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08화
할아버지의 이름은 강문식이었다.
“어이구, 하도 안 오길래 우리 집에는 안 찾아오는가 보다 싶었어. 어유, 이…….”
우리 셋을 보며 눈을 데굴데굴 굴리셨는데, 자기 집을 방문한 연예인들에게 누구 아니냐고 해 주고 싶으셨던 듯했다.
하지만 저분이 아실 리가 없지.
한 명은 SNS를 통해 유명해진 방송인이고, 나머지 둘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 아이돌이니까.
“미남미녀들이 오셨구먼! 흐하핫!”
…결국 그렇게 정리됐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
신이 난 어르신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방송국 사람들이 온다고 해서, 아침부터 집을 싹 다 치워 놨어. 깨끗하지?”
“집이 엄청 좋네용.”
맥시가 거실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깔끔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거실은 넓고 근사했다.
채광도 좋아서 햇볕이 포근하게 들어왔는데, 저 뙤약볕이 이렇게 곱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빵빵하게 흘러나오는 에어컨 덕분일 것이다.
아. 시원해.
피부에 닿는 서늘한 감촉이 몹시 반가웠다.
“마실 거라도 드릴까?”
“아뇨. 저희…….”
“우유 있어요?”
“…….”
맥시의 말에 곧바로 우유 세 잔이 날아왔다.
다들 거실에 자리 잡는 가운데 리혁이가 냉큼 일어나서 어르신에게 쟁반을 받아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술잔을 꺾듯 고개를 돌려 우유를 마시는 리혁이의 모습에 잠시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다들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가?”
잠시 자기소개 시간이 이어졌다.
물론 우리가 누군지 알아듣는 기색은 아니셨다.
SNS가 뭐냐고 물어보셨을 정도였으니까.
그나마 ‘저희 PBS 한밤의 음악회에도 나온 적 있어요’라고 하니 그제야 ‘유명한 가수신가 보구먼’이라고 하셨다.
사실, 우리가 누구든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듯 강문식 할아버지가 껄껄 웃었다.
“방송국 사람들이 온다고 해서 어제부터 잠을 설쳤어. 옷도 제일 좋은 걸로만 꺼내 놓고.”
어쩐지, 평소 안 입으시던 옷이었구나.
명품 로고가 왕따시만 하게 박힌 벨트나 폴로 셔츠 때문에 깜짝 놀랐던 터였다.
“내가 살면서 별걸 다 해 봤지만, 테레비에 나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가지고… 응, 지난번에 그, 내 고향 프로에서도 다른 집은 다 나왔는데, 아 글쎄, 방송국 것들이 내 집은 영 시골집 같지가 않다고 안 내보내겠다고 하는 거 아녀.”
“나쁜 사람들이 다 있네요.”
“그치? 하여간 못된 것들만 있었어. 늙은이들 계속 세워 두고.”
하지만 왜 이 집이 방송에 안 나갔는지는 알 것 같다.
굉장히 최신식이었으니까.
농촌을 다루는 프로에 넣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한 장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슬레이트 지붕이 달린 집에 살고 있는데 여기는 개집도 기와집이었으니까.
혹시 주세한에서도 그런 이유 때문에 강황을 배정한 걸까?
그냥 안 가도 되도록…?
정말 그런 의도로 한 거면 나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집이 좋아도 어르신 혼자 외롭게 사시는 집인걸.
내가 물었다.
“저… 그럼 혼자 사시는 건가요?”
“그렇지. 집은 자식들이 지어 줬는데, 요새는 영 오지도 않어. 집만 지어 주고 땡이다 이거지.”
“아…….”
“에궁.. 외로우시겠어요.”
뭐라고 리액션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우리 셀럽이 대신해 줬다.
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빗장이 풀린 수문처럼 할아버지는 그간 참았던 수다를 대방출했다.
어렸을 때 도랑에서 가재 잡던 이야기부터 월남전의 정글, 사별한 할머님과의 러브 스토리,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어떤 노동을 했는지 등등.
그야말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였다.
근데 이러면 안 되는데…….
졸음이 밀려왔다.
밤잠도 설친 채 아침부터 막 뛰어다녀서 그런 걸까.
온몸이 노곤했다.
