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68화
마침내 시작된 팬사인회.
뉴블랙 멤버들은 정신없이 팬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어린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기에, 가장 먼저 팬을 맞이하는 건 막내였다.
왕지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침만 삼켰다.
‘형들, 저만 믿어여!’
…라고 사인회 올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호언장담했는데.
괜찮겠냐고, 자리 바꿔 주겠다던 비주 형의 말에 손사레를 치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왕지호는 자신의 친화력을 믿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누구든 만나면 쉽게 친해졌기에 팬들한테도 똑같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 그, 저. 처음 뵙겠습니다. 왕지호라고 해여.”
첫 팬이 나타나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자기소개를 해 버렸다.
뒤에 서 있던 팬들 사이에서 웃음이 나왔다.
소개팅 자리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인사인지.
창피하고 부끄럽고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왕지호는 잠시 팬에게 양해를 구했다.
“죄송한데 잠깐만여. 저 너무 떨려여…….”
어어, 울지 마, 하는 소리가 뒤에 서 있는 줄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왕지호는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눈물이 글썽이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쇼케이스에도 와 주고, 음악방송도 보러 와 주고, 팬카페에 응원글도 남겨 주는 팬들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면서 고맙다고 막 수다도 떨고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팬을 마주하자 머리가 새하얘졌다.
고마운 감정은 솟구치는데, 그만큼 떨려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준비했던 말은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입도 제대로 안 떨어졌다.
속상하고, 미안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팬이 물었다.
“괜찮아요?”
“저.”
모두가 귀를 기울일 때였다.
“휴지 한 장 있으신가여……?”
큰 웃음이 터져나왔다.
여기 휴지 찾아요, 하는 소리가 오가면서 팬들이 있던 줄 사이로 누군가 주섬주섬 티슈를 꺼내 건넸다.
일부 팬들은 뮤직카페 때가 떠오른다며 속삭였다.
“저 이제 괜찮아여!”
한바탕 웃음이 흘러간 후, 왕지호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긴장해서 평소보다 말이 두 배는 많았지만.
“어, 안녕하세여. 어, 그, 우와! 어, 인형이 되게 예뻐여. 아, 저 주려고 가져오신 거예여? 다른 멤버들 거는여? 아, 있구나. 그래도 어… 저한테 주신 이 사자가 젤 털도 길구, 어 눈알도 단추 같고.”
고장 난 인형처럼 횡성수설 속마음을 다 얘기하는 왕지호의 모습에 팬들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저 귀여웠다.
물론 모두가 웃고 있는 건 아니었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서리혁은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망했다.’
왕지호의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았다.
아니, 왕지호도 저럴 정도면 자신은 얼마나 심할까.
팬들과의 만남에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 줄 것 같아 벌써부터 심란하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치켜세웠다.
“리혁아, 괜찮아?”
“네. 문제없어요.”
“손 엄청 떨고 있는데?”
“수전증이에요.”
사인을 하는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어젯밤에 수백 장 가까이 사인 연습을 했는데, 어째 지금 나온 결과물은 핑킹가위로 오려야 할 듯한 톱니바퀴였다.
“아니, 연습을 많이 했는데.”
“괜찮아.”
“안 돼요. 제가 이름 다시 써드릴게요.”
진지한 말에 상대는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3번 가까이 도전을 했지만 그때마다 ‘수진’이라는 이름이 ‘숙취’처럼 보이게 나왔다.
덕분에 술이 땡긴다는 팬의 농담에 서리혁의 마음속에 비가 내렸다.
‘나 글씨 잘 쓰는데.’
어젯밤 2층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끌어 올린 채 상상했었다.
사인을 근사하게 하고 그 아래 정갈하게 멘트를 적으면 거쳐 가는 팬마다 ‘우와, 글씨 예쁘다’하고 칭찬하지 않을까.
……는 개뿔.
‘상은’이라는 이름이 ‘상어’가 되어 버린 또 다른 희생자가 깔깔 웃었다.
“괜찮아, 리혁아. 마음이 중요한 거잖아.”
“저, 원래 엄청 예쁘게 써요.”
“그래그래. 알지.”
“진짜예요. 멤버들한테 물어보세요.”
라고 했지만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냥 귀엽게 볼 뿐.
억울해서 이따 숙소에 가면 글씨를 찍어서 회사 SNS에 올려 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왜 나를 귀엽게 보는 거지.’
원래 까칠한 외모 때문에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째 팬들은 스스럼이 없었다.
