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00화
동생들은 TV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곤 내게 고개를 돌렸다.
“리얼리티요? 다큐가 아니라…?”
“응. 그때 다큐 팀이랑 같이 한 팀 더 왔잖아. 우리 리얼리티 찍어 주시는 작가님들이었어.”
내가 도리어 물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다큐에서 지나가면서 쓸 장면 하나 찍겠다고 두 팀씩이나 찾아오고.”
“…그걸 어떻게 눈치를 채요, 이 사람아.”
리혁이가 날 째려보는 동안 지호가 화면을 가리켰다.
“어? 비주 형 나와여.”
“으으…….”
“형, 왜 그러고 있어요?”
그리고 그 주인공은 허리를 접은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마치 천적을 피해 숨은 초식동물 같다.
내가 그 귀에 속삭였다.
“비주야, 그러고 있어도 소리는 다 들려.”
“으으, 전 몰라요.”
그러고선 귀도 쏙 가린다.
이내 자기도 자세가 웃겼던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화면을 바라보는 표정은 암울했다.
“나 완전 오글거리는 말 엄청 많이 했는데…….”
“형만 그런 거 아니에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리혁이는 귀가 루돌프 코처럼 변해 있었다. 곧 있으면 저 얼굴까지 LED 전등처럼 빛날 것 같다.
“하여간, 이거 그거죠? 지난번에 교복 광고 때 장난친 거 복수.”
“아냐, 나 그런 거 가지고…….”
“맞네. 맞아여.”
막내가 히죽 웃었다.
“저 알거든여. 연기 같이해 보면서 알게 된 건데, 우주 형이 속마음은 다른데 아니라고 말할 때 습관이 있어여.”
“넌 조용히 해.”
그러는 동안 화면 속 비주는 제작진의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할 말은 가득한데 머릿속으로는 정리가 잘 안 되는 표정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다른 동생들도 괴롭다는 얼굴들이다.
대체 뭐라고 했길래 이런 반응인 거지?
내가 기대한 건 멤버들의 의례적인 칭찬이었다.
방송국과 인터뷰하는 자리니 간단하게 ‘우주 씨는 평소 굉장히 성실한 생활을 하며 타인의 귀감이 되는 바….’하는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인 멘트들 말이야.
그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하는 본인을 보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담는 게 목적이었는데, 어째 애들 반응이 과하다.
마치 일기장을 엄마, 아빠에게 오픈하는 중학생들 같다고 해야 하나.
그때, 화면 속 비주가 선선한 얼굴로 답했다.
-우주 형은 음… 되게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 형이 의인이라는 걸 안 지는 조금 됐는데, 처음 알았을 때는 저희끼리 굉장히 놀랐거든요. ‘어? 저 사람이…?’
그러면서 웃는다.
-왜냐하면 그때가 저희 연말 평가라고 시험 같은 게 끝났던 때였거든요. 그때 저희를 굉장히 잘 이끌어줘서 능력 있고 똑똑한 형? 그런 이미지였어요.
비주가 차마 못 보겠다는 듯 눈을 가리자 중현이가 그 귀를 덮어줬다.
나도 슬슬 민망했다.
이거 내가 생각한 거랑은 다르게 가는 것 같은데.
-그런데… 점점 시간이 지나고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될 수록, 굉장히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는 우주 형이 어디서 좋은 일을 했다고 해도 안 놀랄 정도요.
-구체적인 사례를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우주 형을 위해 간식거리를 하나 만든 적이 있었어요. 한창 형이 데뷔 타이틀 작업하느라 일주일 가까이 밤을 새고 그랬거든요.
그랬었지.
-숙소에서 쉬고 있는 형한테 간식거리를 가져다줬어요. 그런데 몇 입 먹더니, 너무 맛있다면서 이거 반죽 남았냐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른 멤버들한테도 주려고 한다니까. 너무 맛있다면서 자기 혼자 먹게 다 달라고 했어요.
-혼자요?
제작진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배려냐는 듯.
화면 속 비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네, 그래서 뭐지. 이상하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설탕 대신 소금을 넣었더라고요.
-아…….
-한참 지나고 나서 우주 형한테 그때 일을 물었거든요. 형, 그때 왜 그랬냐고. 그렇게 물어보니까 너 많이 힘들어 보였는데 그런 걸로 스트레스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랬어요.
-나름의 배려였던 거네요.
-네, 그때 느꼈던 것 같아요. 일주일 연속으로 밤을 지새운 사람이 제가 상처 받을까 봐 그걸 맛있다고 꾸역꾸역…….
