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94화
얼떨떨한 기분을 숨기며 물었다.
“다큐멘터리요?”
-PBS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작년 수능 날 있었던 사건을 다루고 싶다고.
최 교수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 아침 PBS 시사교양국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창사 특집 50주년 다큐멘터리.
의인을 주제로 해서 인터뷰 대상을 물색하다가 그날 일에 대해 관심을 보인 모양이었다.
-그쪽에선 연락처를 요청하는데, 우주 씨가 유명 인사다 보니 함부로 주기가 그랬어요.
유명 인사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부끄럽지.
아이스 버킷 챌린지로 꽁꽁 얼어붙었던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어디다 적어 놔야겠다. 추울 때는 민망한 말 듣기.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요?
“일단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엄청 좋은… 제안이네요.”
PBS가 어디인가.
시골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하루 종일 틀어 놓는 채널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지상파 방송국.
그런 PBS의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에 의인으로 얼굴을 비춘다는 건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네?
“저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교수님과 가족 분들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이잖아요. 혹시 저 때문에 피해라도…….”
-난 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네요.
가벼운 웃음이 들렸다.
-걱정하지 마요. 오히려 아버지께서 적극적으로 하시겠다고 한 거니까. 노란 패딩 청년한테 고마웠다고.
“아, 네….”
-어떻게 하겠어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승낙에 그가 PBS 시사교양국의 연락처를 불러 줬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때 병원에서의 일도 그렇고. 제가 이번에도 또 신세를 졌네요.”
-아니에요. 좋은 일이 알려지면 좋죠.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밥 한 끼 먹자는 안부 인사를 나누며 통화를 종료했다.
“후…….”
심호흡을 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PBS 특집 다큐라니.
너무 큰 건이 대수롭지 않게 들어와서 잠시 현실감이 없었다.
메모장에 적은 PBS 방송국의 전화번호를 보다가 고개를 드니, 미어캣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형?”
“별일 아니야.”
웃으면서 방금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년 수능 때 내가 리어카 끌던 할아버지 구한 사건 있었잖아. 지금 PBS에서 의인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기획 중이라는데, 그때 그 사건을 다루고 싶어 하나 봐.”
“…뭐라고요?”
눈을 휘둥그레 뜬 동생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아까는 아니었는데, 이제야 조금 현실감이 드는 기분이었다.
* * *
PBS 시사교양국.
막내 작가 정우정은 여전히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아, 어려우시다고요? 네… 알겠습니다아.”
그녀는 힘없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이걸로 마흔두 번째 실패.
목록을 살피는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겨우 두 건 건졌네.’
동그라미가 그려진 것은 딱 두 건.
하나는 원룸에서 불이 난 사고, 다른 하나는 동네에서 미친 개떼가 날뛴 사건이었다.
나름 어렵게 픽스했지만 영 마땅치 않았다.
화제성이 부족하다고 할까.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이 오! 한다기보다는 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말 정도의 사건들이었다.
‘뭔가 괜찮은 게 나오면 좋을 텐데…….’
갑갑한 마음을 삭이며 다음 전화번호를 찾을 때, 부르르 진동하는 핸드폰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떠올랐다.
“여보세요.”
-PBS 정우정 작가님 되시나요?
“…네, 맞긴 한데요.”
잠깐 말이 엉켜 나올 뻔했다.
건너편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굉장히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뭐 이렇게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다 있지?
-안녕하세요. 선우주라고 합니다. 최용재 교수님한테 연락처를 받았어요. 작년 수능날 있었던 일을 인터뷰하고 싶으시다고.
“아, 네! 맞아요!”
그 의인이구나.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연락이 좀 늦었네요. 다른 사람들과 상의를 해야 해서.
“아니에요. 언제든 감사하죠.”
-저희 회사에서 전화를 하기 전에 제가 먼저 인사차 연락을 드렸어요.
어디서 재수 생활을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인은 취업을 한 모양이었다.
다큐 건 때문에 회사에서 연락을 한다니.
꽤 대기업인가?
그러고 보니 KG그룹 의인상을 받았다고 하던데, 특채 같은 걸로 들어갔을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정우정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연락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최용재 님 통해서 저희 방송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셨죠?”
-네, 간략하게 들었어요.
“제가 다시 한번 설명을 드릴게요.”
