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0화
14장. 지나간 시간이라는 건
금요일 점심.
뉴블랙의 팬카페는 그 어느 때보다 붐비는 중이었다.
평소보다 게시글이 두 배는 많았고, 실시간 채팅방은 수다를 떨고 있는 팬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 단 하나였다.
-하.. 기대된다 기대돼
-12시쯤 넘어서 한다고 했으니까 슬슬 애들 나오겠지?
-ㅇㅇ 아마 그럴듯
-나도 가고 싶었는데ㅠㅠㅠㅠㅠㅠㅠ
바로 뉴블랙이 팬들에게 약속했던 1위 후보 공약이었다.
-진짜 가고 싶었는데, 왜 난 회사인 거고
-왜 난 대학원생인 거지
-우리 모두 울어 보아요ㅠㅠ
-주말에 했으면 바로 가는 건데, 규호 일처리 참 한결같아ㅋㅋㅋ
-레몬 홍보팀에 문의해보니까 자기들도 주말에 하고 싶었는데 구청에서 빠꾸 먹였다나 봄;;
-헐.. 글쿠나
다들 납득하며 아쉬움을 삼킬 때였다.
-지금 명동에 계신 분?
-저요
누군가 대답했다.
-회사가 근처라 점심 먹으러 갈 때 몰래 빠져나왔어요ㅋㅋ
-사람 많아요??
-지금 라인 치고 앰프 설치 중인데 많네요.. 근데 다들 뭐 하는지 잘 모르는 거 같아요. 다들 일반인인 듯...
-헐, 팬들 별로 없어요??
-네ㅠ 아무래도 평일이다 보니
-반응 없으면 어쩌죠? 민망하면 안 되는데..
시민들의 반응이 걱정되는 수플레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달음에 달려가 응원을 해 주고 싶은데, 다들 생업이 있는지라 애타는 마음만 삭힐 때였다.
-어? 방금 공지 올라왔다
-미튜브 링크 가져옴
팬들은 누군가 채팅방에 올린 링크를 타고 이동했다.
이윽고 저화질 화면으로 명동 길거리가 나타났다.
반원형의 통제선이 설치된 가운데 정장을 입은 보안 요원들이 서 있었다.
[뭐지?]
[버스킹하나?]
[무슨 방송하나 본데?]
스피커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행인들이 하나둘 멈추고는 텅 빈 미니 공연장을 보고 있었는데, 다들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으아아아..
-으 내가 다 떨림..
-공약은 애들이 하는데 왜 긴장은 내가;;
-체할까 봐 점심 강제 금식중..
-저도요
바로 그때, 중계 영상에서 웅장한 BGM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요해진 채팅창.
문이 열리면서 뉴블랙이 모습을 드러냈다.
-???????
-펭귄?
-ㅋㅋㅋㅋ저게 뭐얔ㅋㅋㅋ
잠깐의 당황 이후 채팅창이 곧 웃음의 물결로 도배되었다.
각기 다른 표정의,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는 펭귄들이 뒤뚱뒤뚱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엌ㅋㅋㅋ 누가 누군지 다 알겠다
-ㅋㅋㅋㅋ저 보송보송한 펭귄은 무조건 왕지호
-거대펭귄 넘나 김중현ㅋㅋㅋㅋ
-남은 둘은 누가 누굴까요?
-비주랑 리혁인데..
때 아닌 멤버 맞추기가 시작됐을 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가 있었으니.
-황제 펭귄..?
유난히 시선을 잡아끄는 황제펭귄.
마치 인형탈이 아닌 진짜 펭귄이 들어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어색하게 걸어오는 다른 펭귄들과는 달리 뒤뚱뒤뚱 날개를 버둥거리며 걷는 황제펭귄.
어딘가 모르게 프로다움을 물씬 풍겼다.
-ㅋㅋㅋㅋㅋ저건 우주다
-우주
-무조건 우주
이어서 한곳에 모인 펭귄들이 K팝 메들리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섯 펭귄들이 날갯짓을 할 때마다 채팅방이 들썩였고, 스텝을 동동 구를 때마다 누군가 캡처한 짤이 게시글로 올라왔다.
-엌ㅋㅋ 춤 추는 거 보니까 알겠다
-노란 깃털이 비주구나
-리혁이 졸귀ㅋㅋㅋㅋㅋㅋ
-리혁이는 춤에서도 성격이 묻어나는거 같음ㅋㅋㅋ
펭귄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팬들은 김비주와 서리혁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소한 의문이 해소되자 다시 채팅방은 조용해졌다.