최대한 눈을 뜨고 웃으면서 이야기마다 리액션을 했는데, 자꾸만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왔다.
심지어 우리를 찍는 VJ는 반쯤 기절해 있었다.
나머지 둘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리혁이와 맥시는 공포 영화에 나오는, 눈을 뜬 채 죽은 사람처럼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입만 웃는 기괴한 표정이었다.
나도 저러고 있을 것 같다.
마침내 2010년대 들어와 다시 고향땅에 돌아왔다는 이야기로 결말이 나왔을 때.
“아이구, 너무 내 얘기만 했네.”
“…아니에요. 너무 재미있었어요.”
내가 손뼉을 치자, 리혁이도 같이 박수쳤다.
“맞아요. 교훈적이었어요.”
“에궁.. 얘기하시느라 고생했어요.”
할아버지가 시계를 보며 물었다.
“이제 슬슬 가야 할 텐데. 그, 미션인가 뭔가를 해야 된담서.”
“네, 할아버지.”
“그럼 나랑 게임 한 판 가능한가?”
“게임이요?”
곧바로 할아버지께서 서랍장에서 뭔가를 꺼내 오셨다.
…화투였다.
미성년자가 끼어 있는 나와 리혁이가 당황하고, 맥시가 눈을 반짝반짝 빛낼 때, VJ가 고개를 저었다.
방송에 내보낼 수 없다는 듯했다.
강문식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표정이었다.
“아이고, 아쉽네. 경로당에서 다른 사람들이 할 때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같이 안 하세요?”
“할망구들이 남자라고 안 껴 줘. 말이 많다고 저리 가라고 그러는데, 내가 대체 말이 뭐가 많다고… 잉.”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뭐, 그럼 다 됐구.”
강문식 할아버지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나랑 악수 한 번씩만 하고 가.”
“저희가 포옹해 드릴게요.”
“됐어, 뭘 그렇게까지…….”
…라고 하셨지만 셋이서 번갈아서 포옹을 해 주니, 강문식 할아버지의 입이 귀에 걸리다시피 하셨다.
집밖으로 나와 리트리버와 함께 손을 흔들던 할아버지가 외쳤다.
“내가 이따 식사하면 꼭, 그 집으로 갈게! 사람들 많이 데리고!”
호언장담을 하시는 할아버지에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미션 시간이 거의 끝나고 있었기에 우리는 마을 회관으로 다시 걸어갔다.
고작 몇 시간도 안 지났는데 이렇게 보고 싶다니.
얼른 멤버들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특히, 중현이 얘기가 궁금했다.
아까 흑염소한테 쫓기던 이후로 어떻게 된 건지 말이야.
* * *
“…이게 다 고구마예요?”
고구마 두 박스를 보며 헤이션이 혀를 내둘렀다. 그 모습에 노부부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부족한가?”
“아뇨, 아뇨.”
“왜, 부족할 수도 있지. 한 박스 더 꺼내 와.”
“지가 할 것이지, 맨날 나만 시켜….”
할아버지가 투덜대면서 고구마 한 박스를 마당에 내어 왔다. 헤이션이 물었다.
“너무 많이 주시는 것 같은데…….”
“대길이 때문에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구.”
“감사히 받겠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을 저었다.
“고맙기는. 감사 인사는 우리가 해야지. 저눔이 요새 밥을 도통 처먹지를 않아서 걱정이었는데, 해결되니 얼마나 좋아.”
“우리는 쟤가 병이 걸린 줄 알았잖어. 옛날에 누구냐, 그 홍순이네 집 염소처럼 낭종이라도 생겼나 했지. 근데 수의사 양반이 그러는데 엄청나게 건강하대.”
“삼을 많이 먹어서 그래.”
“그니까, 삼을 그렇게 처멕이니까 지랄병이 도진 거 아녀.”
“저렇게 될 줄은 몰랐지….”
또 싸우기 시작하는 부부를 보며 헤이션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부부는 카메라를 보고 곧장 화해했다. 그러곤 개집 앞에 앉아 있는 아이돌 멤버를 바라보았다.
“기특도 하지. 도대체 뭔 수를 썼길래 저렇게 대길이가 얌전하대?”
