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9화
에버드림의 CF 촬영 첫날.
학교 강당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촬영 스탭들은 바쁘게 짐을 나르고, 프로덕션 직원들은 소품이 제대로 준비됐는지 한창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구석에서는 한 무리의 보조출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분위기 한번 살벌하네.”
남자 출연자가 입술을 뗐다.
“다들 얼굴이 굳어 있어 가지고. 이거 편하게 웃지도 못하겠어요.”
“그러게요. 왜 이러지?”
“왜긴 왜겠어.”
중년 출연자가 끼어들었다.
“며칠 전에 광고 찍다 펑크가 나서 그런 거지. 아이돌 애들이 준비를 하나도 안 해 왔다며. 그래서 감독이 대본 던지고, 현장 분위기 작살나고 그랬다더만.”
“어떡해요. 큰일났네.”
“그거 얘네 아니에요. 다른 애들이래요.”
“아니야?”
“아까 조감독이랑 얘기 해봤는데, 오늘 찍는 애들은 다른 애들이에요. 걔네는 걸그룹이고 오늘은 남자애들이래요. 뉴블랙.”
“뉴블랙은 또 누구야.”
“신인 애들이에요.”
젊은 출연자가 대답했다.
“올해 데뷔한 보이그룹 중에는 얘네가 제일 떴을 걸요?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는 나름 유명해요.”
“뭐,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랑은 상관도 없는 얘긴데.”
대사 한 줄이 고작인 보조출연자들에게는 오늘 주연이 누군지 중요하지 않았다.
“좀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진짜.”
“그니까요. 현장 분위기도 안 좋은데.”
“기대하지 마요. 아이돌, 그것도 이름도 잘 모르는 신인 애들이면 뻔하잖아요. 대사나 안 뭉개면 다행이지. 지난번에 드라마에 단역으로 들어간 적 있는데 거기서도 아이돌 때문에 다들 애먹었거든요.”
“에이, 잘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지. 진짜 그러면 제가 손에 장을 지집니다.”
“거, 쉽게 말하면 안 돼. 진짜 지지게 되는 수가 있어.”
중년 남자의 구수한 농담에 다들 너털웃음을 지을 때, 누군가 중요한 화제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참, 오늘 방송국에서 예능 촬영도 하러 온다면서요.”
“난 처음 듣는 얘긴데. 어디?”
“TBC에서 온대요. 뭐냐고 물어도 도통 얘기를 안 해주는데, 조감독이 꽤 큰 데라고만 귀띔해 줬어요.”
“얘네 신인이라며. 그런데 큰 예능을 나와?”
“소속사에서 빽 좀 썼나 보네.”
“TBC에서 큰 게 뭐가 있지. 요새 TV를 잘 안 봐서 모르겠네.”
“주세한 빼고 뭐 있나?”
“저도요. 주세한 빼면 딱히 아는 게 없어서.”
그때, 누군가 툭 물었다.
“주세한 아니에요, 혹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진짜.”
“주세한이 오는 거면 내가 장 지질 때 물구나무도 섭니다.”
“또 그런다. 진짜 서게 되는 수가 있다니까.”
“아니, 말이 안 되긴 하잖아요. 당장 며칠 전에도 이견우 나온다고 난리였는데. 무슨 이런 신인들이 나와요.”
“그래도 아는 예능이면 좋겠어요. 사인이라도 받게.”
그들이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닫혀있던 강당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누군가 턱짓을 하며 말했다.
“왔네요. 뉴블랙.”
다섯 아이돌이 활기차게 인사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 * *
촬영장의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저번에는 깐깐한 광고주 때문이었다면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근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는다.
리혁이가 혀를 차며 속삭였다.
“대체 블링크가 어쨌길래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거예요?”
“빡빡할 만하지.”
내가 말했다.
“촬영 지연에다가 추가 촬영까지 치면 제작비 장난 아니게 깨졌을 텐데, 분위기가 좋은 게 더 이상하지 않냐.”
“그래두, 우리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여.”
“잘한 것도 아니니까. 아직은.”
걱정하는 동생들을 안심시켰다.
“벌써부터 사람들 반응 일일이 신경 쓰고 그러지 마. 연습한 대로, 그대로만 하면 잘 될 테니까.”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걸어갈 때.
촬영장 구석에 서 있던 광고대행사의 두 AE가 우리를 반겼다.