이번 다큐멘터리의 개요와 인터뷰 사항 등을 짤막하게 설명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리스트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제 세 개였다.
앞선 두 건이 시기적으로 오래 됐다면 이건 1년도 안 지난 사건이라 시의성도 적절하고 화제성도 있었다.
당연히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인터뷰 날짜를 잡고 싶은데, 저희가 언제 방문을 하면 좋을까요?”
-어… 잠시만요. 제가 스케줄이 많아서.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노랫소리가 시끌시끌했다.
그 뒤로 이런저런 남자 목소리들이 들렸다.
살짝 앳된 것도 끼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 좋았다.
귀를 기울이려고 할 때, 선우주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제가 목요일까지는 행사가 너무 많아서….
“아, 업무가 많으신가 봐요?”
-네, 직업 특성상…….
상대가 웃음소리를 냈다.
‘업무’라는 단어를 재미있게 느낀 모양이었다.
-아마 금요일쯤은 될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 최근에 저희가 뉴스에 나오면서 갑자기 행사가 늘어났거든요.
회사가 어디 뉴스에 이름이 나왔나.
그런데 이상하다.
아까부터 자꾸 대화가 엇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였다.
-이 부분은 제가 소속사 통해서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소속사요?”
-네, 소속사요.
이쯤 되니 뭘 잘못 알고 있는 게 확실해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선우주 님, 혹시 지금 하시는 일이…?”
-아.
상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 가수에요.
“……네?”
당황스러웠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직업군이었다.
“가수요?”
-네. 가수 활동 중인데… 혹시 모르고 연락하신 건가요? 알고 계신 줄 알았거든요.
“잠시만요.”
잽싸게 인터넷을 켰다.
포털에 ‘갈현동 의인’을 검색하자, 곧바로 기사가 주르륵 떴다.
얼마 안 가 ‘신인 보이그룹 뉴블랙 우주, 데뷔 전 의인으로 화제’라는 타이틀을 발견했다.
구석에서 자리 잡은 기사를 보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걸 왜 지금 발견했지?’
…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일단 섭외가 되는 건부터 추리자고 겉핥기로 자료 조사를 한 터였다.
워낙 유명한 건이라 자세히 검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거기다가 작년 수험생이었던 애가 반년 만에 아이돌이 되어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찔했다.
이 좋은 소재를 놓칠 뻔했다니.
선배 작가들이 알았다면 건성으로 자료 조사를 하다니, 막내가 빠졌다고 하루 종일 눈치를 줬을 것이다.
그녀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뉴블랙’을 검색했다.
-주세한 추석 특집으로 첫 예능 출격, ‘뉴블랙’은 누구?
-뉴블랙, 교복 에버드림 모델 됐다
-루게릭 환자 돕기 아이스버킷 챌린지 참여한 뉴블랙 “몹시 감사….”
교복 모델, 국민 예능, 요즘 유행하는 캠페인까지.
꽤 잘나가는 신인 아이돌 같다.
그리고 그런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작년에 의인이었다는 사실은 별로 안 알려진 듯했다.
‘회사에서 홍보를 안 했나?’
이 좋은 소재를 가만 놔두다니.
그런 의문을 품으며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면 인터뷰, 언제쯤 가능할까요?”
* * *
PBS 방송국의 작가님에게 연락을 드린 후 나머지 일은 회사에 맡겼다.
아무래도 아이돌 활동을 하는 입장이다 보니 방송국과 조율해야 할 사항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단 내가 너무 바빴다.
주세한 추석특집에 대한 보도가 나온 후 뉴블랙에 대한 행사 섭외가 확 늘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녹화도 안 들어간 애들을 무슨 이유로 부르는 건지 의아했지만, 우리는 사양 않고 그 많은 행사를 소화했다.
여기다 연습과 곡 작업, 각종 관리와 레슨이 합쳐지니 잠을 자는 것 빼고는 다른데 신경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HBS MTV에서 미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다큐멘터리?”
“네, 제가 작년에 어떤 분을 구한 일이 있어서요.”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얼굴에 흥미가 가득했다.
HBS 상암 타워 13층.
이 작은 방은 우리가 출연하게 될 예능 프로젝트 ‘뉴블랙 리얼리티(가제)’ 팀 회의실이었다.
“의인이라니….”
피디님이 볼펜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진짜 써먹기 좋은 소재인데, PBS에서 찍기로 된 거야?”