모두가 펭귄들로 변신한 뉴블랙을 넋 놓고 감상하고 있었다.
마침내 춤사위가 끝나고.
스탭들이 다가와 인형탈을 벗기는 시간이 되자, 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반응을 기다렸다.
뽁-
하나둘 인형탈을 벗었다.
사라진 현장 BGM으로 허전하던 사운드가 큰 소리로 채워졌다.
현장 관객들이 터트리는 생생한 감탄사.
자신들이 뉴블랙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충격을 회상하며 팬들은 공감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우주의 차례가 되었을 때 팬들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예감하고 있었다.
뽁-
순간 화면에 뽀얀 필터가 씌워지듯 혼자서 고화질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이가 나타났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는 아이돌 멤버.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감탄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그리고.
-우주야아ㅏㅏㅏㅏ
-여러분ㅠㅠ 그렇습니다 쟤네가 우리 애들입니다ㅠㅠ
-얼른 뉴블랙이라고 말해 얘들아
-여러분 진정 좀..
랜선 뒤에서 팬들은 풍악을 올리고 있었다.
* * *
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특히 상대가 행복해할수록 더 즐거웠는데, 그런 관점에서 오늘 내 기분은 최고조였다.
“오빠. 저 그날 펭귄탈 쓰고 공연했을 때 보러 가고 싶었는데, 학원 시간 때문에 못 가서 너무 아쉬웠어요.”
“잘했어요. 공부가 더 먼저죠.”
앨범 CD에 사인을 슥슥 하며 말했다.
“대신, 보지 못하셨으니까 제가 그날 했던 거 잠깐 보여드릴게요. 펭귄 춤 중에 보고 싶은 거 있어요?”
“오빠가 브레이크 댄스 췄던 거요.”
“어렵지만 한번 해 볼게요.”
고등학생 팬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그날 했던 춤을 고스란히 따라 했다.
몸에 각인됐던 동작이 흘러나왔다.
미튜브를 보면서 열심히 펭귄 동작을 모방해서 조합한 춤이었다.
앞에 앉아 있던 팬이 자지러지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찰칵- 찰칵-
사인회 대기석 맨 앞줄에 앉은 이들이 누르는 카메라 셔터 소리에 멋쩍게 웃으며, 나는 뺨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았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흘러내렸다.
모든 대화를 끝내고,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는 듯 못내 아쉬운 얼굴로 헤어지는 팬에게 악수도 한번 하고 손도 흔들었다.
“어우, 더워.”
미니 선풍기로 땀을 식히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대전에 있는 한 백화점 정문 앞에 설치된 천막 아래서 팬사인회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계속 서울이나 경기도 중심으로 활동을 하느라 들르지 못했던 나름의 전국 투어였다.
광주, 대구, 대전, 부산, 울산 등 광역시를 가나다 순으로 진행하는 공개 팬사인회 일정은 음방이 있었던 빈자리를 메우는 새로운 활동이었다.
지난번 팬사인회와 차이점이라면 공개로 진행하는 일정이었기에, 백화점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거나 대뜸 스마트폰을 들어 우리 얼굴을 찰칵 찍어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자판을 톡톡 두드리며 사라지는데 아무래도 ‘뉴블랙이라는 아이돌 봄, 얘네 아냐?’ 이런 내용이 아닐까 싶다.
기분이 좀 이상하다.
한 달 전만 해도 누가 쳐다보거나 폰을 들이대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였는데, 지금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릴 봐도 덤덤했다.
나름 시선에 단련이 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팬들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여전히 어설프긴 했지만, 처음 만나서 벌벌 떨었을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많이 덥죠?”
“응, 진짜 덥다.”
“죄송해요, 우리 에어컨 빵빵한 데서 만났어야 했는데.”
손부채질을 하는 팬에게 내가 쐬던 미니 선풍기를 쥐어주자, 상대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웃었다.
곧이어 시작된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선물도 받았는데 스케치북에서 북 뜯어낸, 다섯 펭귄이 춤추는 그림이었다.
미대를 나오셨다고 하던데 확실히 솜씨가….
“대박, 보석손이시네요.”
“보석손이요?”
“아, 어제 지호한테 신조어 교육 받았거든요. 이런 그림 잘 그리는 분들을 보석손이라고 부른다고.”
그때, 옆에 있던 비주가 속삭였다.
“금손이에요, 형.”
“금손이야?”
“저도 이상해서 어제 검색해 봤거든요.”
“……왕지호, 이놈의 자식.”