눈에 핏발이 서 있고, 입술이 잔뜩 터져 있는 모습들에 석환 형이 안부를 물었다.
“고생 많이 하셨나 봐요.”
“말도 못하죠. 정말.”
상대가 옅게 웃었다.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재촬영 들어가야 되는데, 광고비는 늘어나지. 광고주는 언짢아하시지. 프로덕션은 프로덕션대로 난리고. 여기저기 조율하느라 돌린 통화료만 해도 몇 십만 원은 나왔을 겁니다.”
진저리를 내던 김 과장님이 부탁하듯 말했다.
“준비 잘하셨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정말. 진짜 정말 잘해주셔야 돼요. KG 인터내셔널 측에서 의류사업부 담당하는 전무이사님도 오시거든요. 다른 부서에서 오신 분들 포함해서 여섯 분이나 돼요.”
“교복 광고 현장에요?”
“예, 회사 전체적으로 브랜드 수익성 검토하시는 중이랍니다. 다들 날카로우실 거예요.”
“…….”
위로하듯이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잘해 주셔서 좋은 인상을 남기면 좋을 거예요. KG 인터가 브랜드도 많고, 광고비 집행도 많이 하는 큰손이거든요. 그런 분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주면 좋죠.”
환상적인 환경이로구나.
스탭들은 한숨을 푹 쉬고, 대행사 직원분들 얼굴은 쏙 메말랐고, 광고주는 으르렁대고 있고.
보조출연자들도 우리를 계속 흘깃거렸지만 호의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냥 호기심 정도.
그 시선을 봤는지 김 과장님이 말했다.
“주세한 녹화 때문에 그래요. 예능 찍는다고 소문 다 돌았거든요.”
“저희가 촬영장 분위기를 해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전혀 아니죠, 광고주 분들도 쌍수 들고 환영하셨어요. 솔직히, 주세한이 찾아온다는데 반기지 않는 기업이 어디 있겠어요.”
그가 기대하는 눈으로 말했다.
“혹시 압니까, 또 주세한에 나와서 우리 뉴블랙 친구들이 유명해질지.”
“그럼 좋겠네요.”
“아, 맞다. 예능 관련해서 드릴 말씀인데, 오늘 촬영하시는 프로덕션 감독님이…….”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CF 감독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밖에서 방금 들어온 듯 땀방울을 훔치는, 예민한 인상의 젊은 남자.
오늘 광고를 담당할 유건 감독이었다.
“감독님, 오늘 이 친구들이 광고 모델 맡은 뉴블랙이에요.”
“안녕하세요, 뉴블랙입니다!”
“어, 그래.”
돌돌 만 대본 콘티를 손에 쥔 남자가 우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준비는 해 왔니?”
“예, 열심히 했습니다.”
“어째 긴장한 표정들이 아닌데.”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다른 광고 찍어본 경험 있어?”
“아뇨, 처음입니다.”
그가 스읍 하는 소리를 내며 숨을 내쉬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하지는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좀, 잘 부탁합시다. 실수하지 말고.”
몸을 휙 돌려서 사라지는 호리호리한 뒷모습을 우리가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억울한걸.
긴장도 많이 했고, 준비도 많이 했는데.
심지어 지호랑 나는 콘티가 찢어져서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야 할 만큼 했다.
뭐.
우리 고생한 걸 알아달라는 건 아니었다. 그거야 우리끼리만 알면 되니까.
하지만 저렇게 나오시니 어리둥절하긴 하다.
첫 만남부터 불쾌한 기분을 대놓고 드러내시니까.
“독립영화 쪽에서 활동하다가 광고계로 넘어온 분이세요.”
과장님이 설명했다.
“영상미도 엄청 훌륭하고, 내용도 잘 뽑아서 정말 잘하는 분인데. 촬영에 관해서 굉장히 보수적인 면이 있으세요. 오늘 주세한 팀이 오는 것 때문에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촬영장 분위기 어수선하게 만든다고.”
가뜩이나 한 신인이 펑크 낸 상황인데, 오늘 촬영한다는 다른 신인은 촬영장에서 예능이나 찍겠다고 하니 그런 건가.
과장님이 덧붙이듯 말했다.
“광고주 분들도 마찬가지로, 저분에게도 좋은 인상 남기면 나쁘지 않을 거예요. 워낙 영화계나 드라마 쪽에서 인맥이 대단한 분이라.”
* * *
촬영 준비가 끝났다.