“네, 다음 주에 촬영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저희도 같이 나온데여.”
쏙 끼어든 막내의 목소리에 웃음이 흘렀다.
조연출이 웃으며 말했다.
“이야, 너희도 신기하겠다. 광고도 슬슬 나오고, 다큐도 찍고. 주세한도 나가고.”
“뭐 되게 많이 했구나. 너희.”
“이러다 우리 리얼리티 찍을 때쯤 되면 슈스 되는 거 아니에요?”
작가님의 농담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제작진도 우리도 한참을 웃어댔다.
그렇게 웃고 있는 우리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기다리고 있는 게 참 많았다.
SNS에 나갈 교복 광고도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고 들었고, 이번 주 일요일이면 주세한 녹화분도 방송될 테고.
그게 끝나면 다큐멘터리에도 잠깐 얼굴 비추고.
그것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를 떠나서, 신인 아이돌인 입장에서는 이만큼 설레고 떨리는 일도 없었다.
한참 동안 제작진과 즐거운 분위기로 첫 미팅을 진행하고 있을 때, 피디님이 손뼉을 치며 테이블을 정리했다.
“자자, 단체 미팅은 이쯤하면 된 것 같고. 점심 먹으러 가기 전에 너희 멤버 별로 개인면담 좀 진행하자.”
“…개인면담이요?”
“너희 리얼리티잖아. 멤버 개인별로 조사할 게 많아.”
오. 이런 건 처음이다.
지금까지 나갔던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늘 단체로 조사를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우리를 주인공으로 하는 8부작 리얼리티다 보니 멤버 개인별로 자료 조사가 필요한 듯했다.
첫 타자로 불려 나가는 지호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들, 보고 싶을 거예여.”
아련한 표정을 짓는 우리 애의 모습에 다들 웃었다.
그걸 또 진지하게 받아서 손을 흔들어 주는 둘째의 모습에 2차로 또 웃음보가 터져 버렸고.
그런데 개인 면담을 진행하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애들이 하나씩 다녀올 때마다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마치 비밀을 숨기는 사람처럼.
왜 그러냐고 묻는데 다들 알려 주지 않았다.
뭐지?
의문을 품은 채 나는 마지막으로 불려 갔다.
카메라가 설치된 작은 방.
자리에 앉으며 피디님과 메인 작가님에게 물었다.
“벌써부터 촬영 들어가나요?”
“그건 아니고. 본 촬영 들어가기 전에 컷 좀 몇 개 따려고. 예능 보면 알지? 열심히 회의하는 장면들 나오는 거.”
“네, 알아요.”
“이게 그거야. 자, 그럼 개인사에 대한 조사를 해 볼까?”
특별할 것 없는 내용이었다.
피디님과 작가님에게 내 이력을 짧게 설명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랑 살아왔고 다른 기획사에서 연습생을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스토리.
물론 몇 가지는 언급을 꺼렸다.
예컨대 TNT 데뷔조가 됐다거나, 지금 데뷔한 아이돌 중에 누구랑 친하다거나.
친근한 태도로 우릴 대하고 있지만 엄연히 방송국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이미지보다는 화젯거리나 시청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래서 내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피했다.
여기 오기 전에 신인 아이돌 리얼리티를 조금씩 살폈는데 그런 장면이 꽤 많았거든.
카메라가 아래 각도에서 의자에 앉은 아이돌을 비추고, 그 아이돌이 슬픈 얼굴로 얘기하는 거다.
-제가 사실 MOP에서 틴스피릿으로 데뷔를 할 뻔했거든요.
-네, 거기서 같이 연습했던 동기들은 지금 다 데뷔했어요. 유명한 사람들도 많고요. 가끔 제 자신이 초라하게 여겨질 때가 있는데…….
-가을소녀 리즈랑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어요. 지금 그 친구는 가을소녀로 활동을 하고요.
이런 식으로 가다가 마지막에는 눈물도 흘려 주는 거 말이야.
그런 상투적인 장면으로 나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 작가님과 피디님은 그런 부분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빈 종이 하나를 슥 내밀 뿐.
“이번에 너희가 찍을 리얼리티는 게릴라 콘서트나 여행처럼 뚜렷한 테마 없이 자유롭게 진행해 볼 거야. 몰래카메라, 공포체험, 수영장에서 하는 물놀이 등등.”