나와 비주 앞에 앉아 있던 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맨 왼쪽에 있는 지호가 귀를 쫑긋거리더니 이내 최대한 귀여운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하트를 보내왔다.
장내에 있던 팬들이 다 웃기 시작했다.
“진짜, 저래서 혼내지도 못하겠다니까요.”
내 앞에 있는 팬에게 한탄하듯 말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주된 화제는 1위 후보 공약이었다.
명동에서의 임팩트가 어지간히 강했는지 만나는 팬분들마다 펭귄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다.
팬카페에 ‘펭귄’이 들어간 닉네임이 부쩍 늘어났다는 것, 팬분들이 드립으로 가상의 그룹 ‘펭귄즈’를 만들어서 덕질하고 있는데 그중 최고 인기멤이 93년생 ‘황제펭귄’이라는 것, 구재영 피디님이 ‘전투펭귄’이라고 설명했던 종이 알고 보니 ‘젠투펭귄’이라는 반전까지.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를 향한 질문으로 끝나곤 했다.
“근데 그거 진짜 어떻게 한 거야?”
“황제펭귄이요?”
“응응, 전문가분도 막 신기하다고 그랬거든.”
전문가?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내 궁금해 하는 표정에 상대가 미리 보여 주려고 했다는 듯 스샷을 보여 주었다.
[오늘 하루 꿀잼보장^^]이라는 SNS 페이지에 있는 동영상 댓글이었다.
-현직 남극 생태학자입니다. 친구가 링크를 보내 줘서 감상했는데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평소 펭귄을 열심히 연구한 친구 같습니다. 펭귄은 무게 중심을 일정하게 이동시킬 수 없는 동물인데요. 오른발을 내밀 때 몸통을 오른쪽, 왼발을 내밀 때는 왼쪽으로 기울여 몸을 회전시키면서 무게 중심이 흔들리는 구조입니다. 신체 구조가 다른데도 어쩜 저걸 잘 재현했는지 연기자가, 라고 쓰고 있는데 아이돌 친구가 나오네요. 뭐야.. 어떻게 한 거야? [좋아요 336]
└ 갑분 아이돌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
└ 박사님 당황잼
보다가 나도 그만 웃어 버렸다.
“사실 제가 뭘 따라하는 걸 잘하는 편이어서요.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하고 싶어서 며칠 동안 펭귄 움직이는 걸 연구했어요.”
“그게 돼?”
“음, 하니까 되더라고요.”
솔직히 이 부분에 관해선 변명이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능력에 대해 설명하기 난감했거든.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
들어 보실래요. 제가 작년 수능 때 머리를 다쳤더니 특이한 능력이 하나 생겼거든요. 보기만 해도 동작도 고스란히 따라 할 수 있고.
물론 그게 동물까지 될 줄은 몰랐다.
궁금해서 뱀이라든가, 곤충 등도 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존엄까지 잃긴 싫어서.
조만간 날 잡고 한번 제대로 다시 실험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팬에게 말했다.
“다시 보여드릴까요?”
앉아서 뒤뚱뒤뚱 날갯짓을 보여 주자 맞은편에 있는 팬분이 빵 터졌다.
덕분에 궁색한 설명에 고개를 갸웃하던 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앨범 CD에 사인을 해 주는 동안 팬분이 마지막 질문을 했다.
“이제는 활동이 어떻게 되는 거야?”
펭귄 춤과 함께 가장 많이 들어오는 질문이었다.
다들 똑같은 표정들이었다.
기대와 불안을 품고 있는 눈빛.
음악 방송으로 활동할 때야 매일 TV에 나오고 하니 괜찮았는데, 이제 뭘 한다는 얘기가 없다 보니 팬분들이 불안해하는 듯했다.
지방 행사만 내내 돌아서 얼굴 보기 힘든 건 아닐까 하고.
“여러 가지로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요. 외부 일정도 있고. 내부적으로는 회사 홍보팀 분들이랑 얘기하는 중인데. 리얼리티도 올라올 거고요. 팬카페에 글 쓰는 걸 허락받기도 해서 조만간 저희가 굉장히 자주 찾아갈 예정이에요.”
그런 말을 할 때면 팬분들이 환한 미소와 함께 CD를 챙겨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입이 간질거렸다.
알려 주고 싶은 게 두 가지나 있었으니까.
지금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두 개의 계획에 대해서 말이야.
* * *
5일 동안 광역시를 도는 팬사인회 일정을 마치고 나서 우리는 처음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얻었다.
“내일 하루만큼은 쉬고 싶은 만큼 쉬어.”