다른 멤버들은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비주와 나는 몹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색하고 민망하고.
왠지 김덕순 여사가 주변에 있으면 그 뒤로 숨고 싶은 듯한 느낌이다.
그러고 있을 때 중현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형,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응.”
“보통 이런 거 하면 당하는 사람들 창피해하고 구경하는 게 목적이잖아요.”
“그…렇지?”
“근데 이거는 형도 부끄러운 거 아니에요?”
“…….”
중현이의 말이 핵심을 짚었다.
그게 바로 내가 느끼고 있던 바였다.
아니, 분명 내가 기획한 깜짝 카메라인데 이건.
실수했다는 생각이 든 건 그때부터였다.
“으아아…….”
영상이 이어지는 동안 뻐꾸기 시계처럼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내 공허한 외침이 울렸다.
“피디님, 이거 그만하면 안 될까요…?”
하지만 카메라의 불은 계속 깜빡일 뿐이었다.
* * *
다각도로 숨겨진 카메라가 멤버들의 반응을 찍는 동안, 별실에 있는 메인작가와 메인피디는 웃고 있었다.
-피디님, 작가님… 계시나요?
화면 속에서 카메라를 향해 애타게 부르짖는 한 멤버 때문이었다.
메인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얘도 못 말리겠다, 정말. 생긴 거는 되게 똑부러졌는데 은근히 허당이라니까요.”
“그러니까요, 이걸 예상 못 했나?”
몰래카메라의 핵심은 나는 안 당하고 너만 당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선우주의 기획은 이상했다.
당사자도 부끄러울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웃겼다.
사전 인터뷰 때, 제작진이 은근히 유도 질문을 던질 때도 안 낚이고 똑부러지게 대답한 애가 이런 기획을 설명할 때는 눈을 반짝거리고 있었으니.
하지만 제작진은 굳이 그런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꽤 분량을 뽑아낼 만한 기획이었으니까.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마침 PBS에서 다큐 촬영을 나간다고 했으니 같은 시간에 나가 인터뷰 컷을 따오기로.
굳이 어디라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멤버들은 당연히 다큐 촬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피디가 볼펜을 굴리며 말했다.
“이거 편집해 가지고 1화 마지막에 붙이면 반응 좋을 것 같죠? 리더를 대하는 멤버들의 진심, 이런 식으로 우주 리액션 컷 위주로 넣고.”
“꼭 넣어야죠. 멤버들 반응도 그렇고. 편집점만 잘 잡으면 10분은 거뜬할 거예요.”
카메라에 녹화되는 장면을 확인하면서 그들은 리얼리티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멤버들이 제안한 것도 괜찮은 거 많던데. 이거 하나씩 잘 살려보면 8화 분량도 순식간에 채우겠는데요?”
“그죠. 다른 것도 리액션만 이대로 나오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럼 얘네가 제안한 것 중에 하나를 또 한다면…….”
그들은 뉴블랙 멤버들이 A4 용지에 쓴 기획서를 훑었다.
그러곤 곧바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게 좋겠네.”
“반응이 재미있겠는데요. 특히 우주.”
그들은 화면 속에서 얼굴을 감싸는 이를 보며 음흉히 웃었다.
그러는 동안 화면 속에선 다섯 멤버가 ‘저희 그만해 주세요!’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 * *
PBS 시사 교양국.
특집 다큐의 방영을 앞둔 제작진은 한창 편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비좁은 편집실.
겨우 기지개를 킬 만큼 작은 방마다 PD들이 애벌레처럼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수십 시간이 넘는 촬영분량에서 쓸 만한 컷을 솎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편집된 일부 컷은 예고편을 맡은 막내 조연출에게 넘어갔다.
초췌한 얼굴의 조연출은 커피를 연거푸 들이키면서 선배들이 보낸 분량을 훑었다.
이윽고 30초 예고에 쓸 만한 것들을 골라냈다.
잠이 쏟아져서 그런지 몰라도 본능적으로 ‘이거 괜찮다’ 싶어서 고른 장면들이었다.
마침내 본 예고편을 제작하려고 할 때, 그는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이게.’
뽑힌 영상을 확인하니 특정 인물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대 조명이라든가, 화려한 화장이 없는데도 사람들의 시선을 확 끌어내는 외모의 소유자.
아이돌 멤버라고 했던가.
이목구비의 영향도 있지만 표정이 다채롭고 생동감이 있어 절로 눈길이 갔다.
정신이 몽롱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보기 좋은 것만 고른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는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러곤 다른 영상 클립을 담았다.
