 차이냐고요? 어디 보자… 27표? 잠깐만요. 아, 저희 스태프가 37표 차이라고 하네요.
채팅창에 ‘숫자에 약한 울 언니ㅠㅠ’라는 댓글들이 주르륵 올라오자 장소원은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근데 선배님 진짜 진행 잘하신다.”
“그러게. 서바이벌인 줄.”
천연덕스럽게 청취자들을 애태우는 모습에 중현이와 비주가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그때.
-뭐, 표 차이가 뭐가 중요한가요? 중요한 건 결과지! 자, 그럼 이제 승자 발표하겠습니다. 치열한 박빙의 승부! 승자는…….
장소원의 입 밖으로 승자가 호명되었을 때.
-아……!
-어…….
모니터 너머, 두 팀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