석환 형의 그 말이 어찌나 달콤하게 들렸던지.
거의 천상의 하모니를 듣는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리혁이랑 같이 얼싸안고 방방 뛰었을 정도였다. 곧바로 상황을 깨닫고 서로 정색하긴 했지만.
“형들, 오늘은 잘 생각하지 말아여.”
그런 엄포와 함께 그날 밤은 우리 막내가 노트북으로 틀어 준 영화를 함께 봤다.
원래는 극장에 가서 심야영화를 보자고 막 졸라 댔는데 우리가 하나같이 퇴짜를 놔 버렸거든.
리혁이는 피곤하다고 했고, 비주는 멤버 다 같이 가는 거 아니면 좀 그렇다고 했고, 중현이는 뭘 하든 상관없다는 말로 막내의 흥을 깨뜨렸고, 난 황제펭귄 춤 때문에 몸이 쑤셔서 못 가겠다고 했다.
뭔가 측은했는지 비주가 사과를 깎아서 자꾸 내 입에 넣어 줬다.
그러는 한편.
체력이 빵빵한 낭랑 17세는 그럼 다른 거라도 하자고 늙은 형들을 계속해서 졸라댔고.
결국 집에서, 아 집이래, 큰일났네. 이거.
어쨌든 숙소에서 영화를 보는 걸로 타협을 봤다.
얼른 씻고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대로 잤다간 우리 막내가 며칠 동안 토라질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그래서 노트북으로 요즘 유행한다는 영화를 봤다.
곧 천만을 돌파한다는 이순신 장군 영화라나.
신기했다.
요즘은 극장에 걸린 영화를 바로 이렇게 VOD로 볼 수 있다고 들었다.
웃으면서 세상 참 좋아진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가 괜히 애들한테 노땅이라고 실컷 놀림만 당했다.
망할.
아무튼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바로 잤거든.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두가.
심지어 형들 오늘 밤은 불태우는 거라고 엄포를 놨던 놈이 제일 먼저 잤다. 중간중간 깨면서 붕어 눈으로 ‘저 안 자여’하면서.
진짜, 왕지호 이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어쨌거나 이순신 장군이 고초를 당하고 있는 첫 장면을 마지막으로 잠에서 깨어나니 방전된 노트북과 함께 다들 엉겨 붙어 자고 있었다.
이불은 멀찌감치 날아가고 거실은 개판이고.
마지막으로 갔던 수련회가 언제더라.
초5 때였던 것 같은데 그때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라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눈을 떴는데 코앞에 중현이 얼굴이 두둥! 하고 바로 앞에 있어서.
진짜 식겁했다.
얘가 눈썹이 부리부리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거를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는 것 같았다니까.
수능 영어지문에서 배운 그, 미국에 대통령 얼굴을 새긴 산 말이야.
어찌나 놀랐는지 숙소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마을버스에 올라탈 때까지 카드 지갑이 뒤바뀐 것도 몰랐다.
찍고 나서야 알았지.
-삐빅
-어린이입니다.
나도 놀라고 기사님도 놀랐다.
그리고 결심했다.
오늘 왕지호를 없애 버리고 말 거라고.
“아침부터 별일이 다 있었네.”
대체 왜 카드 지갑에 어린이용 버스 카드가 있는 건지 나중에 붙잡고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회사로 향했다.
연습실 키를 가지러 사무실에 들렀을 때, 매니지먼트팀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너 오늘 쉬는 날 아니야?”
“연습 좀 하려고요.”
“쉬엄쉬엄 해. 뭘 쉬는 날도 연습을 하려고 해?”
혀를 끌끌 차는 직원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연습실 키를 받았다.
문득 사무실에 기대했던 얼굴이 안 보여서 두리번거릴 때였다.
“윤 실장님 찾아?”
“네.”
“너희 광고 건 때문에 미팅 나갔어. 이따 점심 먹고 돌아올 거야.”
“아, 감사합니다.”
“그래. 쉬는 날에도 나오고 진짜 성실하네.”
직원들이 날 바라보며 웃었다.
흡족한 미소를 보니 ‘역시 성실하구나’하며 오해를 하는 것만 같았다.
꾸벅 인사를 하면서도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어떤 관점에서 보면 연습을 하러 온 것도 맞았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은 일반적인 연습이 아니었다.
그동안 활동 때문에 미뤄왔던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작년 11월부터 내 몸에 생겼던 변화.
막연하게만 생각해 왔던 이 능력이 과연 어떤 것인지, 오늘 하루 날을 잡아 이런저런 실험을 해 볼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