트럭에 치일 뻔한 염소를 구하면서 레슬링 기술을 걸었다는 이야기 따위는 전혀 할 수 없었다.
“…….”
김중현은 개집 앞에 쪼그려 앉아 흑염소의 턱을 살살 긁어 주고 있었다.
천상 시골 소년 같은 순박한 태가 우러나왔다.
염소도 그게 기꺼운지 눈을 감고 메에에- 울면서 밥을 먹고 있었다.
물론, 그릇에 담긴 양배추를 질겅질겅 씹던 염소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양배추를 퉤 뱉곤 했는데, 그때마다 김중현이 염소의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흑염소가 고분고분하게 음식을 씹었다.
분노 조절 장애였던 흑염소는 이제 분노 조절을 잘하고 있었다.
헤이션과 VJ에게는 여전히 ‘뭘 봐, 이것들아’하는 불손한 눈빛을 던져 댔지만, 자신을 제압한 이에게는 고분고분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방금 대길이 밥 다 먹였어요.”
“어유, 잘했어. 잘했어. 기특하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내려와서 흑염소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기특하다는 듯 손을 뻗어서 쓰다듬으려고 하자, 대길이가 고개를 홱 저었다.
“…삼을 멕여서 그래.”
그들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집을 나선 그들의 품에는 고구마 상자가 들려 있었다.
두 박스를 품에 안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김중현의 얼굴에는 연신 행복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백점 답안지를 들고 귀가하는 초등학생 같은 표정이었다.
헤이션이 물었다.
“그렇게 좋아?”
“멤버들 중에 고구마 좋아해서 맨날 말랭이 먹는 애가 있거든요. 이거 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요리하는 애도 좋아할 거라며 김중현이 웃었다.
주변이 환해지는 미소였다.
* * *
마을 회관.
조리를 맡은 팀원들이 저마다 요리 기구가 테이블 앞을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중간중간마다 제작진이 상황을 알렸다.
“A팀 생선 획득했습니다!”
“오오!”
개그맨 서지형과 배우 한여름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했다.
이어서 다른 팀에게도 낭보가 들렸다.
“B팀, 소고기 획득했어요!”
“A팀, 미션으로 획득한 조미료 드리겠습니다!”
“A팀, 방금 고추장 획득했어요!”
그럴 때마다 제작진이 냉장 보관된 재료를 통째로 꺼내와 건넸다.
하지만 C팀에 대한 소식은 별로 없었다.
조리팀을 맡은 김비주와 여희연은 시계를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선배님, 왜 저희 팀원들 연락이 없는 걸까요.”
“그러니까, 여희찬 이 새… 생각은 하고 다니는 거야? 다른 팀처럼 빨리빨리 미션을 처리해야지!”
“…다들 메시지라도 보내 볼까요?”
“아냐. 일단 두고 보자.”
그때, 제작진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흑염소? 누구 흑염소 분량 찍은 사람 없냐고 그러는데, 도영이가.”
“뭔 흑염소?”
“C팀 멤버 중에 헤이션 씨랑 뉴블랙 걔, 키 큰 애가 흑염소랑 추격전을 했는데 그 부분만 못 찍었대.”
“추격전? 흑염소랑?”
여희연은 옆자리에서 이마를 감싸고 있는 이를 보았다. 김비주가 ‘김중현..’하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중현이가 뭘 했나 보네.”
“…돌아오면 무슨 일인지 꼭 물어볼 거예요.”
눈을 음험하게 빛내는 미소년을 보며 웃을 때, 옆자리 A팀에서 서지형이 깐족거리듯 말했다.
“그쪽 팀은 흑염소 탕으로 메뉴 바꿔도 되겠네요.”
“서지형 씨.”
“왜요?”
“신경 끄고 그쪽 프라이팬이나 보세요. 거기 타고 있네.”
“어어……!”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인간이라고 여희연은 생각했다.
오형석은 저런 후배가 뭐가 좋다고 특집 때마다 챙겨 주는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해할 만했다.
‘잘하네.’
홍대에서 곱창집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저렇게 요리를 잘하는 줄은 몰랐다.
같은 조리팀인 한여름에게 은근히 추근대는 것만 빼면 솜씨로는 완벽했다.
“쟤 잘하지?”