이제 예고편에 쓸 어느 아이돌 멤버의 분량은 3초 남짓.
조연출은 고민에 잠겼다.
앞에 쓸 것이냐, 마지막에 쓸 것이냐.
그리고 그는 결정했다.
* * *
[?? 혹시 방금 PBS 본 사람??]
무슨 다큐 예고하는데 순식간에 지나갔거든?? 맨앞에 2초 나온 사람 봤어??
-뭔 소리야;;
-아니 방금 인터뷰 장면 같은 거 스쳐 지나가고 그랬는데;; 거기서 웬.. 아 이걸 어떻게 말해야 되지
-다큐 예고?
-ㅇㅇ
-제목이 뭔데? PBS 홈페이지 들어가 봐. 거기 가면 미리보기 그런데 예고 올라와 있다
-아! 고마워!
[개쩌는 일반인 찾았다]
(캡처)
다큐 예고편 캡처해 온 거 ㅋㅋㅋㅋㅋ 와 의인 특집인 거 같은데, 거기 인터뷰 컷으로 나왔음
이건 움짤로 봐야 해 ㅎ.ㅎ
-오..
-나도 링크 좀
-어디서 낯이 익은 거 같은데
-ㅇㅇ 나도 초면이 아닌 느낌인데
-저게 뭔 일반인이야 연예인이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걔잖아 요번에 주세한 나온 애들
-?
-링크 [인물정보 ‘뉴블랙’]
-??
-ㅋㅋㅋㅋ뭐야 연예인이네
-뭐였더라 걔 아님? 은호?
-우주래
-아니 광고 배역 있자나 마법학교
-그러네?
-근데 쟤는 왜 저런 다큐에 나와?? 의인..?
* * *
끔찍했던 리얼리티 촬영이 끝나고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몇 건의 라디오 스케줄과 수십 건의 행사, 그리고 우리 수플레와 함께하는 라이브 방송까지.
몸이 열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열 개까지는 아니고, 한 두어 개 정도.
주세한과 SNS 광고가 좋은 인상을 주었던지 곳곳에서 광고 섭외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다.
신인치고 굉장히 많은 숫자였는데 그중에 진지하게 검토하는 건 10퍼센트 남짓이었다.
옥장판이나 음이온 운동기구 같은 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정수기 같은 제법 괜찮은 광고 중 일부는 회사에서 반대했다.
“길게 봐야지. 이미지 관리 측면에서.”
석환 형이 말했다.
“광고도 배우들 작품 활동하는 거랑 똑같아. 무작정 돈이 된다고 다 해야 하는 건 아니야. 이미지랑 맞는 걸 해야지. 괜히 광고 하나 잘못 찍어서 이미지 나빠지는 경우도 수두룩하니까.”
그 말에 모두 동의했다.
대부업체 광고를 찍어서 한 소리 들은 사람도 있고, 역사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기업 광고를 찍어서 이미지가 나빠진 케이스도 있고.
물론 우리에게 그런 광고가 들어오진 않았지만, 생뚱맞은 광고를 할 순 없었다.
예컨대 20대인 내가 안마 의자에 앉아서 ‘아, 너무 시원해’ 하는 건 이상하잖아.
“대박 잘 어울리는데여.”
“형이랑 딱이에요.”
“어? 왠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거의 뭐 전속 모델로 쓰려고 할걸요.”
말도 안 되는 의견들이 더러 있긴 했다.
그래서 ‘다음 곡 파트 분배를 어쩐다’라고 중얼거리니 다들 역시 아니라고, 형은 교복 광고가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를 해 줬다.
전적으로 동의했다.
어쨌거나 장기적인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회사가 검토를 한 후 두 개 정도를 계약하기로 했다.
더 좋은 업체도 있었지만, 모델 에이전시를 통해서 광고주가 가격을 후려치는, 이른바 네고를 시도하는 바람에 파투가 났다고 들었다.
그 과정에 참여했던 우리 로드 매니저 서민기 씨의 증언에 의하면 ‘칼만 안 들었지, 날강도가 따로 없더라’라나.
그렇게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서 선별된 광고는 두 개였다.
하나는 규모는 작지만 재무구조가 견실한 편인 저가 항공사, 그리고 최근에 상장한 국내 스포츠 의류 브랜드였다.
솔직히 얼떨떨했다.
아직 1집 활동 말고는 뭘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광고 요청이 들어오니까.
들어 보니 에버드림과 같은 이유인 듯했다.
‘왠지 잘될 것 같으니 미리 값싸게 사 놔야지’하는 심산이라고 할까.
