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3화
어색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한영준 이사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내가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봬요, 이사님.”
“그러게, 오랜만이구나.”
‘광고 사업부’라는 판넬에 시선을 두던 한영준 이사가 상황을 파악한 듯 유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일행도 인사를 건넸다.
서로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다른 층에서도 놀러 왔는지 로비에 있는 인파가 불어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뉴블랙이 아니었다.
훤칠한 키의 톱스타 배우, 이견우였다.
우리를 보고 반갑게 아는 척을 했던 그는 지금 매니저에게 무슨 귓속말을 전해 듣고 있었다.
마치 감독의 지시 사항을 듣는 선수처럼 눈빛이 차분하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부드럽고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여기서 아는 분들을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저희를 아신다고요?”
“당연하죠. 우리 촬영 같이하잖아요.”
“…네?”
우리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가 ‘아’ 소리를 냈다.
그러곤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직 못 들으셨구나. 저희 녹화 같이하게 될 거예요. 그 특집.”
“아!”
“같은 팀이 됐다고 들었는데.”
그제야 이해가 됐다.
주세한 추석 특집에 출연하시는구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우리와 같은 팀에 배속됐다는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게 반가워서 다시 인사를 하는 우리에게 그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왔다.
밤바다랑 썸씽 잘 듣고 있다면서, 다들 비주얼도 좋은데 노래도 잘하시는 것 같다며 칭찬을 해 왔다.
아까 매니저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나 했더니 이거였구나.
우리와 대화를 하기 전에 뉴블랙에 대한 자잘한 사항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보여주기 식의 행동이긴 했지만 우리로서는 반가울 따름이었다.
이 사람은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변의 인파가 귀를 쫑긋 세우고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뉴블랙?’, ‘무슨 촬영 같이한다는데?’ 같은 소곤거림이 우리 귀에 들렸다.
서로에게 윈윈이었다.
우리는 홍보를 하고 이 사람은 이미지를 챙기고.
톱스타가 스스럼없이 신인 아이돌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고, 관심을 표하는 진심 어린 행동이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내 귀로 들려온 ‘와, 진짜 착하다’만 서른 번은 됐을걸.
우리도 선배님 드라마 잘 봤다며 한창 맞장구를 치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할 때, 비서의 속삭임을 들은 한영준 이사가 끼어들었다.
“견우 씨, 곧 회장님이랑 점심 약속 때문에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아, 예.”
부드럽게 웃던 이견우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녹화 때 만나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이견우 일행은 사람들을 몰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시 덩그러니 남겨졌다.
몇몇 사람이 다가와 어느 방송에 나가는 거냐고 물어 왔지만, 석환 형이 나서서 대처를 했다.
뭔가 정신없는 일이 연속으로 닥친 것 같아 잠시 멍하니 있을 때.
“이제야 이야기할 틈이 나겠구나.”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다른 사람들을 먼저 보냈는지, 한영준 이사가 서 있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한 동생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워 주었다.
그가 웃으며 물었다.
“다 너보다 동생들이니?”
“네.”
“잘생겼네. 배우인 줄 알았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견우 씨도 그렇고, 정신이 없는 상태여서 제대로 말을 못 붙였네. 어떻게 그동안 잘 지냈니?”
“네, 정신없이 살았어요.”
“데뷔했다고 들었는데. 레몬, 맞지?”
내가 민망하게 웃었다.
“네.”
그도 웃었다.
왜냐하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아이돌을 하고 싶다면 주선해 준다고 한 회사가 레몬 엔터랑 DNS미디어였거든.
그때 당시의 나는 다 싫어여! 하면서 뛰쳐나갔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레몬 엔터의 뉴블랙으로 데뷔를 했다.
뭔가 머쓱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한영준 이사가 웃으며 말했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그렇지 않아도 네가 나가고 나서 조카가 너무 아쉬워했거든. 내가 욕 많이 먹었어.”
“아, 태현이랑은 지금도 연락하면서 잘 지내요.”
“그러니?”
그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도통 얘기를 안 해 줘서 말이지. 데뷔하기 전만 해도 사근사근한 애였는데, 요즘 들어선 애가 성격이 확 바뀌었어. 옛날 같지도 않고.”
“그래요? 똑같던데.”
한영준 이사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그냥 웃는다. 그러곤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제 슬슬 가야겠네.”
안경테 너머로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우주야, 다음에 보자.”
“예, 다음에 봬요.”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후.
곧바로 도착한 엘리베이터 몸을 싣고 그가 사라졌다.