왜 그런가 궁금했는데 금세 이유를 깨달았다.
“밤바다 라이브로 듣다가 펑펑 울었거든.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도 나고, 가사가 되게 와닿더라고. 얼마나 좋았던지. 너랑 얼굴 마주하면 꼭 잘 들었다고 해 줘야지 생각하고 있었어. 노래를 너무 예쁘게 불러 줘서… 리혁아?”
“……네?”
“괜찮아? 너 귀가 엄청 빨개졌는데?”
“아니에요. 제가 조명만 받으면 귀가 빨개지는 습관이 있어요.”
“와, 라디오에서 보던 거랑 똑같구나.”
라디오 때문이었다.
보이는 라디오에 나왔던 짤이 퍼졌는지, 뭔가 생긴 건 까칠하게 생겼는데 알고 보면 동네호구라고 이미지가 퍼진 것 같다.
팬들에게 상냥하게 웃으면서, 서리혁은 숙소에 돌아가서 막내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횡설수설하는 막내와 팬들과 불타오르는 귀를 자랑하는 동생라인과 달리 나름대로 형 라인은 침착한 편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중현은 덤덤하게 팬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인사를 받은 팬들은 하나같이 움찔거렸다.
‘나 무서운 사람 아닌데.’
김중현은 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다.
말주변은 부족했지만 진심이 통했는지, 팬들은 금세 김중현과 편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긴장을 너무 많이 해서 오히려 달래 줘야 하는 동생라인과 달리 그는 차분해 보였으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그러나 평온한 수면 아래에선 소용돌이가 요동치고 있었다.
-형, 우리 말하기 전에 꼭 뇌를 거치기로 해요.
-맞아여, 엉뚱한 말은 하지 말기로 해여.
-중현아, 팬들에게 웃어 주는 거 잊지 마. 넌 가만있으면 무서워 보인단 말이야.
멤버들의 신신당부 때문에 그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팬에게 미소를 지어 주면서.
뭐라고 말을 할 때마다 필사적으로 상황에 맞는 멘트를 찾았다.
“우와. 오빠 엄청 날씬해요!”
“제가요?”
“네! 되게 얄쌍해요. 동영상으로 볼 때는 엄청 커다란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완전 날씬하다.”
“아.”
뭐라고 말해 드려야 하지.
김중현의 두뇌가 풀가동됐다.
이윽고 적당한 멘트를 찾아냈다.
“제가 사실 66키로밖에 안 되거든요.”
“헐, 그 키에서요?”
의외로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가끔씩 대화가 엉뚱한 부분으로 튀기도 했지만, 익숙한 듯 팬들은 연신 웃으며 그런 대화를 즐겼다.
다행이었다.
김중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뒷순서를 흘깃거렸다.
‘저 둘은 걱정이 없지.’
늘 차분한 김비주와 뭐든 잘 해내는 선우주는 걱정이 없었다.
게다가 둘 다 긴장한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또한 김중현의 착각이었다.
‘어… 팬분이다.’
연신 생글거리는 김비주의 머릿속은 평소보다 몇 배는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뭐라고 인사를 하지.
대뜸 누나라 부르면 예의 없는 거 아닌가.
그럼 호칭은?
괜히 잘못 불렀다가 기분 상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떠돌아다니는 동안, 김비주는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팬들은 그런 그를 보며 신기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 긴장한 티가 나는 김중현과 달리 그야말로 차분해 보였으니까.
물론 그 머릿속은 복잡했다.
단지 동생이 어렸을 때부터 아팠기에 늘 집안 분위기를 살피며 표정을 관리하는데 도가 텄을 뿐이었지.
팬들이 그를 보며 성숙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틈틈이 본래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도 나왔다.
“우와. 이게 그 포스트잇이구나.”
“신기해?”
“네, 저 엄청 신기해요. 그럼 여기 써 오신 거에 제가 답변하면 되는 거예요?”
“응응.”
객관식 질문에 답을 체크하면서, 그 이유를 서술형으로 마침표까지 찍어 가면서 적는 김비주의 모습에 팬들은 미소를 지었다.
성격이 묻어 나온다고 할까.
연습 영상에서도 제일 많이 연습하는 멤버기도 하고, 맨날 막내가 진지충이라고 디스하는 이답게 행동에 그 성실함과 진지함이 엿보였다.
그리고.
실수를 할 때면 차분한 얼굴이 사라지고 다른 멤버들과 똑같은 표정이 되곤 했다.