부디 그 기대에 부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들어서 부쩍 그런 느낌이 자주 들었으니까.
부풀어 오르는 풍선 같다고 해야 하나.
일이 잘 풀릴 때마다 풍선에 바람이 쉭쉭 들어가는 듯했다.
점점 커지고 있는데 누군가 바늘로 콕 찌르면 팡! 터질 것 같아서 무섭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관심이 부쩍 늘어나서 그런 모양이다.
-다큐 예고에 깜짝 등장한 아이돌 ‘뉴블랙’은 누구..?
-뉴블랙 “광고 인기에 감사.. 뒷내용 우리도 몰라”
-[이번주 연예 포커스] 신인은 언제나 배가 고프다, 보이그룹 뉴블랙
다큐 예고편에 2초 정도 나온 장면까지 인터넷에 올라오고 기사화가 된다니.
캡처 화면을 본 동생들은 그럴만하다고 납득했지만 내 기준으론 부담스러웠다.
나부터가 관종이긴 했지만 그 관심이 늘어나는 속도가 내 예상을 웃돌았으니까.
마치 은행에 원금을 콩알만큼 예치해 놨는데 이자가 엄청 빠르게 붙는 느낌이다.
뭐.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졌지만 일단 지금은 스케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우와아아…….”
TJ 엔터에 방문했던 날 이후로 다시 듣는 ‘우와아’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동참하고 있었다.
“와, 진짜 크네.”
주세한 녹화를 며칠 앞둔 주말.
거대한 무대 아래 모인 우리는 저마다 옷에 이름이 달린 팻말을 건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
6만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 가능한 그 규모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금일의 스케줄은 ‘찾아Dream 콘서트.’
문화체육부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아이돌 서른 팀 정도를 모아서 진행하는 행사였다.
신인인 관계로 리허설이 거의 처음 순서여서 미리 입장해서 객석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째 이곳을 둘러보는 동생들의 표정이 묘했다.
아마 거울을 보면 나도 저러고 있을 것 같다.
올해 데뷔한 서른다섯 팀 중에 이 콘서트에 참여한 신인그룹이 우리를 포함해 단 세 팀 정도라는 사실도 있지만, 그보다 다른 이유였다.
“이런 데서 콘서트 하면 기분 끝내주겠다….”
늘 덤덤한 중현이가 그런 말을 할 정도니 다른 멤버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여. 우리도 언젠가 이런 데서 할 수 있겠져?”
“그렇겠지.”
내가 대답했다.
“언젠가는.”
“지금이라도 하구 싶다. 우리 수플레들 앉혀 놓고.”
“어려울걸. 우리 수플레들이 일인당 다섯씩 복제되어도 여기 다 못 채워.”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공연장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이런 곳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우리가 단독으로 팬분들 앞에서 노래 부를 장면을 생각하면서.
“근데 아쉽긴 하네여.”
막내가 말했다.
“이따 공연 피날레랑 겹쳐서 다큐 못 볼 것 같은데.”
“뭐, 재방으로 보면 되지. 그리고 많이 나오지도 않을 거야. 거기에 나오는 의인이 얼마나 많겠어.”
그런 말을 하며 무대 위로 올라갔다.
다큐멘터리는 나가는데 의의를 둘 뿐, 큰 기대를 하고 있진 않았으니까.
세상에 의인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뭐 많이 나오기라도 하겠어.
* * *
월드컵 경기장 특별 무대에서 공연이 한창 진행 중일 때, PBS에서는 다큐멘터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잔잔한 배경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평화로운 장면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어느 엄마, 리어카를 끄는 노인을 도와 언덕길을 올라가는 청년, 한산한 고시원 앞의 풍경, 그리고 항구 도시의 전경까지.
그 정적인 장면들이 느릿하게 이어진다.
이윽고.
긴장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분위기가 확 반전됐다.
돌부리에 걸려 균형을 잃은 엄마가 유모차를 내리막에서 놓치고, 어느 노인에게 차량이 달려들고, 고시원에서 불이 나기 시작하고, 항구의 기름탱크가 폭발하는 장면까지.
그리고 그런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리는 이들의 모습이 한 편의 영화처럼 담겼다.
암전된 화면 위로 떠오르는 글씨.
[영웅(Hero)]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 - 국어사전
“위대하거나 용감한 행위로 일을 해내는 사람.” - 메리 웹스터 사전
곧이어 Hero의 어원에 관한 설명과 함께 영웅이란 단어가 포커싱되어 떠올랐다.
[영웅의 탄생 : 타고나는가, 길러지는가]
바로 PBS 5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의 제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