그리고 난 그 닫힌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기분이 묘하다.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한영준 이사와 대화를 나누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여러 장면들이 스쳐간다.
1층 로비에 걸린 여러 스타들의 포스터.
톱스타에게 사옥을 안내해 주는 한영준 이사의 모습.
그에 반해 아직 신인이라 아무도 못 알아보는 우리의 모습.
그리고.
TJ 엔터 사옥 벽에 우리가 어디쯤 있을 것 같냐는 비주의 질문까지.
1집 활동의 성공 덕에 만족을 느끼고 있던 내 마음속에 한동안 잠잠했던 성공에 대한 갈증이 타올랐다.
* * *
그날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일에 매진했다.
낮에는 행사를 돌고, 밤에는 연습을 하고.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공을 들이고 있는 건 당연히 광고였다.
우리가 찍는 에버드림의 교복 광고는 총 두 가지 버전이었다.
하나는 앞서 우리가 설명을 들었던 미튜브 광고 CF,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화보 촬영이었다.
“어때여, 형?”
“음…….”
우리는 다 같이 카메라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호야, 너 턱을 조금 숙여보는 건 어때? 아니, 그쪽 말고. 왼쪽으로 10도 정도 기울이는 느낌으로.”
“음, 모르겠는데여.”
“그러니까 네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잖아.”
막내를 똑같이 따라 해 주었다.
“와, 대박 똑같아.”
“표정까지 똑같은데?”
“완전 메타몽이라니까요. 이 아저씨.”
동생들의 이야기를 무시하며 예시를 들어 주었다.
“여기서 살짝 숙여 보면 될 것 같아. 네가 거의 대칭이긴 하지만 왼쪽 얼굴이 더 반듯한 이미지라 좋거든.”
“음, 해 볼게여.”
지금 우리는 연습실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설치해 두고, 이런저런 포즈를 취해 보는 중이었다.
“형, 저도 자세 한번 봐 주세요.”
“비주, 너는 워낙 자세도 꼿꼿하고 고와서, 딱히 내가 지적할 부분은…….”
내 칭찬에 비주가 좋아하는 동안, 나머지 둘이 아우성쳤다.
“그럼 난 어때요?”
“저는요, 형?”
리혁이와 중현이에게도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었는데, 어쩌다 내가 촬영 감독처럼 된 건지는 모르겠다.
지난번 1집 앨범 재킷을 촬영할 때였나.
그때 내가 지었던 표정이나 포즈가 어지간히 인상 깊었던지, 나를 무슨 슈퍼 모델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아마도 오늘 연습 시작하기 전에 내가 며칠 동안 준비한 표정이나 자세를 보여 준 게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반응이 엄청 좋았거든.
자기들끼리 얼른 이거 찍어서 팬들한테 보여 주고 싶다고 설레발을 치는데, 솔직히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 이후로 애들이 부쩍 나한테 조언을 구하는 중이었고 나 역시 성실하게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연습에 매진하다 보니 점점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촬영장에 가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편안한 분위기 속이라면.
지금이야 100퍼센트로 매력을 보이는 우리 애들이지만, 막상 현장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1집 화보 찍을 때 그랬다.
나야 칭찬을 듣기도 했고, 워낙 혼나는 것에 관해선 멘탈이 강한 편이었지만 얘넨 완전 고생했다.
사진작가님이 하도 윽박을 질러서 애들이 위축되었는데 내 생각에 그건 잘못된 접근 방법이었다.
우리 애들은 채찍보다는 당근이 더 잘 먹히는 타입이거든.
아마 그때도 편한 분위기였다면 더 빨리, 그리고 더 좋은 장면이 나오지 않았을까.
그래도 광고 촬영은 그보다 분위기가 좋다고 듣긴 했다.
최대한 광고 모델을 우쭈쭈 해준다고 듣긴 했는데.
문제는 이번에도 그럴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특히, 이번 광고 담당하시는 분이 디테일적인 부분에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계실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시더라고요.
지난번에 대행사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우리의 광고주가 상당히 까다로우신 분이라고 했지.
광고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군대에서 느낀 바 보통 현장 분위기는 그 자리에서 가장 갑인 사람이 결정한다.
그리고 현재.
그런 사람의 표정이 밝을 확률은 그닥 높지 않았다.
하긴 나 같아도 이번에 광고 처음 찍는 신인들이 온다고 하면 걱정부터 앞설 것 같긴 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신인 모델들이 얼마나 준비를 해 왔는지, 얼마나 잘할지 모르니 불안할 수밖에.