“엇, 죄송해서 어떡해요. 사인 잘못해 드린 것 같은데.”
자체 리얼리티에 나왔던, 멤버들이 미친 듯이 흡입하던 김치볶음밥의 비결을 레시피와 함께 말하던 중이었는데.
얘기와 사인을 동시에 하다가 그만 ‘from. 김비주’ 대신 ‘from. 김치주’라고 써 버린 것이다.
“잠시만요, 제가 화이트 있는지 한번 여쭤-”
“괜찮아.”
팬이 손을 저으며 만류했다.
“신경 안 써도 돼. 이것도 예쁘고 좋은걸.”
“어, 안 돼요. 사인이 엉망이 되잖아요.”
울상이 된 이를 보며 팬들은 웃음을 보였다.
즐거운 분위기.
처음에는 초상집 분위기였던 멤버들도 이윽고 돌아오는 반응에 평정심을 되찾기 시작했다.
‘우주 형이 말한 대로, 편하게 하자.’
어깨에 들어갔던 힘을 조금씩 풀고 멤버들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되찾았다.
동시에 틈이 날 때마다 맨 왼쪽에 있는 이를 체크했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건 다 잊어버리고, 딱 하나만 기억하면 돼요. 좀 하다가 막힌다 싶으면 저 형이 어떻게 하는지 보세요. 내가 연습생 시절부터 봤는데, 대충 저 형 따라 하면 중간은 가더라고.
물론 선우주도 정신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의지할 수 있는 이가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멤버들은 심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부적을 바라보듯.
틈이 날 때마다 멤버들은 리더를 흘깃거렸다.
마음의 안정도 얻을 겸, 상대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 따라 하기 위함이었다.
“후우…….”
계속해서 말을 다급하게 하던 왕지호는, 선우주가 하는 대로 팬이 넘어오기 전에 심호흡을 한 번 했고.
서리혁은 손이 떨릴 때 다른 쪽 손으로 손목을 잡고 사인을 해 주는 이를 보고 곧장 적용을 했고.
김중현은 못 따라 할 것 같아서 그냥 포기했다.
김비주는 상대가 아이컨택의 텀을 얼마나 두는지 보고는 곧바로 따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아지는 걸 느낄 때면, 상대를 보고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맨 처음에는 똑같이 실수투성이였던 사람이 순식간에 능숙해져 있었으니까.
물론 그가 하는 모든 걸 따라 할 수는 없었다.
“우주야, 나 밤바다가 너무 좋아서 오면서 듣고 왔어.”
“아, 진짜요?”
그 말에 멤버들이 흠칫했다.
-‘아 진짜요?’나 ‘아 그래요?’는 절대 금지. 팬싸에서 팬들이 하는 말, 그거 다 미리 준비하고 오는 거예요. 하고 싶은 말 백 가지 중에 고르고 골라서 온 이야기인데, 아 그래요 하고 말면 김이 팍 새지 않겠어요?
하지만 같은 실수를 했는데도 그 수습 방식은 멤버들과 달랐다.
선우주가 고개를 들어 팬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웃는다.
어디서 봤던 표정인가 했더니, 앨범 화보 때 화제가 되었던 그 표정과 비슷했다.
“밤바다의 어디가 좋으셨어요?”
…라며 자연스럽게 앞선 말을 잇는다.
그리고 그런 미소를 마주한 팬의 반응은 몹시도 좋았다.
훈훈한 마무리.
하지만 멤버들이 리더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째 삭막해져 갔다.
‘얼굴 쓰네, 우주 형.’
‘흥…….’
‘얼굴로 커버하네. 저 아저씨.’
‘와. 치사하게 얼굴 쓰는 거 봐.’
그들이 몹시 아끼고 애정하는 리더지만, 가끔은 왠지 얄미울 때가 있었다.
* * *
태현이가 괜한 말을 해서…….
나는 힐끔힐끔 나를 바라보는 멤버들의 시선을 느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단순하게, 잘해야지! 가 아니라, 내가 흔들리면 우리 애들도 흔들린다고 생각하니까 평소 때보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내 옆에 앨범이 하나 놓인다.
고급스러운 양장본 같은 까만 표지에 은색으로 ‘First Chapter’가 쓰인 앨범.
비주와 팬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뛴다.
입이 바짝 마르고 손바닥에선 식은땀이 배어나오고.
한 분, 한 분 오실 때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어떤 멘트가 좋을까.