분장실에서 메이크업을 마치고 나오니 강당은 어느새 촬영장으로 변해 있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고가의 카메라와 조명 장비는 물론이고, 화보 촬영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멀찍이서 조감독님이 나와 지호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바닥에 테이프로 붙인 x자 두 개를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일단 너희 투샷부터 먼저 들어갈 건데, 지호가 여기 x자에서 반쯤 주저앉아 있으면 우주가 다가서서 손잡고 일으켜 주면 돼. 어려운 씬 아니니까 일단 동선 체크부터 해 보자.”
동선 체크를 하고 나서 리허설에 들어가기로 했다.
배우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잠시, 그 어느 때보다 바글바글한 인원을 보면서 침을 삼켰다.
조명, 오디오, 소품 등 현장 스탭은 물론이고, 보조 출연자들, 광고대행사와 프로덕션 직원들, 그리고 광고주까지.
지난번에 봤던 우 팀장님 곁에 독보적인 포스를 발산하는 중년인도 있었다.
저분이 전무님인 건가.
멀찍이서 손을 흔들며 잘하라고 해주는 동생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심호흡을 하는 막내에게 말을 걸었다.
“떨려?”
“네, 엄청. 형은 어때여?”
“나도 미치겠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저도 벌렁벌렁해여.”
한참 동안 서로 다독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자.”
“화이팅이에여.”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향한 가운데, 마침내 촬영이 시작됐다.
* * *
유 감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영 마뜩찮은걸.’
체육관 한가운데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는 두 멤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에 블링크와 촬영을 했던 날이 떠올랐다.
준비 잘했다는 듯 여유롭게, 바로 저런 표정으로 웃고 있었지.
그래서 잘할 줄만 알았다.
첫 대사가 나올 때부터 와장창이긴 했지만.
‘얼굴은 그럴싸하다만.’
뉴블랙에서 비주얼을 담당하는 두 멤버라서 그런지, 카메라에 담기는 모습은 제법 입체적이다.
둘 중에 누가 배우 지망이라고 했는데, 얼굴만으론 알기 힘들었다.
“액션!”
그리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시작한 씬은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다.
마법학교.
주인공인 전학생이 반장의 교복 재킷에 마법을 잘못 걸어서, 그 교복이 훨훨 날아다니고. 주인공은 그걸 쫓아서 강당까지 오게 된다. 마침내 교복을 잡아서 주저앉아 있을 때.
반장이 눈앞에서 다가온다.
-또 만나네.
그리고 선우주의 입에서 첫 대사가 나왔을 때, 그는 눈을 깜빡였다.
제법 괜찮았다.
…라는 판단은 계속된 연기를 지켜보면서 수정했다.
아니.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일단 그림이 좋았다.
주저앉아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왕지호는 정말, 방금 전까지 계속 뛰다가 지쳐 쓰러진 사람처럼 보였다.
보면서 바로 이쪽이 배우 지망이라는 걸 확신했다.
연기에서 느껴진다.
하루이틀 배운 게 아니라, 착실하게 기초부터 배워서 튼튼한 연기였다.
-어, 반장…?
당황해하는 표정 연기까지 완벽하다.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럽고도 남은 수준이었다.
이대로면 씬마다 테이크를 짧게 찍어도 될 것 같다.
다른 멤버들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 둘만 있다면 당장 반나절만 주어져도 여유롭게 끝낼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
모니터에 나오는 선우주의 연기를 보며 고개를 다시 갸웃했다.
‘아닌가? 얘가 배우 지망인가?’
화면 속에서 선우주는 허리를 굽힌 채 왕지호를 보며 웃고 있다.
얼굴은 친근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마냥 상냥한 느낌은 아니다. 뭔가 수상함을 포착한 것처럼 그 눈이 전학생의 얼굴을 훑는다.
디테일적인 면이 엿보였다.
손끝 하나마다 어떤 의도를 담았는지 느껴진다고 할까.
‘뭐하는 애지.’
왕지호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지만 이쪽은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지금 선우주가 보여주고 있는 디테일은 콘티에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허리를 숙여 손을 내민다]라는 지문만 있을 뿐.
참견쟁이 감독이 디렉션을 일일이 지정해줘야 나올 듯한 몸동작을 아이돌이 알아서 하고 있었다.
의아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배우든 저렇게 체화된 몸짓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려면 몇 년은 걸리니까.