“무슨 방법이 없으려나.”
광고주가 안심하도록.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준비를 철저히 해 왔는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 * *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
오전 7시.
TJ 뉴미디어의 김 과장은 다른 직원과 스튜디오를 찾았다.
광고주와 모델이 도착하기 전에 현장을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그랬기에 한창 분주한 스탭들에게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광고주인 KG 인터내셔널 측의 팀장이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 시간부터 나와 있는 거야?’
보통 광고주는 모든 준비가 끝나고 맨 마지막에 나타나 모니터 앞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는 게 관례였다.
더군다나 오늘은 본격 CF가 아니라 화보를 촬영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AE보다 더 먼저 와 있다니.
그들을 발견한 프로덕션 직원이 혀를 내두르며 말을 걸었다.
“새벽부터 나와서 저러고 있어요. 계약서대로 돌아가는지 꼼꼼이 확인을 해야겠다면서.”
“…….”
“그래서 다들 아침도 못 먹고 비상 걸렸잖아요.”
두 남자는 침을 꿀꺽 삼키고 광고주에게 다가갔다.
KG 인터 의류사업부에서 나온 우희선 팀장은 한 손에는 리스트를 든 채, 행거에 걸린 옷을 넘기고 있었다.
의상이 제대로 준비됐는지 체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찍부터 나오셨네요. 팀장님.”
“네. 확인할 게 많아서요.”
허리를 굽혀서 교복 안에 있는 택도 한번 확인해 보고, EverDream이란 자수도 잘되어 있는지도 확인하고.
꼼꼼히 체크하는 이의 뒤에 서서 그들은 침만 삼키고 있었다.
현장에서 슈퍼 갑인 광고주가 돌아다니면서 문제점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한다면 누구든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장님, 이것 좀 봐 주시겠어요?”
문제는 상대가 차분하게 까다롭다는 거였다.
어찌나 관찰력이 예리한지.
어떤 문제가 보이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지적을 하는데, 괜한 트집이 아니라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만한 사항들이었다.
그런 까닭에 모델이 도착하는 9시까지 두 직원은 눈물을 삼키며 상대를 졸졸 따라다녀야 했다.
한편, 현장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굳어져 있었다.
갑자기 출동한 광고주 때문에 모두 긴장을 한 채 준비를 하고 있는 탓이었다.
그런 상황을 살피며 김 과장은 뺨을 긁적였다.
괜히 걱정이 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신인 애들이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는 얼마 전에 만났던 뉴블랙을 떠올렸다.
광고 콘티를 열정적으로 읽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 열정만큼 현장에서 실력이 뒷받침될지는 미지수였다.
뭐, 그나마 위안이라면 오늘이 CF가 아니라 화보 촬영이라는 거였다.
뉴블랙 1집 화보에 찍힌 사진들의 퀄리티를 고려하면 화보 촬영만큼은 그럭저럭 잘 해낼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저 실수만 적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
“모델 도착했답니다!”
누군가의 말에 현장이 다시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날카로운 인상의 실장을 따라 모델들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활기찬 인사에 스탭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편안하게 티셔츠 차림으로 왔지만 어딘가 정돈된 느낌을 물씬 풍기는 뉴블랙이었다.
보이는 스탭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뉴블랙이 다가왔다.
그리고 광고주와 두 AE 앞에 이르렀을 때.
“안녕하세요, 뉴블랙입니다!”
인사를 하는 동안, 김승곤 과장은 옆에 서 있는 광고주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바라본 듯한 우 팀장이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기 시작했으니까.
하루 종일 무표정으로 현장 준비가 잘되어 있는지 체크했던 사람치고는 꽤 극적인 반응이었다.
뭐지, 얼굴의 효과인가 하고 생각했던 그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어?’
바로 뉴블랙이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각자 종류는 다르지만 모두 KG 인터내셔널에서 런칭하는 브랜드였다.
티셔츠, 바지, 신발, 모자까지.
누가 준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센스 있는 직원이 분명하다고, 김 과장은 생각했다.
광고는 메시지다.
그리고 뉴블랙은 자신들이 얼마나 이번 광고를 열심히 준비했는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고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광고주의 표정이 풀어지면서 현장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스튜디오를 돌아다니며 스탭들과 눈을 마주치는 이들의 모습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현장 사람들의 표정도 살짝 풀어졌다.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아, 김 과장은 현장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와 함께,
문득 오늘 촬영은 굉장히 잘 풀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