A팀의 원로 배우 양옥분이 귤을 까먹으며 C팀으로 마실을 왔다.
여희연이 물었다.
“쌤은 요리 안 하세요?”
“얘, 내가 드라마에서도 손에 물을 안 묻히는데 요리를 잘하겠니. 지금도 둘이 쿵짝이 잘 맞아서 내가 끼면 싫어하더라.”
“서지형 씨도 그렇지만, 저기 배우분 잘하네요.”
“보통이 아니야. 칼질하는 게 예사롭지 않더라. 얘, 나는 세상에 저렇게 칼 잘 쓰는 애 처음 봤어.”
그 말대로 미국 요리 학교를 나왔다는 한여름의 솜씨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처음에는 살짝 서툴렀지만, 몸이 기억하는 듯 곧바로 요리를 척척 이어 나갔다.
양옥분이 귤을 까먹으며 B팀을 가리켰다.
“쟤네는 영 힘들어 보이네.”
“진우 오빠는 그래도 요리 좀 할걸요? SNS에 가끔 요리하는 사진 올리잖아요.”
“그건 컨셉 샷이고.”
멀리서 용케도 들은 송진우가 도마 위 재료를 썰었다.
“요즘에는 너랑 희찬이가 광고하는 그 뭐냐, 그 배달 어플 때문에 요리를 할 틈이 없어.”
“그죠, 그거 편하죠?”
“배달 삼겹살 엄청 맛있더라.”
“그거 맛있니?”
양옥분이 B팀으로 넘어가 수다를 떨었다.
조리팀인 송진우와 걸스온탑 주하나로부터 토크를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원로 배우가 걸그룹 멤버의 손을 보며 감탄했다.
“손이 참 곱네, 팔도 가늘고. 요리할 힘은 낼 수 있겠어?”
“저 열심히 하고 있어요, 선생님.”
“근데 열심히 하는 거랑 잘하는 건 다르지.”
“아, 쌤.”
송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 놀리지 말고 팀원들도 좀 도와주세요. 하루 종일 귤만 잡숴.”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라고 하면서 C팀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 관심을 보인 대상은 김비주였다.
“근데 얘, 너도 아이돌 아니니?”
“네, 선생님.”
김비주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너는 어떻게 요리를 좀 해 봤어?”
“취미로 조금 해 봐서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우승은 우리가 하겠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여희연이 발끈했다.
“승부는 원래 끝날 때까지 모르는 거예요. 2002년에 골든골 기억 안 나세요, 선생님?”
“어우, 얘. 넌 승부 얘기만 나오면 애가 무서워지니.”
그리고 그때.
“C팀! 간장 획득했습니다!”
“C팀! 획득한 당면 드릴게요!”
곧바로 재료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첫 미션과 텀이 살짝 있었지만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 엄청난 속도를 보면서 여희연이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때, 김비주가 약도를 보며 말했다.
“우주 형이 움직이는 중인가 봐요.”
“…그러네.”
무슨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태풍처럼 선우주가 미션을 해결하고 다니고 있었다.
왕지호나 김중현이 속한 다른 팀도 마찬가지였다.
그 많은 재료를 받아 든 그들은 먼저 요리 재료를 정리하고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당근 좀 썰어 놓을게요.”
“응, 조심해. 그러다 다치면……”
삭삭삭삭삭-
“……?”
여희연이 눈을 깜빡거렸다.
순식간에 당근이 썰렸다.
김비주가 집중한 눈으로 식칼을 움직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한두 해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비주야.”
“네?”
재료에 시선을 둔 채로 대답하는 김비주에게 물었다.
“너 요리가 취미라고 하지 않았니?”
“네, 취미 맞아요.”
“엄청 잘하는 것 같은데…….”
“사정이 좀 있어서,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요리를 했거든요. 한 10년 정도 됐어요.”
“…그쯤 되면 취미의 영역을 벗어난 것 같은데.”
김비주가 미소를 지으며 남은 재료들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여희연이 멀뚱멀뚱 보는 동안, 손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그제야 상대의 손에 은근히 있는 굳은살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게 포장지를 뜯어 재료를 분류하고.
빠르게 씻고.
물을 끓여서 재료를 데치고.