이런저런 멘트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진심으로 대하는 거야.
진심으로.
파르르 떨리는 턱 근육을 진정시키며 다음 팬이 넘어오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내 앞자리가 채워졌을 때.
나는 태현이의 조언을 되새겼다.
-팬들이랑 처음 만나면 말문이 막힐 거예요. 호칭이 없으니까. 그럴 때는 친근하게 누나 하고 불러드려요. 어려 보인다 싶으면 존댓말만 쓰고.
그랬기에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누나.”
그런데 팬분의 반응이 이상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상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오빠…….”
오빠?
“저 열여섯이에요.”
앗.
뒤에 서 계시던 팬 매니저님이 큽, 하며 웃었다.
“어… 그.”
“네.”
“열여섯이면 몇 년생이신…?”
“99년생이요.”
“아, 99년생이시구나. 전 93이에요.”
머릿속이 엉킨다.
나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그, 어, 그래도 2002 월드컵은 보셨겠네요.”
“4살 때요……?”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째 가수는 나고 팬은 저쪽인데, 저쪽이 차분하고 내가 어수룩하다.
민망하게 웃으며 뺨만 긁적일 때, 상대가 앨범을 내밀었다.
“사인해 주세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앨범을 받아 들었다.
그러곤 변명하듯 말했다.
“이해해 주세요. 저도 팬 사인회는 처음 해 보는 거라서요. 막 떨리고 그러네요. 보이시죠? 지금도 엄청 긴장하고 있잖아요.”
“네, 보여요.”
상대가 대답했다
“그래서 좋아요.”
반짝이는 눈을 향해 같이 웃어 주면서 앨범 속지 위로 네임펜을 빼어 들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 * *
같은 시각.
팬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가슴이 뭉클하고 계속 웃음이 나온다.
내 가수와 얼굴을 맞댄다는 것부터가 행복한 일이긴 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와, 애들 얼굴 미쳤다…….’
배우 기획사라서 그런 걸까.
레몬 엔터가 런칭한 보이그룹은 각 그룹에서 비주얼이라 불릴 만한 멤버들만 모아 놓고 있었다.
어찌나 눈 호강을 하는지.
사인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뇌세포가 5년씩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넘어가실게요.”
팬 매니저가 넘어가라며 손짓을 할 때면 정말이지 야속했다.
저 얼굴을 더 보고 싶은데.
맞은편에 앉은 가수들이 미술관에 걸린 그림이었다면, 한나절 동안 멍하니 보다가 점심을 먹고 돌아와서는 문을 닫을 때까지 바라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팬들은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상대의 모습을 머릿속에 새겼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부끄럽고 수줍어하는 표정.
그리고 숨소리까지.
물론 그때마다 뉴블랙 멤버들이 속으로 울상을 짓는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지금 왜 쳐다보신 거지? 나 또 실수했나?’
‘와. 눈망울 봐. 진짜 이쁘다…….’
사인회 내내 벌어지는 가수와 팬의 동상이몽이었다.
그러나 멤버들을 바라보는 눈에 애정이 가득한 것은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래서 신인 덕질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구나.’
연차가 있는 그룹들을 덕질했던 이들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함을 느꼈다.
풋풋함이라고 해야 하나.
그야말로 신인 시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수성이었다.
실수를 하고, 팬들을 보고 부끄러워하고,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정돈되지 않은 진심이 묻어 나왔다.
그런 진심은 대개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정들이었다.
물론 이 모습이 영원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모든 아이돌이 그러하듯 뉴블랙도 시간이 지날수록 능숙한 프로 연예인으로 변해 갈 테니까.
언젠가는 별처럼 멀어질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동안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쑥쑥 자라나는 나무에게 물을 주는 느낌이라고 할까.
조그마한 관심을 보일 때마다, 열띠고 진심 어린 잎사귀가 튀어나오는 광경에 팬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무엇을 주어도 바꾸고 싶지 않은 귀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팬들이 테이블 막바지에서 이르렀을 때.
하고 싶었는데 못한 말이라든가,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아쉬워하는 이들의 앞으로 손이 슥 내밀어졌다.
“오늘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떠나는 이들의 손을 마주 잡아 주며 우주가 선물을 건네준다.
동물들이 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 그림과 그 아래 ‘From The New Black’이라 쓰인 에코백이었다.
내 가수가 직접 만든 선물.
어느새 아쉬움이 사라지는 느낌과 함께, 선물을 받아가는 팬들의 얼굴에 후련한 미소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