배우는 단순히 얼굴과 목소리로만 연기하는 직업이 아니다.
화면 속에서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몸을 써야 하는 직업이다.
예컨대 유연성 있게 목을 쭉 젖혀서 인물의 현재 심리상태인 해방감을 표현한다거나. 아니면, 어깨와 목을 잔뜩 긴장시켜서 위압감을 준다거나.
그랬기에 이상했다.
‘연기 자체의 숙련도는 낮은데, 표정이랑 몸짓은 프로 같고.’
미스터리 투성이었다.
“컷!”
씬이 끝나자마자 외친 소리에 전학생과 반장이 다시 두 아이돌 멤버로 돌아왔다.
헤드폰을 벗는 그에게 조감독이 속삭였다.
“선배, 얘네 잘하는데요?”
“나쁘지 않아.”
“아니,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이 정도면 대박 수준이에요. 블링크 걔네 생각해 봐요.”
조감독이 오늘 촬영 괜찮겠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을 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말을 꺼냈다.
“세준아.”
“예?”
“저기 우주라는 애, 연기하는 게 어째 이상하지 않냐?”
“뭐가요?”
“아니, 몸 쓰는 거랑 연기가 매칭이 안 되는 건 그렇다 치는데. 연기하는 것도 평범하지는 않단 말이지.”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요.”
조감독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둘 다 이상하지 않아요?”
“둘 다?”
“예, 저는 지호인가. 쟤만 보고 있었거든요. 근데 느낌이 좀 이상해요. 제대로 하는데, 제대로 안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감독이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일단, 다시 한 번 가보자.”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아직 파악이 안 되지만 뭔가 느껴졌다.
이 현상의 원인을 알아낸다면, 지금 찍고 있는 광고의 퀄리티를 보다 더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레디, 액션!”
다시 한번 촬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두 아이돌 멤버의 연기에 집중했다.
‘세준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는지 알겠어.’
두 멤버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다.
확실히 연습한 티도 많이 나고, 흠 잡을 데 없이 훌륭하다.
광고의 측면에서는 그랬다.
SNS 상으로 유통되는 가벼운 컨셉의 광고이기에 제대로 된 정극 연기가 필요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둘은 컨셉에 맞는, 착실하고 준비된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없이 딱 적당하게.
하지만 꽤 오랫동안 연출을 맡아온 이의 눈에는 아쉬움이 컸다.
‘이것보다 더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각자 다른 의미로 둘의 연기는 아쉬웠다.
‘전학생’을 연기하는 왕지호 같은 경우는 표정이나 동작이 살짝 미숙하지만, 그 이유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이를 배려하는 느낌이다.
키가 큰 사람이 작은 아이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걸음걸이를 일부러 줄여서 걷는 듯한 모습이라고 할까.
그리고 맞은편에 있는 선우주.
이쪽은 이쪽대로 이상했다.
기술적으로 보면 탁월한데, 감정 표현이나 대사 처리 등에서 미숙함이 엿보인다.
문제는 이쪽도 만만찮게 본인의 역량보다 덜 발휘하는 느낌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자제하는 듯한 상대와 달리, 이쪽은 본인이 뭘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해야 하나.
액셀만 밟으면 쭉 잘 달릴 것 같은데, 시동 켜는 법을 모르는 운전자 같았다.
그랬기에 아쉬웠다.
잘 조율한다면 현재 의도하는 광고보다 더 근사한 것을 뽑아낼 수 있었으니까.
‘어떻게 할까.’
광고 콘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본래 대행사 제작팀과 함께 만들었지만 난이도 문제로 폐기된 초창기 콘티였다.
훨씬 더 내용도 좋고 예상 반응도 좋았던 물건.
유 감독은 고개를 돌려서 뒤에 서 있는 광고주를 바라보았다.
KG 인터의 전무이사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다른 직원들도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대보다 더 좋은 반응이었다.
거기다 블링크 때와 달리 이쪽은 처음부터 이틀 촬영.
‘그렇다면…….’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리스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확실함이 필요했다.
일단, 저 둘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 소화할 만한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으니까.
“컷!”
그랬기에 그는 두 멤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 * *
감독님의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다.
뭔가 기분이 좋으신 듯한데 그걸 애써 숨기는 듯하다고 할까.
컷 하자마자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오시길래, 혹시 뭔가 잘못했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너희 혹시 감정 담아서 연기해 볼 수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