한 편의 요리 강좌 같은 풍경에 B팀에 있던 송진우와 주하나가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A팀이야 압도적인 우승 후보니 그렇다 쳤지만, C팀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머, 얘 좀 봐.”
양옥분이 감탄했다.
“꼭 우리 며느리처럼 잘하네. 넌 걱정 덜었다, 희연아.”
“그러게요.”
여희연은 요리 재료를 손질하는 이를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그 옆에 조수처럼 붙었다.
원래는 둘 다 잘 못하는 처지니 자신이 리드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비주야, 나 뭘 하면 될까?”
“그러면 시금치 손질 좀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선배님, 그, 시금치 손질은 만지작거리는 게 아니구요. 흙이랑 꼭다리 부분, 아아! 칼 그렇게 잡으면 위험… 그냥, 가위로 하셔도 돼요.”
그러는 동안 카메라 감독이 그 풍경을 담았다.
성격이 강한 여희연이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은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물론 말하는 이는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지만.
“선배님, 시금치도 상추랑 같이 잎에 주름이 있어서 사이사이마다 꼼꼼하게 씻어 주셔야 돼요.”
“…네. 아니, 응.”
내가 이거 끝나면 요리 자격증 꼭 따고 만다는 결심을 불태우는 여희연이었다.
한편, 본격적인 요리가 시작되면서 C팀 테이블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인지 A팀도 새롭게 등장한 다크호스를 의식한 듯 조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B팀의 송진우와 주하나는 불태우고 있었다.
요리를.
“으아, 이거 타나 봐요!”
“야, 물 컵! 종이컵! 종이컵!”
“종이컵이 타요! 선배님!”
그 풍경을 보며 여희연은 남 일 같지가 않다고 여겼다.
당장 김비주가 요리를 하지 못했다면 자신도 저러고 있었을 테니까.
‘희한한 애들이라니까.’
한 명은 농구 코트 끝에서부터 공을 던져서 넣어 버리질 않나, 다른 하나는 요리를 10년 동안 했다고 하지를 않나.
나머지 애들도 다 이런 식으로 뭐가 있는 건가?
한편, 요리가 순조롭게 되어 가는 동안 여희연은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요리를 하던 김비주가 흐으음 하며 뭔가 고민하는 기색을 할 때면, 그녀에게 양해를 구하곤 했다.
“선배님, 잠시 저 바깥에 좀 다녀와도 될까요?”
“바깥?”
“네, 요리 관련해서 여쭤볼 게 있는데, 그분이 방송에 나오면 안 되는 분이어서요.”
“얼른 다녀와.”
그러곤 몹시 개운한 표정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마다 요리 실력이 몹시 상승했다.
그것도 두세 번 넘게 계속.
여희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런데 지금 물어보는 사람이 누구야? 어디 셰프님이라거나, 요리 연구가 그런 분이야?”
“아뇨, 그건 아닌데.”
김비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네에서 제일 유명한 식당 사장님이세요.”
* * *
군산시의 한 백반집.
-할머님, 또 저예요..
영상 통화 화면으로 산뜻한 외모의 소년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김덕순 여사가 웃었다.
“그려, 우리 비주. 이번에는 뭐가 문제여.”
-불 조절 관련해서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요.
“응응, 편하게 물어봐.”
턱을 괴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어쩜 속눈썹도 저렇게 길까.
잘생기기만 해서 정감 없는 손자 놈과는 다르게 곱고 뽀얀 얼굴이 몹시도 귀여웠다.
말하는 것도 어찌나 진중하고, 조신한지.
맨날 ‘할머니, 나만 이뻐해야 돼’하며 깐족대는 손자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그랬기에 김덕순 여사는 50년에 걸친 노하우를 전수해 주었다.
“그려. 근데 지금 어디서 통화하는겨? 시커멓고. 어디 창고라도 들어왔어?”
-말씀드릴 수 없는 장소에요….
“그려. 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네,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들고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영상 통화 화면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할머님. 제가 오늘 신세만…… 으아아! 나방! 화장실에 나방 들어왔…….
뚝.
비명과 함께 끊기는 영상통화를 보며 김덕순 여사는 애뜻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손주 놈 주변에는 정상이 없구만.