“아, 이해했어요.”
“그래서 평소 때 동생들이랑 이거 해 보고 싶다, 하는 게 있으면 편하게 적어 봐. 우리가 검토해 보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건가.
동생들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던 게 이거구나 싶었다.
“멤버들은 뭘 적었는지 여쭤봐도 되나요?”
“뭐, 이것저것 다양해.”
…라고 하시면서 말을 돌리신다.
얘네 대체 뭘 썼을까.
지난번에 라이브를 빙자한 깜짝 카메라에 된통 당하고 나니, 이제는 그런 기미만 보여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면…….
나도 뭔가 재미있는 걸 적어 볼까.
요즘 들어 우리 애들을 보면서 한 가지 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있긴 했다.
내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이건 어떠세요?”
두 분은 내 아이디어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 * *
뉴블랙 작업실에 딸린 녹음 부스 안.
“형,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예여?”
“뭐가.”
리혁이가 불퉁한 얼굴로 답했다.
“노래하고 있잖아.”
“아니. 카메라 의식하지 말고 노래를 하라구여.”
“야. 네가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의식을 안 해?”
“제가 뭘여.”
…라면서 바닥에 드러누운 막내가 캠코더를 들고 있다.
리혁이가 나한테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 달라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얘 보고 좀 뭐라고 해 봐요.”
“네가 해.”
“내 말 안 듣잖아요.”
“언제는 들었냐.”
찌릿.
“아니, 뭐… 지금은 지호가 감독이잖아. 촬영장에서는 감독님 말이 법이지.”
“아오, 열 올라.”
화를 다스리겠다는 듯 리혁이가 목을 풀었다.
“오백 원, 오백 원…….”
나 역시 잠시 기지개를 쭉 키면서 피로를 푸는 동안 바닥에 쪼그려 앉은 막내가 수신호를 보냈다.
헤드폰을 끼고 다시 노래를 기다릴 때.
뭐야. 왜 안 나와.
녹음 마이크에서 고개를 옆으로 내밀자 유리창 건너편에서 과자를 부스럭거리는 중현이가 보인다.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
이내 눈총 따가운 시선을 받은 녀석이 허허 웃으며 버튼을 눌렀다.
MR이 흘러나왔다.
그 따스한 전주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놀라볼 만큼 달라진 ‘밤바다’의 공식 음원이었다.
전문가들이 편곡을 해 주고, 엔지니어 분들이 믹싱과 마스터링을 근사하게 다듬어 줘서 그런지 수백 번 넘게 들었지만 아직도 귀가 호강하는 느낌이다.
이윽고 리혁이와 내가 듀엣을 했다.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이른바 밤바다 MV 촬영.
말만 뮤비지 실상은 연습 영상이다.
그런 거 있잖아.
흑백 영상 속에서 아이돌이 부스에서 헤드폰 끼고 노래 부르는 거.
지금 찍는 건 2주 뒤에 발매될 밤바다의 공식 뮤비였다.
회사에서는 삼각대와 카메라를 주고 찍어만 오라고 했는데, 기왕 하는 거 우리 막내한테 맡겨봤다.
지난번에 펑펑 울면서 ‘저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잖아여’ 했던 게 기억에 남기도 했고, 요즘 들어 연기혼을 불태우는 녀석에게 조언이라도 얻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리고 몹시 후회하는 중이었다.
이것이 어쩜 잔소리가 이리도 많은지…….
아까는 리혁이가 자기도 모르게 분노의 밤바다를 불러 댈 정도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듀엣으로 따스하고 살벌한 노래를 불렀지. 밤바다에 널 담그겠어, 그런 느낌으로.
-잠깐 멈출게요.
이번에는 또 뭐냐는 듯 바라보는 우리에게 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저 아니에여.”
그러고 보니 헤드폰에서 목소리가 들렸구나.
유리창 너머에서 비주가 서 있었다.
양손에 간식거리로 터질 듯 부풀어오른 편의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입모양으로 뭐라고 하며 시계를 가리켰다.
저녁 6시.
노래에 집중하는 바람에 잠시 까먹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그거.
헤드폰을 벗으며 우리끼리 긴장감 어린 웃음을 교환했다.
“주세한 할 시간이네여.”
일요일.
오늘은 TBC의 간판 예능 ‘주사위로 세계 한 바퀴’에 뉴블랙이 출연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